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폰과 평양면옥

아, 정말 미치겠습니다.

 

마케팅 수업 시간이 시작됐을 때 교수님이 그러셨죠. "소비자들은 다 멍청이다."
조금 지나니 그 말뜻은 이런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너희들도 다 멍청이고,
나도 멍청이다." 마케팅이란 게 그런 것이죠. 멍청한 우리들의 욕망을 자극해
필요없는 소비를 더 이끌어내는 것. 제게도 그런 대상이 몇 있습니다. ‘기꺼이 멍청이가 되고픈 강력한 욕구’를
끌어오르게 하는 두 곳이 있죠. 하나가 애플이고, 하나가 평양면옥입니다.

 

이 땅의 수많은 아이들이 그렇게 자라왔듯, 저도 어린 시절 외할머니의 손에서
자라났습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가 되어서야 서울로 상경했습니다. 그때까지 지방
소도시에서 자라면서 얻은 가장 큰 외할머니의 교육은… 영어단어나 수학공식일리가
없죠. 바로 입맛이었습니다. 외할머니는
평안도와 황해도 음식의 정수를 온 몸에 체화하고 있는 바로 그런 분이셨습니다.
기어이 손으로 반죽을 해서 밀대로 넓게 편 밀가루 반죽을 커다란 양은 주전자 뚜껑으로
둥글게 썰어내 만든 만두피로 빚어낸 이북식 평양만두, 직접 녹두를
갈아서 만든 녹두 빈대떡과 콩을 갈아 만든 콩비지에 콩국수까지… 어린 시절은
그야말로 계절마다 맛의 향연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정수 중의 정수는 시원한 김치와 동치미였죠.
장독대에 내놓은 살얼음 얼은 동치미 국물을 겨울밤 아랫목에서 먹는 맛이라거나,
찬밥덩이를 훌쩍 넣어 참기름 몇 방울 떨어뜨린 김치국물에 말아 먹는 김치말이밥이란… 하지만 이북음식의 달인인 외할머니도 꼭 직접
찾아가서 음식점에서 사 먹는 음식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냉면입니다. 여러 독에서
꺼낸
동치미 국물을 잘 ‘블렌딩'(할머니는 그저 섞는다고 하셨지만)해 표준화한 각 냉면집만의 독특한
동치미 국물과, 역시 쇠고기와 돼지고기, 집에 따라 꿩고기와 닭고기까지 넣어 푹 우려내 만든 육수를
역시 이 동치미 국물에 잘 블렌딩해 만들어내는 냉면육수는 가정집에서 가끔 소량으로
만들기엔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생긴 입맛 탓에 전국 곳곳의 유명한 평양냉면집 가운데 절반 이상은
가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제 취향에 가장 잘 맞는 집이 바로 장충동 평양면옥입니다.

 

이게 비극이었습니다. 그냥 아무 곳에서나 먹고 말면 좋을 텐데,
일단 맛을 알고 나자 곧 죽어도 이 집 냉면을 먹어야겠는 겁니다. 얼마 전 평양면옥에 갔습니다. 제 앞에 놓인 냉면에 식초를 약간 뿌리곤
휘휘 휘젓다가 한 젓가락을 먹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잘 몰랐습니다. 이 집 맛이
정말 들쭉날쭉하거든요. 맛있는 날은 정말 하늘나라 냉면선사가 즐기는 냉면맛인양
맛있는데, 어떤 날은
육수가 짜고, 어떤 날은 메밀이 지나치게 삶아져서 면이 흐물거립니다.(푸석푸석한
메밀면의 맛이 아니라, 불은 밀가루 소면처럼요.) 그날도 첫 맛이 약간 이상하자
그냥 ‘잘못 고른 날’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휘휘 저을수록 거품이 올라오는 겁니다. 설거지가 제대로 안
돼 세제가 남아있던 것이었죠. 아주머니를 불렀습니다. "그럴리가 없어요. 이거
원래 이런거에요." 아주머니께서 진한 연변 사투리로 우기십니다. 앞자리에 앉은 와이프의 냉면을 휘휘
저어줬습니다. 아무런 거품도 나지 않습니다. "그럼, 이게 잘못된 건가요?"
아주머니 당황하십니다. "이걸 어쩌죠. 죄송합니다. 어떻게 해드릴까요?"
아, 화를 내진 않더라도 공짜로 한그릇 얻어먹고 나오기라도 해야하는데, 전 "그냥 새로 한그릇 갖다주세요"라고
말하곤, 다시 한그릇을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물론 돈도 다 제대로 내고 나왔습니다. 이미 먹은
세제, 이제 와서 뱉을 것도 아니니 어쩌리… 하면서 말이죠.
그래서 비극입니다. 전 비굴합니다. 그래도 어쩝니까. 대안이 없는데. 이런 건 이
집에서밖에
맛볼 수가 없거든요.

 

애플과의 인연도 대충 비슷합니다. 약 20년 전 쯤 됐으려나… 아버지께서 잡지를
사오셨습니다. 컴퓨터 잡지였습니다. "나는 잘 모르지만, 미래는 컴퓨터의 시대라고
한다. 그러니까 넌 이걸 보고 열심히 컴퓨터를 익혀두거라." 그 덕분에 지금
IT 기자일을 하게 될 줄이야… 어쨌든 그 잡지의 커버스토리에는 애플에서 쫓겨나
넥스트(NeXT)를 창업한
스티브 잡스의 스토리가 나와있었습니다. 아마 ‘넥스트큐브’라는 엄청나게 비싸면서
겉모양은 매끈하게 잘 빠진 컴퓨터가 나왔을 때였던 걸로
추정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스티브 잡스는 기자들이 좋아하는 ‘얘기거리’가 가득한
CEO여서 한국 컴퓨터잡지사 기자들도 열심히 외신을 뒤적였던 걸로 추정됩니다. 전
정신없이 그 파란만장한 이야기에 빠져들었죠.

 

그게 비극이었습니다. 그냥 그 시절 일은 다 잊어버린 채 윈도 PC나 사서 쓰면 됐을 걸, 괜히
멋지게 애플에 복귀한 어린 시절의 스티브 잡스가 만들었다는 아이팟에 재미를 붙이고
말았습니다. 그 뒤로 아이팟을 시리즈별로 사들이기 시작하고, 매킨토시에도 손을
뻗치기 시작해 맥미니와 아이맥, 맥북까지 집에 있는 컴퓨터의 절반 이상이 맥이 돼
버렸습니다.(컴퓨터가 몇 대냐고 물으신다면, 저의 멍청한 소비자 기질을 탓할 뿐입니다…) 무선공유기도 에어포트 익스프레스, 마우스도 마이티마우스입니다. 결국
결혼 뒤 문제가 불거지더군요. 와이프가 제 선택에 불만을 갖는 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불편하기 그지 없는 낡은 수동변속기 차량이고, 또 하나가 만만찮게 불편한(저만
몹시도 편한) 매킨토시 환경입니다. 둘 다 어쩔 수 없이 같이 쓰는데, 자기가
손해라는 것이죠. 게다가 애플은 최대한 효율적인 제조를
하는 회사라 제품이 도무지 한국이나 일본 제품들처럼 튼튼하게 버텨주질 못합니다.
AS 워런티를 1년은 해줘야 하기 때문에 딱 1년은
아무 문제없던 제품들이 1년이 지나면 하나둘 문제를 일으키다 결국 치명적인
말썽에 이릅니다. 제 아이맥은 2년 됐을 뿐인데 무선랜 수신부에 문제가 생겼고,
맥북도 2년 됐을 뿐인데 이더넷 포트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이팟들은 1년만 지나면 액정이 나가거나,
벽돌처럼 굳어버리거나, 배터리 수명이 지나치게 급감합니다. 물론 문제없는 제품들도 있지만 수많은 애플 제품들 가운데 불량없이 2년
이상 버텨주는 건 한 절반 정도인 것 같습니다. 그럼 사지 말아야합니다. 그게
올바른 소비자의 자세입니다. 애플이 뭘 만들든 모른 척
무시하면 그만입니다. 소니에서 멋진 디자인의 바이오 노트북이 나오고, HP가 값싸고
성능좋은 혁신적인 컴퓨터를
만든다고 하고, 삼성전자 YEPP도 음질이 뛰어나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국 또 맥북프로의
가격표를 보고 있고, 매직마우스에 탐을 냅니다. 어쩝니까. 대안이 없는데. 이런
건 애플밖에 못 만듭니다.

 

그러다 아이폰이 나왔습니다. 전에 이 블로그에도 쓴 적이 있지만, 블랙베리를
산 게 불과 석달 전
입니다. 그리고 전 이 핸드폰에 몹시 만족하고 있습니다. 속도도
빠르지, 키보드도 몹시 편하지, 인터넷도 잘 되고, 메신저나 메일은 정말 따라올
수 없을만큼 최고의 편리함을 자랑하지… 그런데 자꾸 아이폰에 눈이 갑니다. 제
아이폰과 매킨토시 컴퓨터들은 정말 100%
잘 어울리는 한 세트란 생각이 듭니다. 블랙베리는 좋은 기계지만 도무지 ‘조화’를
만들어내는 울림이 없어보입니다. 결국
맥북프로를 포기합니다. 그거 사지 않을테니까 아이폰을 사면 안 될까, 구차하게
와이프에게 부탁을 해봅니다. "내가 언제 새 컴퓨터를 사도 된다고 그랬지?
둘 다 안 돼!"
애당초 제가 꺼낸 제안이 말이 안 됐던 겁니다.

 

결국 이번에도 그럴 겁니다. 온갖 비아냥과 낭비라는 자책에 시달리면서도, "도대체
장난감을 사는데 매년 수백만원을 들이는 게 말이 되느냐"고 비난하는 와이프를
설득하기 위해 아양을 떨면서도, 아이폰을
사고야 말겠죠. 전혀 합리적이지 못한 이 소비를 정당화하기 위해 수십, 수백 가지의
말도 안 되는 방어논리를 만들어내면서. 28일(아이폰 정식판매 개시일)이 영원히
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더 이상 쓸 데 없는 멍청한 소비습관으로인해 괴로워하지 않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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