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테


안경테가 바뀌었다. 사실 본인도 별 신경을 안 쓴 모양이었다. 올해 초 취임 직후에 쓰던 건 이 안경이 아니었다. 그는 2년에 한번쯤 바꾼다고 했다. 나이를 먹으면서 시력이 조금씩 달라지니까.

아마도 두 사람에게는 이런 비교가 썩 달가운 일이 아니겠지만, 그래도 전임 CEO와 비교해야겠다. 기계적으로 2년에 한 번씩 안경테를 바꾼다는 하성민 사장은 굉장히 수수하다. 삶이 검소한지는 모르겠다. 안경테는 꽤 비싸보였다. 소비 생활이 아니라 그의 ‘말’이 수수하다는 뜻이다. 화려한 언변도 없고,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반면 정만원 전 사장(현 SK그룹 부회장)의 안경테는 독특했다. 그는 태그호이어 선글라스에서 유리알만 보통 렌즈로 갈아끼운 안경을 쓰고 다닌다. 사나운 인상을 좀 감춰보려고 그랬다는 것이다. 안경테가 강해 보이면 눈빛이 좀 죽는다고. 그는 달변이었다.

그러니까 지난해까지의 SK텔레콤은 화려했다. 그리고 강인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CEO의 태그호이어 안경테처럼 회사의 모습도 멋있었다. 알짜 고객을 그놈의 아이폰 때문에 KT에 우르르 빼앗기긴 했지만, 당시 CEO는 “우리가 만만한 회사가 아니다”라고 얘기했다. 실제로 그의 말은 맞았다. 50%를 약간 넘기는 SK텔레콤의 시장점유율은 한번도 그 아래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 그러나 사실은 좀 다르다. 알짜 고객이 KT로 넘어가면서 KT는 이익면에서 큰 성과를 이뤘다. 반면 SK텔레콤은 프리미엄 이미지가 흔들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만 프리미엄’이었는데 KT가 아이폰 가입자를 가져가면서 ‘나도 프리미엄’을 하느라 상대적으로 브랜드 가치가 하락했다. 1등을 지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또 가입자 수와 시장점유율을 지키느라 마케팅비도 엄청 쏟아부어야 했다. 이 때문에 당시 통신업계에서는 SK텔레콤이 이를 위해 3000억 원을 추가로 썼다는 얘기도 돌았다. 그리고나서 결국 지난해가 끝나갈 때에는 뒤늦게 아이폰4를 들여왔다. 사실상의 항복 선언이었다. 재미있는 건 정 사장의 얘기였다. 6월 말 경, 새 아이폰4가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이폰4 보셨어요? 제가 직접 봤어요. 그런데 디자인이 완전히 잭나이프에요. 차갑고, 냉정해요. 아이폰3G처럼 부드러운 맛이 없어서 디자인이 영 별로에요.” 그는 아이폰4가 잘 안 팔릴거라고 단언했다. 본인의 안경테는 그렇게 잘 고르던 CEO가 왜 디자인에 대한 감각은 그렇게 무뎠던 걸까. 결과적으로 아이폰4는 ‘안테나게이트’라거나 ‘위치추적’ 등 기기적인 성능이나 운용방법으로 문제가 되긴 했지만 디자인만큼은 좋은 평가를 받았다. 사실 아이폰4 안테나게이트의 문제는 디자인에 대한 집착 탓이었으니까.

올해의 SK텔레콤은 별로 화려한 구석이 없다. 그리고 부드럽다. 역시 겉으로 보기에는.

CEO가 시간이 지나면 기계적으로 바꾼다는 안경테 만큼이나 회사의 운영 방식도 무미건조했다. 뭘 살갑게 설명하는 법이 없었다. 이 회사는 4월에 임원 인사를 마쳤고, 7월에 새 서비스인 LTE를 시작했다. 8월에는 주파수 경매가 있었고 10월에는 SK플래닛을 분사시켰다. 11월에는 하이닉스 인수가 마무리됐다. 큰 일들이 계속 벌어졌는데도 기자들이 CEO 얼굴 한 번 보기가 좀처럼 쉽지 않았다. 7월 LTE 서비스를 시작했을 땐 경쟁사인 LG유플러스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우리는 소외당했다, 하지만 이번엔 변한다”는 메시지가 워낙 강하기도 했지만, SK텔레콤이 그다지 나서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 때 동시에 취재를 요청했는데, 이상철 LG유플러스 부회장은 “내가 직접 자정에 전파 송출 스위치를 누를텐데 그 자리에 오고 싶다면 와보라”고 했다. 반면 SK텔레콤에선 아무 얘기가 없었다. 그리고 하 사장 대신 지금은 SK플래닛으로 자리를 옮긴 서진우 사장이 7월1일 자정 무렵 사무실에 잠깐 들렀다 갔을 뿐이었다. 계열사 분리를 둘러싸고 노사 갈등이 첨예해졌을 때에도 철저히 무대응이었다. 작정한 듯 회사 측 ‘입’은 모두 닫혔다. 반면 노조나 불안감에 휩싸인 직원들 사이에서는 갖가지 소문들과 정보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이렇게 비대칭적인 정보가 주어지면 언론은 정보가 많은 쪽 얘기를 듣게 마련이다. 그래도 이들은 리스크를 그냥 안고 갔다. 하이닉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SK텔레콤이 하면 시너지는 커녕 망하기 딱 좋을 것”이란 비아냥까지 나오는데도 한번도 ‘역정보’같은 건 나오지 않았다. “사고 싶다, 진심으로”라는 일관된 메시지만 나왔고, 실제로 예상가격보다 10% 정도 더 준 금액에 하이닉스를 인수했다. 하 사장은 “원래 모든 인수는 적정가격이라고 평가된 것보다 좀 더 주고 산 뒤 그만큼의 가치를 인수 이후에 만들어내는 게 모두에게 행복한 것”이라고 말했다. 중요한 건 결과니까.

그러니까 이 사람에게 안경테 같은 건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꽤 비싸보이기는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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