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오르는 노키아

노키아의 새 CEO 스테픈 일롭이 사내에 보낸 메모가 화제입니다. 인가젯에 전문이 올라와 있습니다. 메모라고는 했지만 길이도 꽤 긴데다 메모라기보다는 오히려 전장에 나서기 전의 출사표같은 느낌입니다. 이 메모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북해의 유전에 관한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유전에서 일하던 한 남자가 어느 날 밤에 큰 폭발 소리에 놀라 깨어납니다. 눈을 떠서 밖으로 나와보니 해상 유전 전체가 화염에 휩싸여 있었고 연기와 열기로 가득찬 유전 위에서 이 남자는 간신히 유전의 가장자리까지 몸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봤습니다. 보이는 건 오직 시커멓게 펼쳐진 북해의 바다 뿐이었습니다. 불길은 점점 다가오고 그에게 결심의 시간은 불과 몇 초밖에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불길이 자신의 몸을 집어삼키게 놓아둬야 할까요, 아니면 30미터 아래의 얼음장처럼 차가운 북해를 향해 몸을 던져야 할까요. 그는 그렇게 ‘불타오르는 플랫폼’에 서 있었고 선택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는 결국 몸을 던졌습니다. 평상시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선택입니다. 얼음장같은 바다로 뛰어들다니요. 하지만 이 시기는 결코 평상시가 아니었습니다. 유전이 불타고 있었으니까요. 결국 그 남자는 살아남아 구출됐습니다. 그리고 ‘불타오르는 플랫폼’이 자신에게 극적인 변화를 선택하도록 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노키아는 지금 ‘불타오르는 플랫폼’에 서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극적인 변화를 선택해야 할 시기입니다.

일롭의 노키아에 대한 분석도 흥미롭습니다. 그는 “애플은 제품만 좋다면 소비자들이 기꺼이 값비싼 휴대전화에도 지갑을 연다는 사실을 증명했다”고 말합니다. 노키아는 좋은 디자인과 괜찮은 품질을 무기로 ‘값싼 휴대전화’를 대량으로 팔아 세계 1위의 휴대전화 업체가 된 회사입니다. 이런 식의 분석은 전임 CEO들은 할 수 없는 얘기였을 겁니다. 자신들의 전략이 잘못됐다는 걸 스스로 인정하는 얘기니까요.

따라서 안드로이드에 대한 위기감은 더 심각합니다. 그는 “안드로이드는 중간 가격대를 휩쓸더니 이제는 100달러 이하의 시장까지 노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 시장에 대한 위협은 노키아의 주력 시장을 뒤흔드는 위협입니다. 이 가격대의 제품군은 세계 휴대전화 시장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데다 노키아는 전통적으로 이런 신흥시장에서 특히 강했으니까요. 노키아와 마찬가지로 높은 생산효율을 바탕으로 싸고 품질좋은 제품을 만들어 세계2위를 차지한 삼성전자조차 이런 신흥시장에선 노키아에게 맥을 못췄죠. 노키아는 경쟁사가 따라올 수 없는 낮은 가격의 제품을 만들어내는 엄청난 효율을 달성했으니까요. 하지만 시장은 변했고 노키아는 때를 놓쳤습니다.

이후는 내부 비판이 이어집니다. “하이엔드를 위한 제품이라던 ‘미고'(MeeGo) 스마트폰은 지금 속도라면 연말까지 겨우 제품 하나밖에는 내놓지 못할 겁니다”라거나 “미드레인지의 심비안 제품은 북미 시장같은 주력 시장에서 경쟁력이 전혀 없다는 게 입증됐습니다”, “저가 시장에서는 ‘우리가 파워포인트 프레젠테이션을 다듬는 시간’이면 중국의 OEM 업체들이 새 제품을 하나씩 만들어냅니다”라는 식이죠.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결론 부분은 좀 식상해서 의아합니다. 싸움은 휴대전화 제품 한대 한대가 아니라 에코시스템이라는 게 결론입니다. 개발자와 전자상거래, 위치기반 서비스 등을 모두 하나의 생태계로 묶어내야 경쟁자들에게 맞설 수 있다는 건데, 쩝, 그걸 누가 모르나요. 그래서 엘롭은 11일에 새 전략을 발표하겠다고 합니다. 도대체 어떤 전략이 나올지 기대됩니다.

시장에서는 이때 일롭이 구조조정안도 발표할 것으로 보는 모양입니다. 제 생각에는 전략보다는 구조조정에 이번 메모의 목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노키아의 경영진을 보면 이런 예상이 가능합니다. 우선 제리 드바드 최고마케팅책임자(CMO)의 존재입니다. 이 사람은 노키아 출신이 아닙니다. 2011년에 입사했죠. 명문 헬싱키대 출신이 드글거리는 노키아지만 드바드는 미국 클라크아틀란타대학에서 MBA를 했습니다. 이질적인 인물이지만 엘롭의 사람이라고 보면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그리고 니클라스 사반데르 마켓 사업부 부사장은 노키아에서 잔뼈가 굵은 마케팅과 영업 전문가입니다. 사반데르 부사장의 퇴임은 어쩔 수 없어 보이는 거죠. 메리 맥도웰 모바일폰 사업부 부사장과 카이 오이스타모 최고개발책임자(CDO)도 사임할 것이라는 추측이 나오고 있습니다. ‘에코시스템’을 만들려면 하드웨어 담당인 모바일폰 사업부와 소프트웨어 담당이 모바일솔루션사업부를 유기적으로 재편할 필요가 있을테니까요. “이 속도로는 연말까지 제품 하나 겨우 내놓을 것”이라고 지적받은 알베르토 토레스 미고 담당 부사장도 위태롭지 않을까 싶습니다.

무엇보다 일롭은 아직까지 자신이 강조하는 에코시스템 분야에서 보여준 성취가 없습니다. 운영효율화라거나 글로벌 비즈니스, 기업 인수합병 등의 실적은 여러 건 경력에서 보이지만 불타는 노키아에게 필요한 건 새로운 전략과 비전일텐데 과연 그가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요. 그가 핀란드의 국민기업을 환골탈태시키는 영웅이 될지, 아니면 세계 최고의 휴대전화 제조업체를 말아먹은 시끄러운 미국인 정도로 기억될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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