블랙베리 맛에 중독됐습니다.

전화기를 자주 바꾸는 나쁜 습관 때문에 한 1년 쯤 휴대전화를 쓰고나면 늘 새 전화기를 찾아 두리번거리곤 합니다. 멀쩡한 전화기를 일부러 학대하기도 하고, 실수로 전화기를 떨어뜨리면 혹시 망가졌을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잔뜩 기대하며 들어보곤 합니다. (하지만 한국 휴대전화들은 워낙 튼튼하게 만들어서, 심지어 LG 싸이언은 총알도 막아 외신에 나온 적도 있어서…) 잘 망가지지도 않습니다.
결국 멀쩡한 전화기를 놔두고 새 전화기를 사고야 말았습니다. 이번엔 블랙베리입니다. 사고 나서 느낀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1. 한국 휴대전화 업체의 장점은 ‘말끔한 제조와 뛰어난 디자인 능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정도 진실이고, 어느 정도 틀렸습니다. 키는 튼튼하고, 외장은 말끔하며, 손 닿는 곳마다 인체공학적이란 생각이 듭니다. 이런 점은 한국 휴대전화보다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문제는 끝마무리입니다. 메이드인코리아가 메이드인재팬을 못 쫓아가던 딱 그 시절의 느낌을 받았습니다. 배터리커버가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도록 각도를 조금 조절했으면 될텐데, 그 마지막 1%를 잡지 않더군요. 프로그램을 이것저것 설치하다가 무선통신량이 늘어나다보니 발열과 배터리 소모가 갑자기 늘어납니다.역시 마지막 1%에 무심했던 결과라고 생각됩니다.

2. UI는 최고! 인데, OS는 거참, 입니다. 처음 전원을 켜고 이것저것 쓰다보면 ‘어머, 어쩜’ 하는 감탄사가 수없이 나옵니다. 직관적으로 이러려니 생각하면 그렇게 됩니다. 특히 트랙볼을 입력장치로 쓰는데, 트랙볼 자체를 꾹 누르면 클릭입니다. 아무 화면에서나 꾹 누르면 사용자가 생각할 법한 명령에 커서가 바로 갑니다. 예를 들어 메일을 읽다가 트랙볼을 누르면 ‘답장’ 위에 커서가 올라가 있고, 문장을 선택하고 트랙볼을 누르면 ‘복사’ 위에 커서가 자동으로 올라가는 식입니다. 복잡한 메뉴를 찾아 헤맬 일이 거의 없습니다. 세심한 배려에 마음이 따뜻해질 정도입니다. 그런데, UI는 그토록 감성적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이놈의 OS 자체는 엉망진창입니다. 이것저것 하다보면 문제가 생기고, 밀고 다시 깔기를 반복합니다. 윈도95 시절로 돌아가기라도 한 것 같습니다. 게다가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있으면 메모리 걱정이 생깁니다. 메모리 확보를 자동으로 해주는 게 아니라, 사용자가 계속 신경쓰도록 만든 이상한 시스템입니다.

3. 업무의 개념이 달라졌습니다. 단순히 이메일을 실시간으로 받아보기 시작했을 뿐인데, 업무의 공간과 시간에 대한 관념이 완전히 변했습니다. 이메일이 문자메시지처럼 들어오다보니, 의사결정의 시간이 몹시 빨라집니다. 게다가 몰아서 읽으면 흘려보내기 쉬웠던 수많은 메일들을 좀 더 꼼꼼히 읽는 효과도 생겼습니다. 그리고, 이건 장점인지 단점인지 참 알쏭달쏭한데, 식사 시간이든, 취침 시간이든, 화장실에 있든, 지하철에 있든, 거의 늘 업무를 붙잡고 업무를 고민합니다. 단점이겠죠? 연관된 변화 가운데 하나는, 아래아 한글 첨부파일을 보내는 사람들이 미워지기 시작합니다. 표준 문서 포맷의 중요성을 깨닫는 중이죠. 또 다른 연관된 변화는, 웹표준을 지키지 않는 인터넷이 싫어진다는 겁니다. 블랙베리 브라우저도 자바스크립트까진 읽어들이는데, 액티브X는 당연히 불가능입니다.

4. 노트북을 켜는 시간이 줄어들었습니다. 제 맥북은 집에서는 늘 배 위에, 회사에서는 늘 책상 위에 놓여있었는데, 이젠 잘 열어보지도 않습니다. 블랙베리가 정말 길게 타자를 쳐야 할 일이 아니면, 어지간한 일은 다 대신합니다. 대신 그 덕분에 안 좋은 점이 생겼습니다. 노트북을 보다가 고개를 들면 블랙베리를 보고, 고개를 숙이면 다시 노트북을 봅니다. 50분 일하고 10분은 멀리 봐 줘야 눈 건강을 지킨다는데, 몇 시간이고 눈 앞만 바라봅니다. 나이 먹으면 시력이 크게 나빠지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런 환경에서는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눈이 고장나기 쉬울 겁니다. 눈 좀 쉬게 해줘야 하는데 말이죠.

아이팟터치를 쓸 때는 아이폰이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기계를 늘 들고 다니며 쓰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죠. 그런데 지금 블랙베리를 하루종일 끼고 살다보니, 이거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부작용이 너무 심합니다. 기꺼이 좋다고 제 돈 내고 하는 일이지만, 중독에서 헤어나오기도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 모든 부작용에 대해서 ‘업무를 위해서’라는 가당찮은 자기합리화도 잘 됩니다. 아이폰이 들어오면 더 할 겁니다. 블랙베리를 산 뒤로 아이팟터치를 두고 다니고 있는데, 그 덕에 영화 예고편 팟캐스트도 지웠고, 멋진 광고 팟캐스트도 지웠습니다. 게임도 훨씬 적게 합니다. 아이폰을 사게 되면 지금 블랙베리로 하는 일을 그대로 다 하면서 거기에 더해 더 많은 비디오도 보고 더 많은 게임도 하게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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