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역사 박물관

출장 마지막날 사소한 문제가 생긴 덕분에 반나절 스케줄이 붕 떠서 평소 가보고 싶었던 컴퓨터 역사 박물관(Computer History Museum)에 갈 기회가 생겼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평범한 박물관일거라 생각했고, 입구에서 얘기를 듣기로는 전시는 달랑 한 층에서만 한다기에 입장료가 아깝지 않을까 싶기도 했는데, 막상 안에 들어가서 보니 너무 잘 만들어놓아서 구석구석 열심히 꼼꼼하게 보게 되더군요. 박물관을 만든다는 게 어떤 건지 평소에 잘 모르는 분야(역사 유물이라거나, 난해한 현대 미술이라거나)를 볼 땐 몰랐는데 관심이 있는 분야 박물관을 보니 큐레이터의 능력이 어떤 건지 여실히 느꼈습니다. 큐레이터란, 그러니까 전시물과 공간을 이용해서 이야기를 풀어내는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러인 셈입니다.

전시는 연대기적 구성을 기본으로 이뤄집니다. 처음 들어가서 만나는 건 주판과 자를 이용한 계산기 등 실수하기 쉬운 사람의 두뇌를 보조해주는 도구들이었죠. 그렇게 몇 걸음 더 지나가면 드디어 첫 컴퓨터라고 할만한 제품이 나옵니다. 바로 천공 도구죠. 저도 실제로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저렇게 커다란 카드에 구멍을 뚫는데, 어느 자리에 구멍이 뚫려 있는지를 기계가 읽고 해독한 뒤 결과를 내놓습니다. 한 번 구멍이 뚫린 카드는 일종의 프로그래밍 언어 역할을 하는데, 이것도 사람이 하는 일인지라 때로는 잘못 구멍을 뚫기도 하죠. 그러면 버그(프로그램 오류)를 잡는 디버깅 작업을 해야 합니다. 오늘날의 컴퓨터에선 그냥 고쳐쓰면 되는 별 게 아닌 일이지만, 이 당시에는 카드를 들어내 새 카드에 구멍을 다시 뚫은 뒤 카드를 교체하는 물리적인 작업도 장난이 아니었다네요.

그러다 생긴 혁신적인 발명품이 바로 진공관입니다. 이 또한 이렇게 큰 줄은 몰랐습니다. 초기 컴퓨터 가운데 하나로 유명했던 에니악이 건물 크기로 컸던 이유도 이 진공관의 크기를 줄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는데 다른 건 둘째치고 사진과 실물을 눈으로 보고 있자니 툭하면 파열되고 끊어졌을 진공관을 컴퓨터를 운영할 만한 수준으로 유지보수하려면 하루종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체용 진공관을 들고 에니악 틈새를 뛰어다녔을까 싶습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비효율을 없애고, 오늘날의 컴퓨터 시대를 연 게 바로 이 뒤에 발명된 실리콘(silicon)이죠. 진공관을 아주 작은 반전도물질로 대체해 반도체를 만들고, 에니악을 손톱사이즈로 축소시키는 마술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이게 겨우 50년 전 일이란 게 놀라울 따름입니다.

실리콘의 엄청난 가능성이 컴퓨터 혁명까지 이어지는 데에는 몇 가지 중요한 분기점에 해당하는 제품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DEC의 이 컴퓨터 PDP-8입니다.(역시 실물로는 처음 봤습니다.) 한 때 건물 크기였던 컴퓨터가 PDP-8에 와서는 책상(비록 많이 크고 튼튼한 책상이어야 했지만) 위에 올라가는 데스크톱 크기로 줄어든 것이죠. DEC가 이 컴퓨터를 처음 만들었던 1965년만 해도 세상에는 PC(개인용 컴퓨터)라는 말은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PDP-8은 대신 ‘마이크로 컴퓨터’라고 불렸습니다. 사전적 의미로 보면 ‘백만분의 일 크기의 컴퓨터’라는 뜻이었죠. 이 큰 기계가 당시 사람들에게는 백만분의 일 정도로 작게 보였던 겁니다.

이제 우리가 아는 시대로 접어들게 됩니다. 개인용 컴퓨터의 시대죠. 사진은 애플이 처음 만든 애플I 입니다.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의 합작 회사였고, 집에서 조립할 수 있는 나무상자와 회로기판을 판매하는 조악한 형태였습니다. 그래도 이걸 만들어냈다는 게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이었는지, 워즈니악은 나무상자 위에 멋들어지게 자신의 이름을 서명해 남깁니다. ‘Woz’라는 글씨가 선명하죠. 이렇게 케이스에 서명하는 게 스티브 잡스의 눈에도 멋지게 보였는지, 잡스 또한 애플II와 리사, 매킨토시를 만들 때 번번히 케이스 안쪽에 개발팀 사람들과 함께 서명을 직접 해넣었다고 합니다.

그게 바로 이 컴퓨터입니다. 본인들은 알았는지, 몰랐는지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이 제품은 에니악이나 PDP-8보다 훨씬 위대한 제품이 됐습니다. 말 그대로 ‘세상을 바꾼 컴퓨터’였죠. 바로 애플II입니다. 지금 봐도 매끈한 플라스틱 케이스(당시에는 이렇게 케이스에 신경을 쓰는 컴퓨터라는 건 없었습니다. 다 엔지니어들의 취미를 위한 조립용 키트였지, 소비자용 제품은 아니었거든요.)와 한 눈에 들어오는 검정색 키보드가 인상적입니다. 만져보지 말라고 써있지만 도저히 자판을 두드려보지 않을 수 없어서 키도 몇 개 두드려봤는데, 저같은 사람이 많았는지 이미 키 몇 개는 탄성을 잃어서 쉽게 되돌아오지 않더군요.

모두가 알고 있듯, 스티브 잡스는 애플에서 1985년 쫓겨나고 맙니다. 그 뒤의 애플은 침체와 악화 일로라고 쉽게 생각하게 마련이지만, 그렇게 한숨에 망가지지도 않았고, 애플이 만든 게 다 엉망이지도 않았습니다. 스티브 잡스의 DNA라거나, 애플의 문화, 여기까지 쌓아올린 기업의 시스템은 강력한 요새나 성과 비슷합니다. 시대 변화에 문을 닫아걸고 있다보면 어느 한 순간 낡은 무덤으로 전락할 수는 있지만(HP나 모토로라처럼) 그렇다고 몇 년 못 버티리라 생각하면 오산이죠.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1991년 나왔던 이 파워북입니다. 엄청나게 비싸고, 시장의 ‘최초’ 제품도 아니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디자인과 강력한 파워는 노트북을 꼭 써야만 하는 이동이 잦은 비즈니스맨, 또는 컴퓨터 관련 산업 종사자들에게는 ‘머스트 아이템’으로 각광받게 됩니다. 스티브 잡스가 스스로 사임한 지금의 애플도 앞날이 불투명하기는 하지만 절대로 쉽게는 망하지 않을 겁니다. 과거에 훨씬 더 갈팡질팡하던 시점의 애플도 이 정도는 했으니까요.

이건 어디서 많이 보던 것 같지 않으세요? 아마존 킨들? 아이패드? 2010년대의 제품이 아닙니다. 2000년대도, 심지어 1990년대의 제품도 아닙니다. 1972년 제록스의 팔로알토 연구소(PARC)에서 일하던 앨런 케이가 종이에 쓱쓱 그렸던 ‘미래의 컴퓨터’입니다. 케이의 아이디어는 실제 제품으로는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이렇게 마분지로 실물 형태를 제작해본 적은 있었죠. 크기는 아이패드와 비슷하고, 생김새는 킨들을 닮았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날의 태블릿의 원형은 결국 여기까지 올라오는 겁니다.

에니악에서 PDP-8을 지나 애플컴퓨터, 다이나북의 시대까지. 그러면 우리가 사랑했던 PC의 시대는 끝난 걸까요? 그럴지도 모르죠. 모두가 PC 이후의 시대(Post-PC Era)를 말하니까요. 하지만 PC를 색다르게 보고 접근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병적으로 보일 정도까지 집착했던 케이스는 “쓸모없다”며 벗겨버리고, 마더보드와 주요 회로들만 남긴 채 고급 컴퓨터인 서버를 넣는 랙(진열대)에 PC를 넣은 뒤 이를 서로 연결시켜 값비싼 서버 못잖은 성능을 내는 컴퓨터가 그겁니다. 실용주의의 극한이고, 애플의 시대와는 전혀 다른 시대를 보여주는 사람들의 하드웨어였죠. 사진에 있는 저 컴퓨터는 바로 구글이 만든 초기 구글 데이터센터를 구성하던 구글 서버입니다. 값비싼 제품은 하나도 없고, 쉽게 헐값에 사들일 수 있는 PC 부품을 사다가 슈퍼컴퓨터를 만들어냈습니다. 구글은 그저 인터넷 검색 알고리듬 하나로 성공한 회사가 아닙니다. 우리의 눈에는 단순하기 그지 없는 검색창 하나 보일 뿐이지만 그 뒤에서는 정말 상상도 못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죠.

컴퓨터 역사 박물관에는 이외에도 정말 수많은 재미있는 내용들이 가득합니다. 나중에 아들이 초등학생이 되고, 이런 데 관심을 갖게 된다면 한 번 데리고 가고 싶을 정도로요. 우리도 통신 인프라 같은 건 꽤 수준이 있는 나라인데, ‘브로드밴드 박물관’ 같은 거라도 통신사들이 함께 만들면 어떨까 싶기도 합니다.

p.s. 라이코스 임정욱 대표님 댓글을 보다 번쩍 생각이 들어서 혹시 재미있게 봤던 영상들이 웹에 없으려나 찾아보니, 역시 CHM 홈페이지에 다 있군요. 한 번 트윗으로도 소개했던 건데, 개인적으로 인상깊게 봤던 영상입니다. 링크 붙입니다. 제목은 “프로그래밍의 예술, 스타일에 대하여”, X윈도와 초기 넷스케이프 내비게이터 등에 관여했던 프로그래머의 인터뷰죠.(CHM에 인터뷰해주는 사람들은 빌 게이츠부터 시작해서 팀 버너스리 등 정말 쟁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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