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f(“bye, world”);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누군가 우리 신문사에서 부고 기사를 써야 한다면 그 일은 꼭 제가 하고 싶었습니다. 많은 신문사가 그렇게 하듯 저도 늘 부고를 써놔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마감시간 10분 전에도 사망 소식이 들릴 수 있는 주요 인물이었고, 저는 준비를 해놔야만 했으니까요. 불행히도 그 날이 왔습니다. 하지만 저는 부고 기사를 써두지 못했습니다. 도저히 쓸 수가 없었습니다. 몇 차례 키보드를 두들겨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계속 멈추게 됐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곧 죽을테지만, 어디선가 그가 죽지 않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바램이 있던 모양입니다. 아래는 그래서 결국 오늘에 와서야 쓰게 됐던 부고입니다. 지면에는 공간이 부족해 일부가 삭제됐습니다. 모든 원고를 그대로 옮깁니다.

자신이 세운 회사, 애플컴퓨터에서 1985년 쫓겨났던 스티브 잡스는 12년 만인 1997년 다시 애플에 복귀했다. 그리고 새 광고 캠페인을 시작했다. 캠페인의 제목은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 앨버트 아인슈타인과 밥 딜런, 마틴 루터 킹과 존 레논, 토마스 에디슨과 무하마드 알리, 마하트마 간디와 파블로 피카소 등의 얼굴이 차례로 등장하면서 내레이션이 흐른다.

“여기 정신 나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회 부적응자에 불평꾼, 문제아들입니다.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보는 사람들이죠. 사람들이 그들을 미쳤다고 할 때 우리는 그들의 모습에서 천재를 봅니다. 정신 나간 사람만이 스스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게 마련이고,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실제로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잡스의 삶이 그랬다. 모두 그를 미쳤다고 했고 문제아로 여겼다. 하지만 잡스와 애플은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봤다. 사람들이 잡스와 애플을 미쳤다고 할 때 그들은 천재적인 제품을 만들어 세상을 바꿨다. 스티브 잡스의 56년 인생, 세상이 달라졌다.

●애플의 시작

잡스는 1955년 미혼모에게서 태어나 곧바로 양부모에게 입양됐다. 하지만 불행하지 않았다. 누군가 잡스에게 폴과 클라라 잡스 부부를 언급하면서 ‘양부모’라는 표현할 때면 잡스는 바로 ‘부모’라고 단어를 바로잡곤 했다. 좋은 가정이었다. 그리고 좋은 환경이었다. 그곳이 실리콘밸리였기 때문이다.

잡스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미 항공우주국(NASA)의 에임즈 연구소가 있었다. 잡스는 어린 시절 그곳에서 비슷한 나이의 소년들이 보지 못했던 컴퓨터를 접했다. 오레곤주의 리드 대학에 다니다 1학기만에 중퇴한 뒤에는 인도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한때 환각제도 복용했고, 불교에도 빠져들었다. “애플은 기술과 인문학의 교차로 위에 서 있다”는 잡스의 얘기는 이런 경험들을 통해 쌓인 것이었다. 실리콘밸리로 돌아온 뒤에는 컴퓨터에 관심 있던 엔지니어들과 모임을 이어간다. 잡스보다 다섯 살 많은 스티브 워즈니악도 실리콘밸리에서 사귄 친구였다. 워즈니악은 애플컴퓨터의 첫 히트작 ‘애플II’를 만든 사람이다.

1976년, 잡스는 워즈니악의 신혼집 부엌과 자신의 집 차고를 사무실 삼아 애플컴퓨터를 창업한다. 자본금은 주머니를 탈탈 털어 만든 단 돈 1000달러. 당시 애플컴퓨터는 컴퓨터를 조립하는 구멍가게 수준의 회사였다. 잡스에겐 대학 졸업장도 없었고 좋은 직장도 없었다. 그저 실리콘밸리의 친구들과 잡다한 경험만이 재산의 전부였다.

하지만 잡스에겐 확신이 있었다. 워즈니악이 만드는 컴퓨터가 곧 집집마다 한 대씩 냉장고와 세탁기처럼 팔릴 것이고, 그 때가 되면 세상이 변할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누구도 잡스의 생각에 동조하지 않았다. 아니, 미쳤다고 했다. 당시 기준으로 컴퓨터란 연구소와 기업에서 진지한 업무를 위해 쓰던 값비싼 물건이지 집에 들여놓을만한 물건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1977년 잡스와 워즈니악이 만든 ‘애플II’는 날개 돋친 듯 팔리며 개인용 컴퓨터(PC) 시대를 열었다.

그의 사업 방식은 막무가내에 가까웠다. 일반 소비자를 위한 제품인 애플II는 디자인이 중요했다. 그래서 잡스는 실리콘밸리의 산업 디자이너 게리 매녹을 찾아가 케이스 디자인을 맡겼다. 매녹이 요구한 보수는 1500달러였다. 잡스는 “디자인이 끝나면 돈을 주겠다”고 했다. 애플II를 팔아서 그 돈으로 보수를 내겠다는 뜻이었다. 매녹은 당시를 떠올리며 “누더기같은 옷을 걸친 젊은이 둘이 디자인을 맡기는데 도저히 돈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잡스의 집요한 설득이 먹혔다. 1983년 펩시의 최고경영자(CEO) 존 스컬리를 애플로 영입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잡스가 스컬리에게 던졌던 “그곳에서 설탕물이나 팔고 있겠느냐 아니면 나와 함께 세상을 바꾸겠느냐”는 질문은 유명하다.

●실패의 연속

이후 1984년 잡스가 만든 매킨토시는 실패의 시작이었다. 잡스와 애플의 직원들이 제록스의 팔로알토리서치센터(PARC)가 개발한 마우스와 그래픽유저인터페이스(GUI)를 PC에 적용한 건 혁신적이었다. 이전까지의 컴퓨터는 모두 키보드로 화면에 명령어를 입력하는 방식으로 작동했지만 매킨토시와 매킨토시 직전의 PC였던 리사는 그림을 마우스로 클릭하면 작동했다. 미래의 컴퓨터였다. 문제는 이 기술을 쓴 매킨토시의 값이 너무 비싸다는 것이었다. 매킨토시는 오늘날 컴퓨터의 모습을 처음으로 제시했지만 시대를 너무 앞섰다. 소비자는 값비싼 매킨토시를 외면했고 잡스는 애플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그의 방식은 확실히 옳았다. 당시 애플의 매킨토시 컴퓨터용 소프트웨어를 만들어 팔던 작은 소프트웨어 업체 가운데 하나가 바로 마이크로소프트(MS)였다. MS의 빌 게이츠는 이 과정에서 배운 매킨토시 소프트웨어 기술을 이용해 이후 ‘윈도’ 운영체제(OS)를 만들어낸다.

애플에서 쫓겨난 잡스는 애플에 복수하기 위해 넥스트(NeXT)라는 컴퓨터 회사를 만들었다. 멋진 디자인에 뛰어난 성능, 앞서가는 소프트웨어를 사용한 완벽한 컴퓨터를 만드는 게 목표였다. 이번에도 잡스는 시장을 못 읽었다. 넥스트는 매킨토시보다도 더 비쌌지만 목표로 하는 소비자는 대학생이었다. 팔릴 리가 없었다. 다만 넥스트도 몇 가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연구원이던 팀 버너스리는 당시 넥스트 컴퓨터를 이용해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인터넷(월드와이드웹)의 기본 골격을 만들었고, 넥스트에서 만든 소프트웨어는 오늘날 애플의 컴퓨터가 채택한 맥오에스텐(OSX)이란 OS와 아이폰, 아이패드에서 쓰이는 iOS의 밑바탕이 됐다.

이 시기 잡스는 1986년 영화 ‘스타워즈’의 감독으로 유명한 조지 루카스로부터 컴퓨터 그래픽 회사도 하나 사들인다. 루카스가 아내와의 이혼소송에서 져서 위자료를 물어주느라 급하게 팔았던 회사다. 이 회사는 이후 ‘픽사’로 이름을 바꿨다. ‘토이스토리’와 ‘니모를 찾아서’, ‘몬스터 주식회사’ 같은 애니메이션이 이 회사의 작품이었다. 하지만 잡스는 여전히 “어린 백만장자의 무모한 실험”이란 비아냥을 들어야 했다. 토이스토리가 처음으로 상업적 성공을 거둔 1995년까지 무려 9년 동안 픽사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으로 엄청난 손해를 봤기 때문이었다. 당시 잡스와 함께 픽사를 창업했던 에드 캣멀은 잡스의 부고를 듣고는 “스티브는 컴퓨터로 애니메이션을 만들겠다는 정신 나간 생각을 진심으로 믿었고, 우리에게 기회를 줬다”고 회고했다.

●스티브 잡스의 재림

1997년 잡스는 애플로 돌아온다. 애플이 부도 직전까지 몰린 상태였다. 돌아온 잡스가 벌였던 일도 무엇 하나 긍정적인 반응을 얻지 못했다. 복귀 직후 벌인 가장 큰 일은 경쟁사였던 MS와의 제휴였다. 경영난에 몰린 애플에게는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잡스는 빌 게이츠를 찾아가 MS가 자유롭게 애플의 특허를 쓸 수 있게 하는 대신 투자를 부탁했다. 1997년 잡스의 키노트에서 MS와 제휴 사실이 발표되고 잡스 뒤의 거대한 화면에 게이츠가 등장하자 애플과 잡스의 팬들은 아유를 퍼부었다. 하지만 이때부터는 잡스가 옳았다. 애플은 이 협력 덕분에 급한 불을 껐고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2001년 발표한 MP3플레이어 ‘아이팟’도 시작부터 실패가 예상됐다. 휴대용 음악기기 시장은 수십년 동안 소니의 독무대였고, MP3플레이어 제조업체들은 모두 해당 분야에만 집중하는 전문 업체였는데 컴퓨터를 만들던 애플이 어떻게 MP3플레이어를 팔겠냐는 우려였다. 결과는 모두가 아는 바 그대로다. 아이팟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MP3플레이어가 됐다.

2007년 선보인 ‘아이폰’도 실패하리란 예상부터 나왔다. 휴대전화 제조업은 소비자를 대상으로 물건을 파는 사업이 아닌 통신사를 대상으로 물건을 파는 사업이었다. 통신사와의 네트워크도, 영업 노하우도 없는 애플이 무슨 수로 제품을 팔겠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폰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스마트폰이 됐다. 아이폰에 열광한 소비자들은 통신사를 압박해 아이폰을 팔도록 했고, 아이폰을 팔지 못하는 통신사는 경쟁에서 뒤쳐졌다. 잡스는 시장의 역학관계를 바꿔버렸다.

2010년 ‘아이패드’가 나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입을 모아 “크기만 커진 아이폰”이라며 혹평을 쏟아냈다. “실망했다”는 의견이 줄을 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존재하지도 않던 ‘태블릿 시장’이란 게 생겼고, 아이패드의 인기 때문에 PC 산업이 휘청거렸다. 그나마 PC 시장에서 유일하게 성장하면서 높은 이익을 내는 회사가 하나 있었다. 서류봉투에 쏙 들어가는 얇은 노트북컴퓨터인 ‘맥북에어’를 만들어 파는 애플이었다.

잡스는 애플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밴드인 비틀즈에 비교하곤 했다. “비틀즈는 네 명이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는 밴드죠. 서로가 균형이 잡혀 있어요. 그리고 이 네 명의 합은 4보다 훨씬 큽니다. 기업의 위대한 점은 이것이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애플은 팀플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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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ntf(“bye, world”);”의 1개의 생각

  1. […] Interpreting Compiler Posted on October 8, 2011 by acousticlife. This entry was posted in Rss and tagged printfbye, world. Bookmark the permalink. « , Matthew Dowd: CEO of Self: Americans Are Hungry for Herman Cain’s Brand of Leadership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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