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롬북, 포르셰와 마티즈 사이의 어정쩡함.


지난달 중순부터 주말마다 삼성전자가 만든 구글 ‘크롬북’을 들고 다니고 있습니다. 5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구글 I/O’라는 행사에서 구글이 참가자들에게 한 대 씩 나눠줬던 그 제품인데, 미국에선 7월에 배송했지만 동생이 들고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느라 지난달에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써보며 느낀 점을 신문에도 썼습니다. 지금 이곳에 쓰는 내용은 못 썼던 더 자세한 내용을 보충해 쓰는 사용기입니다. 구글이 자랑했던 크롬북의 혁신적인 기능이란 이런 겁니다. 첫째, 8초 이내에 부팅됩니다. 윈도 운영체제(OS)를 쓰는 일반 노트북은 부팅에 1분도 넘게 걸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크롬북은 부팅은 정말 빠릅니다. 그냥 뚜껑을 닫아놓은 채 대기모드로 뒀다가 뚜껑만 열어 컴퓨터를 깨우는 속도는 1초 정도면 충분합니다. 이 정도면 태블릿PC 수준에 근접한 인스턴트 온-오프입니다. 둘째, 모든 데이터를 구글의 클라우드에 저장합니다. 일반 노트북과 달리 크롬북은 구글의 온라인 저장공간에 작업 내용을 업로드해 놓습니다. 따라서 남의 크롬북을 써도 자신의 구글 계정만 있으면 마치 내 컴퓨터를 그대로 쓰는 것처럼 일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이론적으로는 한 대의 크롬북을 가족들과 번갈아 ‘개인적으로’ 쓸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마치 자기만의 컴퓨터처럼 공용 컴퓨터를 쓸 수 있는 것이죠. 아마도 대형 컴퓨터의 터미널을 쓰셨던 분들은 그런 느낌을 받으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셋째, 크롬북은 점점 성능이 떨어지는 다른 노트북과는 달리 쓰면 쓸수록 성능이 향상됩니다. 구글이 크롬북의 OS인 크롬OS를 계속 업그레이드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3주 동안 체감한(재시동이 필요한) 업데이트만 세 차례 진행됐습니다. 크롬OS 자체가 백그라운드에서 일상적인 업데이트를 진행한다는 걸 감안하면 조금씩 개선되는 거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치 G메일의 저장 용량이 조금씩이나마 꾸준히 증가하는 것처럼 말이죠.

게다가 크롬북은 하드웨어가 매우 뛰어납니다. 외관은 간결하고 고급스러웠으며 키보드는 타자를 칠 때마다 좋은 느낌으로 튀어나옵니다. 화면은 밝고 선명합니다. 배터리도 8시간 이상 갑니다. 외부에 나갈 때 충전 케이블을 들고 다닐 필요가 없었습니다. 1.66GHz(기가헤르츠) 속도의 듀얼코어 프로세서와 2GB(기가바이트) 메모리는 제가 2년 전 쓰던 업무용 노트북 수준이었습니다. 20만~30만 원 정도의 싸구려 ‘넷북’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였죠. 다만 한 가지 흠이 있는데, 터치패드입니다. 표면이 플라스틱이라 터치패드 위를 미끄러지는 손가락의 느낌이 아주 엉망입니다. 감도도 썩 좋지 않아서 클릭 말고 ‘탭’을 할 경우엔 간혹 커서가 이동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멀티터치 제스쳐도 매우 부족합니다. 게다가 디폴트 설정이 클릭 외에는 없어서 전통적인 터치패드 버튼에 익숙한 동료들이 보고는 “클릭은 어떻게 하느냐?”고 묻더군요. 디폴트 설정을 탭도 허용으로 해놨다면 없었을 문제인데 말입니다. 조도센서도 약간 불만족스럽습니다. 주위 밝기에 따라 노트북 화면밝기를 조절해주기 위한 것인데, 반응 속도가 턱없이 느립니다. 게다가 밝기 단계도 너무 눈에 띄게 구분되기 때문에 부자연스러워 신경을 빼앗기게 됩니다. 손으로 수동 조절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죠.

그런데 이 훌륭한 하드웨어로 크롬북이 하는 일은 단 하나입니다. 웹브라우저 열기. 크롬북에는 다른 기능이 없습니다. 일반 노트북에서 크롬 웹브라우저를 설치한 뒤 할 수 있는 일이 바로 크롬북으로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입니다. 애초에 그러자고 만든 노트북이기도 했죠.

여기서 황당한 건 이런 웹브라우징 능력입니다. 조금만 복잡한 플래시 프로그램(페이스북용 게임 등)을 돌리면 곧바로 컴퓨터가 헤매기 시작합니다. 프로세서와 메모리의 성능을 봐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입니다. 게다가 저는 일반적으로 웹브라우저 창을 10개 정도 띄워놓고 일을 합니다. 참고할 내용, 앞으로 읽어야 할 내용 등을 늘상 열어두는 버릇이 있는데, 유튜브도 플래시 게임도 아닌 단순한 웹브라우저창 멀티태스킹 만으로도 덥지 않은 공간에서 냉각팬이 돌아갑니다. 확실히 문제입니다. 게다가 주말에는 대개 긴 글을 다듬는 작업을 합니다. 저는 이 일을 크롬북에서 할 생각이었는데, 약 100페이지 정도가 넘어가는 문서를 복사하고 편집하려니 ‘붙여넣기’ 버튼을 누른 뒤 30초씩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무거운 작업을 하기 위한 컴퓨터가 아니라는 걸 여실히 증명하는 셈입니다. 최고 수준의 키보드가 아까워지는 순간입니다. 물론 모든 걸 구글 서비스 내에서 해결하면 문제는 그나마 최소화됩니다. 이미지 편집을 피크닉(구글의 클라우드 이미지 편집 프로그램)으로 하고, 문서작성은 구글 문서도구에서만 하며, 게임도 크롬OS용 앵그리버드만 하는 식이죠.

평소에 맥으로 하는 작업들을 크롬에서 하기란 썩 쉽진 않았습니다. 몇 가지 덜 다듬어진 것들이 있어 보입니다. 대표적인 게 스크린 캡쳐 기능입니다. 굳이 맥이 아니더라도 PC에서도 버튼 하나로 가볍게 이뤄지는 일이 크롬북에서는 별도의 확장프로그램을 설치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다양한 프로그램을 열기 쉽지 않다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MS오피스에서 작성된 파일은 구글 문서도구가 잘 열어주기를 기원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현란한 효과나 최신 기능이라도 사용된 문서라면 크롬북으로 열어보기란 쉽지 않습니다. 동영상 재생도 괴롭습니다. avi나 wmv 같은 포맷은 크롬북에서 열 길이 없습니다. 게다가 아직 역사가 짧다보니 개발자들도 썩 많지 않습니다. 맥용 아래아한글뷰어도 있는 세상에서 크롬북에서는 hwp를 쓸 길이 없습니다. 네이버에 접속해 네이버 메일의 hwp 첨부파일 보기 기능을 쓰는 편법이 있기 하겠지만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은행이나 공공기관 웹사이트에 접속하기 힘들다거나, 윈도PC 중심으로 제작된 회사 전산시스템 접속이 어려운 것 등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그러다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크롬북의 가장 큰 장점이 인터넷에 빠르게 접속할 수 있는 것 뿐이라면 왜 크롬북을 써야 하는 거지? 그냥 아이패드나 갤럭시탭을 쓰면 더 빠르게 웹브라우징과 이메일 확인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 답은 태블릿이 쫓아올 수 없는 컴퓨팅 파워와 멋진 키보드, 넓은 화면 사이의 어딘가에 존재할 겁니다. 음, 그건 맥북에어였던가요?

그러니까 비유하자면 구글은 지금 크롬북 프로젝트를 위해 포르셰(삼성전자 하드웨어)를 사다가 마티즈용 타이어(크롬OS)를 끼운 뒤 시내주행(웹브라우징)만 시키고 있는 셈입니다. 한 가지 다행인 건 타이어가 계속 업그레이드되고 있고, 시내 도로 환경도 운전자 친화적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불행한 점이 있다면, 그 변화의 속도가 매우 느리다는 현실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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