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폰을 낡은 기계로 보이게 만든 HTC 디자이어

넥서스원을 기억하시나요? 올해 초 구글이 직접 기획해서 만든 첫 ‘구글폰’ 얘기입니다.그 넥서스원을 만든 회사가 대만의 HTC라는 휴대전화 제조업체입니다. HTC는 한국에선
그리 유명하지 않지만 이미 세계 스마트폰 시장점유율 4위(노키아-RIM-애플-HTC)로
성장한 꽤 큰 회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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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사가 오늘(6일) ‘디자이어’라는 새 스마트폰을 공개했습니다. 사실 제가
처음 디자이어를 본 건 지난달 말입니다. HTC 직원 분께서 테스트용으로 사용하시던
기계를 봤는데, 그 때 이미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기대 이상이었거든요. 사실 올해
초 구글의 넥서스원이 나왔을 때 국내에도 그 기계를 산 분들이 계셔서 넥서스원을
본 적이 있고, 2월에 나온 모토로라의 ‘모토로이’는 직접 며칠 동안 이렇게
저렇게 사용해 보기도 했던 데다 갤럭시A도 미리 써본 터라 안드로이드폰에 대한
기대가 그리 높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은 CPU를 사용한 제품이라고 해도
아이폰과 비교하면 여전히 반응이 한 박자 느렸고, 안드로이드가 자랑하는 ‘멀티태스킹’
기능은 쓰면 쓸수록 수많은 오류와 속도 저하를 가져오는 불편한 기능이었습니다.
스마트폰을 잘 써보자고 일부러 ‘작업관리자’를 열고 실행중인 프로그램을 중단해야
한다면 이만저만 귀찮은 게 아니니까요.

 

디자이어는 이런 모든 불편을 단숨에 해결하는 기계 같았습니다. 도대체 무슨
마술을 부렸는지 넥서스원과 똑같은 기계인데, 반응속도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빨라졌습니다. 아이폰과 나란히 놓고 봐도 별 차이가 없습니다. 가장 최근에 국내에서
판매되기 시작한 삼성전자의 갤럭시A보다도 빠릅니다. 그런데 디자이어는 아이폰보다
해상도가 더 높습니다. 해상도가 높으면 그래픽 처리 속도가 떨어지기 마련인데 전혀
그런 느낌을 받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AMOLED 화면은 따로 볼 땐 잘 모르겠는데 일반
LCD와 함께 놓고 보면 선명도와 생생함이 확 눈에 들어옵니다. 제 아이폰 화면이
마치 물빠진 낡은 옷처럼 보이더군요. 하드웨어 성능을 100% 발휘할 수 있도록 여러
측면에서 고민해 소프트웨어를 최적화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HTC는 센스(Sense)라는 자체 사용자환경(UI)을 갖고 있습니다. 써보기 전엔 몰랐는데,
막상 써보니 뭐가 장점인지 확 느껴집니다. 우선 안드로이드폰이 이렇게 화려한
것이로구나 싶은 생각이 들도록 디자인이 미려합니다. 위젯들은 안드로이드 기본
프로그램의 답답함을 해결할 수 있도록 꼭 필요한 기능을 갖췄습니다. 3.7인치 화면을
가득 채우는 일정관리 위젯이나, 구글 주소록의 그룹별 주소를 따로 즐겨찾기로 설정할
수 있는 ‘연락처’ 기능은 아이폰에도 좀 훔쳐오고 싶었습니다. 특히 페이스북, 트위터
등에 로그인하면 해당 계정의 친구들을 전화번호부 상의 주소와 링크할 수 있어서
사람만 고르면 SMS든 트위터 DM이든 e메일이든 자유롭게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디테일도
뛰어났는데, 스마트폰이 자동으로 사용자의 위치를 찾아서 날씨가 해당 지역 날씨로
나옵니다. 불편하게 설정할 필요가 없지요. 전화벨이 울릴 때 전화기를 집어들면
자동으로 벨소리가 줄어들어 좀 덜 시끄럽게 배려를 해줬고, 연락처 화면에서 ‘검색’
버튼을 누르면 주소가 검색되고 지도 화면에서 ‘검색’ 버튼을 누르면 장소가 검색되며
인터넷 서핑을 하다 단어를 선택하면 해당 단어의 사전적 의미, 번역된 뜻, 구글에서
검색하기 등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사용자가 불필요한 동작을 한 번 더 하는 걸
막기 위해서 깊이 고민한 흔적이 역력하죠.

 

전에 아이폰 OS4 키노트를 보고 난 뒤 "무엇을 할 수 있느냐보다 어떻게
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포스팅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전 그런 ‘어떻게’에
대한 답을 극한까지 추구하는 게 애플이란 회사의 독특한 장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핵심경쟁력이라고 봤고요. 그런데 디자이어를 보니까 세상에 영원한 건 없는
모양입니다. 대만 기업들은 정말 빠르게 변하고, 쉽게 세계 1위 기업들의 장점을
따라합니다. 에이서가 델을 제치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고, HTC가 애플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사용자환경을 만들어내는 것도 비슷하죠. 아주 독창적인 것으로
보였던 경쟁력이 대만 기업의 스코프에 잡히는 순간 일상화되는(commoditized)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이날 이 회사가 같이 발표한 HD2를 보면 더 황당합니다.
분명히 윈도모바일폰인데, 그 오류 많고 느려터진데다 쓰기 싫게 만드는 OS가 센스
UI를 덮어쓰더니 뭔가 그럴싸한 스마트폰으로 변신해 있는 겁니다. 반응속도가 빠른
건 물론이고 심지어 멀티터치도 부드럽게 됩니다. ^^;

 

물론 100% 뛰어난 건 아닙니다. 단점도 많죠. 무엇보다 안드로이드가 원래 그렇듯,
아직 쓸만한 프로그램이 적습니다. 오죽하면 HTC가 위젯을 수없이 만들어서 주요
기능을 커버하려 들까요. 그런데 사실은 이런 건 그냥 소프트웨어 업체에게 맡겨두는
게 더 낫습니다. HTC가 아무리 자체 트위터 클라이언트를 만들어도 막상 써봤더니
트위터가 직접 제작한 안드로이드용 트위터앱이 더 낫더군요. 시간이 지날수록 위젯이
점점 새 앱과 중복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버전업도 느립니다. 센스
UI를 안드로이드에 맞춰 최적화시켜야 하다보니 새 안드로이드 버전이 나오고 최소
3개월은 지나야 이를 적용한 스마트폰이 나옵니다. 문제는 구글이 안드로이드 버전업을
워낙 빨리 하고 있어서 이걸 따라잡는 게 쉽지만은 않으리라는 것이죠. 2.2 버전이
나왔는데 시장에서 2.1 버전을 사야 한다면 소비자들이 과연 ‘센스 UI니까’라면서
이해해 줄지, 전 잘 모르겠습니다.

 

기계적인 문제도 없지 않습니다. 500만 화소 카메라는 얼굴 인식 후 자동 초점도
지원해줘서 좋기는 한데, 셔터랙이 심하더군요. 아이폰의 300만 화소 카메라는 화질이
썩 좋은 것도 아니고 줌이 되거나 초점이 잘 맞는 것도 아니지만 ‘폰카’ 치고는 셔터랙이
거의 없는 축에 듭니다. 셔터를 누르면 그 순간 사진이 찍히죠. 스냅사진 용도로
사용되는 폰카에서 셔터를 누른 뒤 0.5초 뒤의 장면이 촬영되는 건 좀 문제가 있습니다.
배터리도 착탈식이라 갈아 끼우면 된다고는 하지만 썩 맘에 드는 성능은 아닙니다.
아이폰만큼은 버텨준다고 하는데, 안드로이드의 멀티태스킹이 양날의 칼인지라 CPU
파워도 더 많이 사용하고, 자연스레 배터리도 더 많이 씁니다. 그런데 충전회로 설계의
문제인지, 충전 속도는 아이폰보다 더딥니다.

 

센스UI를 칭찬만 했지만, 사실 좀 문제도 있습니다. 우선 한글화가 영 어설픕니다.
번역을 직역을 하다보니 단어 순서가 영어식으로 배열돼 한국어 문법과 맞지 않는
경우도 나오고, 그냥 영어로만 봐야 하는 메뉴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센스 UI가 자랑하는
통합주소록의 통합 프로그램은 트위터와 페이스북, 플리커 등입니다. 물론 미투데이나
네이트온, 싸이월드를 쓸 수 있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도둑놈 심보일수도 있겠죠.

 

하지만 전반적으로 보면 디자이어는 아주 좋은 스마트폰입니다. 게다가 저처럼
구글을 이용해서 일정과 주소록, 메일과 문서작업 등을 대부분 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이폰보다 훨씬 더 쓸만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멜론과 안드로이드폰은 아주 잘
연동되기 때문에 음악을 듣기도 좋죠. 하지만 아이튠즈의 노예가 된 애플의 노예들에겐
안드로이드폰은 그저 신포도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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