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학습하고 생각하는 컴퓨터, 왓슨.


2010년 스페이스 오디세이 中, HAL이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

“데이지, 데이지. 뭘 어찌 해야 할지 대답을 들려줘. 나는 반쯤 미쳐버렸어. 당신을 사랑하니까….”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1968년 만든 영화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인공지능 컴퓨터 할(HAL)은 주인공 데이브에게 애원합니다. 데이브가 할의 모듈(부품)을 하나씩 뽑으며 시스템을 중단시켜 나가자 “그만둬요, 데이브”라며 점점 자신이 처음 만들어지던 초기 상태로 퇴행해 일종의 ‘어린 시절 부르던 노래’를 부르게 된 거죠.

이 노래의 이름은 ‘데이지 벨’입니다. 1961년 미국 IBM이 만든 컴퓨터 ‘IBM 7094’가 음성과 반주를 합성해 실제로 불렀던 노래였죠. 이는 ‘컴퓨터가 부른 최초의 노래’로 기록돼 있습니다. 할의 기원이 IBM에 있다는 은유입니다. 뿐만 아니라 HAL이라는 이름 각 글자의 바로 다음에 오는 알파벳을 모으면 ‘IBM’이 됩니다. 1960년대의 IBM은 그렇게 ‘두려운 신기술’을 가진 첨단 기업이었습니다.


IBM 7094가 부르는 데이지 벨

하지만 이런 놀라운 컴퓨터를 만들어낸 IBM의 신화는 그동안 별로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1970년대 말 스티브 잡스가 개인용 컴퓨터인 ‘애플II’를 만들어 새로 생긴 시장을 휩쓸자 그때까지도 컴퓨터를 개인이 쓸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던 IBM은 뒤늦게 이 시장에 뛰어듭니다. 그 뒤에는 운영체제(OS) 소프트웨어라는 건 그냥 ‘아웃소싱’하면 되는 거라고 안이하게 생각하다가 결국 MS-DOS를 IBM에게 판매한 마이크로소프트의 젊은 빌 게이츠에게 뒤통수를 맞은 뒤 개인용 컴퓨터 시장에서 철수합니다.

그 뒤 IBM은 조용해집니다. 주력 사업은 개인용 컴퓨터 판매 대신 기업에 대한 IT 컨설팅과 메인프레임이라는 기업용 컴퓨터 판매로 바뀝니다. 자연스레 일반 소비자의 시선에서 사라지게 됐습니다. 하지만 지난해 IBM은 엉뚱한 곳에서 다시 주목을 받습니다. 그들이 모두가 잊고 있던 할을 현실 세계로 불러낸 덕분입니다. 스스로 학습하고 생각하고 문제의 답을 찾아내는 인공지능 컴퓨터가 IBM에 의해 마침내 탄생한 셈입니다. 단지 이름만 ‘왓슨’으로 바뀌었을 뿐 왓슨은 할과 그다지 다르지 않아 보였습니다.

지난해 미국 뉴욕주 IBM 왓슨연구소에서 이 기계를 직접 취재한 일이 있습니다. ‘기계’라고 부르려니 약간 미안하네요. 당시 연구원 가운데 누구도 왓슨을 얘기할 때 사물을 뜻하는 ‘그것(it)’이라 부르지 않았거든요. 왓슨은 이 연구소에서 사람처럼 이름으로 불리거나 아니면 ‘그(he)’라고 불렸습니다. 약간 섬찟했지만 이런 호칭을 이상하게 여긴 건 오직 저뿐이었죠.

당시 IBM은 왓슨을 ‘제퍼디’라는 유명 TV 퀴즈쇼에 출연시키기 위해 연습시합을 벌이던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왓슨은 드디어 14일(현지시간) 제퍼디쇼에 출연합니다. 상대는 제퍼디쇼에서 74회 우승한 역대 최다 우승자 켄 제닝스, 그리고 ‘왕중왕’전에서 제닝스를 꺾은 역대 최다 상금 수상자 브래드 러터였습니다. 첫 대결에서 왓슨은 러터와 함께 5000달러를 벌어 공동1위가 됐고 제닝스는 2000달러밖에 못 벌었습니다. 이 대결은 사흘 동안 이어질 예정입니다.

그저 흥밋거리로 치부하기에는 왓슨의 의미는 생각보다 큽니다. 예전 기사에도 썼지만 정답을 찾아내기 위해 기존의 컴퓨터는 인터넷의 지식을 이용합니다. 말하자면 이런 방식의 인공지능은 교과서를 펼쳐놓고 ‘오픈북’ 시험을 치는 것과 유사합니다. 예를 들어 대표적인 인터넷 인공지능에 해당하는 구글은 직접 정답을 찾아주지는 않지만 사람이 질문에 해당하는 검색어를 입력하면 가장 관련있다고 스스로 판단한 결과를 맨 위에 보여준다는 점에서 왓슨과 유사합니다. 하지만 구글은 인터넷을 검색하죠.

반면 왓슨은 독립된 개체입니다. 네트워크에 연결돼 있지 않은 채 새로 받아들이는 모든 정보를 학습하면서 지식을 키웁니다. 왓슨은 영화를 보고, 신문을 읽고, 스캐닝된 책을 탐독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받아들이는 정보를 쌓아두는 게 아니라 마치 사람이 지식을 구조화하듯 통계적 분류를 통해 지식을 재분류하고 관련 지식을 모읍니다. 질문에 빨리 답하기 위해, 즉 사람처럼 빠른 판단을 하기 위해서죠. 기계가 매년 빠른 속도로 소형화되면서 동시에 성능이 높아진다는 걸 감안하면 왓슨은 몇 년 뒤 우리 옆에 다가와 스스로 생각하고 말을 거는 존재가 될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왓슨을 보면서 영화 터미네이터에 등장하는 ‘스카이넷’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약간 잘못된 비유가 아닌가 싶습니다. 터미네이터 시리즈에 따르면 스카이넷은 쉽게 파괴되지 않는 네트워크형 컴퓨터입니다. 한 무더기의 데이터센터를 폭파시켜도 네트워크를 통해 다른 곳의 데이터센터에서 복원된다는 점에서 스카이넷은 오히려 거대한 클라우드 컴퓨터인 구글에 가깝죠. 반면 왓슨은 사람처럼 생각하고 존재하며 물리적인 이동도 가능한 개별적 존재입니다. 스카이넷이라기보다는 미래의 인류가 다시 프로그래밍해 어린 시절의 존 코너를 지키기 위해 과거로 돌려보낸 ‘터미네이터2’에 등장하는 아놀드 슈왈제네거에 더 가깝습니다.

그렇다고 기계가 지능을 갖고 사람과 대립하는 식의 미래까지 상상하는 건 아닙니다. 아직 우리의 기술은 제약이 많습니다. 설악산 대청봉 등반이 목표라고 친다면 이제 겨우 속초에 도착한 수준이라고 할 정도죠. 왓슨연구소에서 취재를 도와줬던 에릭 브라운 박사는 “왓슨이 사람의 두뇌를 흉내내 고안된 프로그램이라는 건 맞지만 사람과 비교하면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다”고 설명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은 수많은 정보를 의식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무의식에 저장해 둡니다. 그리고 무심코 흘려보냈던 정보를 필요한 순간에 놀랍게 끄집어내죠. 우리는 그 정보를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는 인간의 뇌에서는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왓슨은 이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왓슨은 받아들여야 할 정보를 철저히 의식적으로 선택한 뒤 한 번 선택된 정보는 100% 흡수합니다. 사람의 뇌는 끝을 모르는 용량으로 엄청난 지식을 무의식에 옮긴 뒤 이를 순간적으로 꺼내어 활용하지만 왓슨의 저장공간에는 명확한 물리적 한계가 있고 이를 제 때 꺼내어 쓰기 위해 엄청난 처리속도의 프로세서를 쓰면서도 수 초의 처리 시간이 필요해지는 것이죠. 다만 왓슨이 사람보다 나은 점도 있습니다. 사람의 기억은 수없이 왜곡되는 과정을 거칩니다. ‘아는 만큼 보이기’ 때문이죠. 또 번득이는 영감이 문제를 해결하는 주요 능력이긴 하지만 떠오르지 않는 영감을 며칠이고, 몇달이고 기다려 본 사람들은 차라리 왓슨처럼 기억의 저장장치를 하나하나 훑어보고 싶어질 지도 모릅니다. 왓슨은 건망증을 모르니까요.

참, 여담인데, 이 모든 왓슨 이벤트로 가장 큰 덕을 본 사람은 누구일까요? 왓슨을 개발한 완슨연구소의 데이빗 페루치 박사? 갑자기 제퍼디쇼에 다시 불려나온 켄 제닝스와 브래드 러터? IBM CEO인 새뮤얼 팔미사노? IBM 사람들은 왓슨 이벤트를 만들어낸 PR팀의 마이클 로런이 가장 덕을 본 게 아닐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원래 왓슨은 페루치 박사팀이 10년 정도 연구해 오던 인공지능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였거든요. 이걸 제퍼디쇼에 내보내자고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바로 로런이었다고 합니다. ‘스타’가 된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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