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줄타기 광대, 팬택과 HTC

팬택을 볼 때면 외줄 위에 올라 탄 광대가 연상됩니다. 불행하게도 이 광대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곡예를 벌이는 게 아니라 끝없이 긴 줄 위에 올라 땅 위에서 달리고 있는 경쟁자들과 마라톤 경주를 하는 운명입니다. 게다가 두 발을 땅에 디딘 경쟁자와 달리기 시합을 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운데 잠깐만 한 눈 팔고 딴 짓을 하면 순간 기우뚱거리며 줄에서 떨어져야 합니다.
그게 이 회사의 운명입니다. 사실 한국에서 대기업이 벌이는 사업 영역에 들어가 함께 경쟁하겠다고 나선 모든 회사의 운명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처절합니다. 박병엽 팬택 부회장은 “절절한 ‘한’ 같은 게 있다”고 하더군요. 저는 기업 경영에 있어서 좋은 전략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경영에도 과학적 분석이 꼭 필요하다고 느끼며, 창의성마저도 좋은 시스템으로 관리된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그런 얘기보다는 포장마차에서 소주나 한 잔 기울이면서 어깨 두르고 의기투합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더 중요해 보일 때도 있습니다. 이성보다는 감성이 앞서는 순간입니다. 팬택은 바로 그런 감성을 불러 일으키는 회사입니다. 지금까지 그들이 겪어온 고난이 안타깝기 때문에 앞으로는 성공하기를 빌어주고 싶은 회사죠.

팬택은 아이폰처럼 소비자가 사랑하는 제품도 만들지 못하고, 삼성전자처럼 공들여 관리한 프리미엄 브랜드도 없습니다. LG전자처럼 어려울 때 뒤에서 도와줄 그룹 계열사도 없죠. 그래서 좋은 제품을 만들어 보겠다고 엔지니어도 잔뜩 뽑았고, 큰 돈도 못 벌면서 회계 장부상 비용으로 처리되는 연구개발비에 돈을 쏟아붓기도 해봤습니다. 쉽지 않은 길입니다. 그러다 2006년 위기가 닥치자 채권단을 쫓아다니며 워크아웃에 동의해 달라 읍소하는 신세가 됩니다. 잘 관리된 브랜드가 없으니 SK텔레콤이 대신 쌓아올렸던 ‘스카이’라는 브랜드를 2005년 인수했습니다. 하지만 SK텔레콤은 이 회사를 팔아놓고서 또 ‘W’라는 자체 휴대전화 브랜드를 만들어 팬택의 경쟁사가 됩니다. 그렇다고 불만도 얘기 못 합니다. SK텔레콤은 팬택의 주요 고객이니까요. (여러분들께서 지적해주셨듯, W는 그런 의미의 회사가 아닙니다. 제 실수입니다. W는 결과적으로 성공하지도 못했죠.)

그래서 팬택에는 ‘마사이상’과 ‘펭귄상’이란 게 있습니다.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올려 비를 내리게 하고 마는’ 마사이족처럼 끈기있게 될 때까지 물고 늘어지는 직원에게 마사이상을 주고, ‘먼저 죽을지 몰라도 천적(바다표범 등)이 기다리는 물 속으로 먼저 뛰어들어 다른 펭귄 무리가 뛰어들도록 유도하는’ 용감한 펭귄처럼 앞서 도전하는 직원에게 펭귄상을 준다는 겁니다. 끝내주는 디자이너가 있는 것도 아니고, 끝내주는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니 결국 ‘될 때까지 열심히’ 하고, ‘목숨 걸고 먼저’ 해보는 것이 이 회사의 전략 아닌 전략입니다. “대기업이 하면 우리도 한다. 틈새를 보는 능력을 키우고, 의미있는 점유율을 뺏기지 않고 유지한다”는 식이죠. 수세적이고, 임기응변적인 방법입니다. 하지만 쉽게 돌을 던지기도 힘듭니다.

그래서 HTC 생각이 났습니다. 이 회사는 스마트폰에 올인해서 성공을 거둡니다. 자신들이 시대를 읽고 미래를 준비하는 회사라는 인식을 줘서 브랜드 가치도 높였고, 시장을 미리 읽고 과감하게 베팅해 전략적인 위치 선정을 잘 해냅니다. 박 부회장에게 HTC에 대해 질문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는 HTC에 대해 “존경스러운 회사”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단서가 있었습니다. “1000만 대 생산이란 벽을 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었죠. 그는 “5년 전 팬택도 HTC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팬택도 그 정도 수준까지 규모를 키워나갈 땐 별 문제가 보이지 않았다는 얘기였죠. 물건도 잘 팔리고 공급망 관리도 잘 됐고 재고도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한국 시장에서도 승승장구, 미국 시장에서도 승승장구했습니다. 하지만 그 규모가 넘어가자 당장 관리가 어려워졌습니다. 변화에 임기응변식으로 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 시스템이 비대해지면서 둔탁하게 움직였던 것이죠. 여기에 약간의 위기가 오자 모든 게 변했습니다. 팬택의 시장은 내수와 미국으로 양분돼 있었는데, 미국에서 자체 브랜드 상품을 강조하면서 거래선에 변화가 생기고, 휴대전화 시장 성숙으로 시장도 포화되면서 출혈경쟁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절반의 시장이 흔들리자 회사가 흔들렸던 겁니다.

HTC도 존경스러운 회사지만 사실 값싸고 기능 많은 팬택의 5년 전 풀컬러폰과 HTC가 만들어내는 값싸고 기능 많은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은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습니다. 또 HTC의 제품 판매도 미국 시장에 올인해 있고, 미국을 제외하면 대만 정도가 의미있는 판매의 전부입니다. 연간 1000만 대 이상 생산해 본 경험도 올해가 처음일 겁니다. 시장이 편향돼 있으면 외부 충격에 취약한데 마침 올해는 스마트폰 시장에 화웨이나 ZTE같은 중국 업체들이 본격적으로 뛰어들어 저가 경쟁을 벌이는 원년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박 부회장은 “우리의 5년 전 모습 같아서 그들이 성공하면 그 노하우를 꼭 배울 것이고, 그들이 실패하면 교훈을 얻거나 혹 우리가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돕겠다”고 말하더군요. 전에 피터 초우 HTC CEO를 인터뷰했던 적이 있는데 박 부회장과 하는 얘기도 비슷했습니다. HTC의 성공 비결은 뭐냐고 묻자 그는 “통신사의 요구에 잘 응하고, 좋은 파트너십을 갖는다. 시장 환경에 맞는 제품을 발 빠르게 개발한다”고 했습니다. 비슷하죠. HTC에겐 다른 장점도 하나 있다고 했습니다. 미국 MBA 출신의 최고경영진이 실리콘 밸리의 실세들과 긴밀한 네트워크를 갖고 있다는 점이죠. 실제로 안드로이드 개발을 총괄하는 구글의 앤디 루빈 부사장이 초우 사장과 친구 사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넥서스S’는 HTC가 아닌 삼성이 만들었습니다. 시장이란 건 그런 것이죠.

제조업은 인터넷 벤처와는 다릅니다. 공장을 돌려야 하고, 재고를 관리해야 하며, 영업과 유통망 관리에 사람을 보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을 고용해야만 하는 사업이고, 그들에게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것 자체가 최선의 과제입니다. 실패하면 어떻게 될까요. 박 부회장은 “실패할 여력이 없다”고 말합니다. 또 실패하면 5년 전 한 번 심각하게 고민했다는 말처럼 정말로 한강에 뛰어들지도 모를 일입니다. HTC는 어떨까요. 삼성전자와 LG전자, 소니에릭슨 같은 회사는 허당이 아닙니다. 1년 정도는 방황할 수 있어도 금세 치고 올라올 능력이 있죠. 갤럭시 시리즈로 이미 새 흐름을 탄 삼성전자는 물론 옵티머스 시리즈가 조금씩 개선되는 LG전자라거나, 엑스페리아 시리즈로 좋은 평가를 받는 소니에릭슨은 HTC보다 ‘브랜드 프리미엄’이 있습니다. HTC의 선택은 가격 아니면 더 좋은 브랜드입니다. 가격 경쟁력으로 승부하려면 중국 업체와 경쟁해야 하고, 브랜드로 경쟁하려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투자가 필요합니다. 어려운 환경이지만 이런 기업들이 새로운 강자가 될 수 있다는 걸 증명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더 많은 기업들을 등장시켜 더 큰 경쟁과 더 좋은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는 토양이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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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12.7.30.
결국 HTC는 덫에 빠졌습니다. 삼성전자가 애플과 함께 프리미엄 시장을 독식해 버렸고, 브랜드가 있는 강자였던 노키아, 모토로라, 소니에릭슨, LG전자 등등이 저가 공세에 나섰습니다. ZTE나 화웨이는 100달러 대 스마트폰을 만들고 있습니다. 망할지 모른다는 위기감으로 남은 자원을 덤핑하듯 쏟아붓는 대기업들의 물량 공세 속에서 HTC는 어디로 가야 할 지 갈피를 못 잡은 느낌입니다. 페이스북폰을 만든다는 소문이 돌자 페이스북이 소문을 부인하고, 구글과 새 태블릿을 만들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에이수스가 구글을 잡았습니다. 소니에릭슨을 시작으로 LG전자와 모토로라, 막판에는 노키아까지 스마트폰 시장에서 손을 뗀 다음에야 HTC에게 살 길이 열릴 수 있으려나요. 망한 뒤 3년은 가보려고 버티는 부자집들 탓에 고생이 심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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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d 2014.7.16.

한 번 쓴 글에 이렇게 몇 년에 걸쳐서 업데이트를 하는 것도 드문 일이 됐네요. 팬택이 이번에는 회생하지 못하고 결국 어려움에 빠질 것 같습니다. HTC도 이제 완전히 존재감이 사라졌죠. 지금 팬택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새로운 휴대기기 시장이, 그것도 팬택이 빠르게 뛰어들어갈 수 있는 시장이 열려서 숨통을 틔워주는 길 외에는 없어 보입니다. 웨어러블 디바이스가 무진장 팔리기 시작한다면 가능하려나요. 통신사도, 채권단도, 정부도 그저 팬택의 마지막 앞에서 뒷짐만 지고 있습니다. 그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하드웨어 시장이라는 게 이렇게 한 번 큰 유행의 물결이 지나가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 황량한 폐허 같은 곳이군요. 마치 부동산 버블이 꺼진 주택시장 비슷한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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