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실명제, 뜨거운 감자

한국에서 사용되는 ‘인터넷 실명제’라는 표현에는 몇 가지 오해가 있습니다. 첫째로 실명 사용을 강제하는 제도는 대한민국에 없다는 것이죠. 국내에서 실명제로 불리는 제도는 ‘제한적 본인확인제’라는 제도입니다. 단순화해서 얘기하자면 인터넷에 글을 쓰기 위해서는 글을 쓰는 사람이 본인임을 미리 게시판 운영자가 확인해야 한다는 제도입니다. 그런데 이게 참 묘합니다. ‘표현의 자유를 위한다’거나 ‘ID를 통한 사이버 정체성을 인정한다’는 취지에서 실명 사용은 막았지만 그게 누구인지를 게시판 운영자가 확인 가능하도록 만드는 건 위의 두 가지 취지에 별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두번째 오해는 실명 중심의 문화가 민주주의를 저해하고, 익명의 문화가 민주주의를 꽃피우리라는 막연한 환상입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민주주의가 발전했던 건 자신을 공개된 공간에 내놓은 사람들이 기꺼이 부당한 권력에 의한 투옥과 박해를 무릅썼을 때였습니다. 모두가 음지에 숨어 불평만 늘어놓는 건 무엇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 실명제는 뜨거운 감자입니다. 제한적 본인확인제를 인터넷 실명제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일종의 정파적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죠. 세상에는 기술 또는 웹에 대해 과도한 환상을 갖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수평적 네트워크라는 웹의 특징을 오해해서 웹이 세상을 수평하고 평등한 구조로 바꿔줄 것으로 착각합니다. 웹은 새로운 기술이고, 새로운 현상이기 때문에 우리의 문화에 여러 영향을 끼치고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생각을 하게 해 우리를 발전시켜 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웹 그 자체가 민주주의의 전도사 역할을 해주는 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파적으로 웹을 대해 과도한 환상과 기대를 갖는다면 그건 참 곤란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현재의 제한적 본인확인제를 옹호하는 건 아닙니다. 얼마전 에릭 슈미트 구글 CEO 인터뷰 때에도 비교적 많이 대화를 나눴던 주제가 바로 이 부분이었습니다. 인터넷의 익명성을 과연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 것일까요? 슈미트는 사실 이 문제에 대해 여러 차례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던 사람입니다. 지난해 슈미트는 ‘테코노미’ 콘퍼런스에서 “어떠한 익명성도 인터넷의 미래가 될 수 없다”며 “프라이버시와 익명성은 서로 다른 것”이라고 말했던 바 있습니다. 또 “만약 당신이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려 한다면 당연히 익명성 속에 숨고자 할 것”이라며 “따라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인터넷에서 익명성을 없애기 위해 인터넷 기업들이 고객을 위한 실명 서비스를 갖춰야 하고 정부도 기업에 이를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었죠. 당시 그의 말은 구글코리아가 ‘제한적 본인확인제’를 거부하고 한국에서 유튜브에 동영상을 올리거나 댓글을 다는 기능을 아예 없앤 사실, 그리고 이에 대해 구글코리아 홍보팀이 “구글은 개인의 표현의 자유를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입장을 밝힌 바와는 조금 모순된 것이었습니다. 과연 그의 이 얘기는 ‘실명제의 필요성’을 주장했던 것일까요?

슈미트는 이걸 사전 개입의 문제로 해석합니다. 정부의 역할은 ‘일이 터졌을 때’ 나서서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이란 얘기죠. 일종의 경찰 국가 논리와 맞닿아 있습니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획득한 자원을 개방해 더 심한 경쟁에 자신을 내놓는 구글 같은 극단적인 기업의 경쟁 철학에서는 정부의 지나친 간섭만큼 큰 제약도 없을 겁니다. 그래서 결이 좀 다릅니다. 표현의 자유는 중요하지만 이게 익명성에 대한 옹호는 아닌 것이죠. 그래서 직접적으로 물어봤습니다. 익명성의 부정적 결과에 대해 과거에 우려했던 적이 있지 않았냐고요. 그는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뭔가 잘못을 저지른다면 우리는 범죄자를 잡으면 된다. 그런데 그건 ‘사후’에 할 일이다. 한국에서 현재 하고 있는 본인확인제와 같은 제도는 정부가 “우리는 나중에 범죄자를 잡을 능력이 없다”라고 선언하고 있는 셈이다. 내가 한국 법을 만든 사람은 아니다. 그래서 한국에 그런 법이 왜 있는지는 모르겠다. 뭔가 한국에 그런 법이 있어야만 했던 다른 이유가 있나?”고 되묻더군요.

불행히도 한국에는 그런 법이 있어야만 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선거였죠. 온라인에서의 사전선거운동이나 불법선거운동은 오프라인에서의 선거운동과 비교해 어떤 평가를 받아야 하는 걸까요? 사실 미국에서도 이 문제는 뚜렷하게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크리스 휴즈(페이스북 공동창업자) 같은 젊은 브레인 덕분에 온라인을 점령했고 그 덕분에 승리했지만 이것을 두고 ‘인터넷의 승리’라거나 ‘인터넷 민주주의’라고 주장했던 사람들은 곧이어 나타난 티파티의 극우주의를 두고 꿀먹은 벙어리가 됩니다. 티파티 운동이 바로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통해 조직됐기 때문이죠. 결론적으로 인터넷은 민주주의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수단을 제공할 뿐이죠. 한국은 이런 수단의 변질을 우려해 정부가 제도를 만들었지만 기술은 늘 제도를 뛰어넘는 속도로 발전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본인확인제는 시대에 뒤쳐지게 됩니다.

미국에서 굳이 법을 만들지 않고도 오바마와 티파티 모두 어느 정도 선에서 사회 질서 및 통념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 활동을 벌일 수 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거기에 아마 실명제 논란에 대한 답이 있을 겁니다. 그건 많은 사람들이 ‘이름보다는 관계’라고 부르는 소셜네트워크의 새로운 특징에서 옵니다. 우리는 페이스북과 트위터에서 자발적으로 실명을 드러냅니다. 그것이 훨씬 편하고 상대에게 믿음을 주기 때문이죠. 익명에 숨은 ID를 믿고 대화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최근의 수많은 개인정보 유출이나 사이버 범죄 사고로 학습한 탓이기도 합니다. ‘소셜댓글’에 대한 세간의 사랑이 아마도 이런 측면의 장점 때문일 겁니다. 물론 저도 이 블로그에 소셜댓글을 사용하고 있죠.

하지만 아직 끝은 아닙니다. 소셜댓글은 생각처럼 안전하거나 ‘자발적인 실명 확인’과 같은 순기능만 담당하는 게 아닙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소셜댓글을 통해 또 다른 기업체(Disqus나 국내의 시지온 같은)에게 우리의 관계망을 통째로 넘겨줍니다. 이건 자발적인 실명 확인을 위해 프라이버시를 무방비로 외부에 내보내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디스커스나 시지온이 ‘소셜댓글’을 남용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그들이 변심한다거나 또는 소셜댓글을 겉으로 내걸고 사실은 프라이버시를 수집하는 게 목표인 회사가 나타난다면 어떨까요. 그때도 소셜댓글은 무조건적인 대안일까요?

그래서 인터넷 실명제는 무조건 나쁘다거나, 제한적 본인확인제는 구시대적인 규제라거나, 소셜댓글은 참 좋은 서비스라는 식의 접근 모두가 걱정됩니다. 이 문제는 결코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적어도 에릭 슈미트가 논쟁에 끼어들어도 진흙만 뒤집어쓴채 씁쓸히 논쟁에서 퇴장해야 할 만큼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싸이월드의 “제한적 본인확인제니 인터넷 실명제니 하는 제도의 문제와 관계없이 실명을 기반으로 한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근본적인 원칙은 바꾸지 않을 계획”이라는 식의 시류를 타지 않는 보수적이고 원칙적인 접근이 좀 더 신뢰가 갑니다. 깊은 고민이 필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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