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


처음엔 모든 게 맘에 들었습니다. 설명이 재치있었거든요. 교보문고 성대훈 디지털사업팀장은 새 전자책 단말기 ‘교보이(e)리더’를 가리켜 “이것은 디지털이 아닙니다. 책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컨셉이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보문고 김성룡 대표는 한 술 더 떠 “엄마의 마음으로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주의를 분산시키는 기능은 배제했고, 눈을 생각하는 기기를 만들었다”는 얘기도 나왔습니다. 아이패드를 들고 책을 보다보면 어느새 게임을 하거나 동영상을 보는 자신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걸 막기 위해 일부러 기능을 제한했다는 것이죠. 교보이리더는 안드로이드 진저브레드 버전을 쓴 안드로이드 태블릿이지만 커스터마이징된 버전이 올라가 있습니다. 당연히 안드로이드 마켓은 쓸 수 없습니다. 교보문고 eBook 스토어에만 접속할 수 있죠. 일부러 앱을 설치할 수 없도록 제한을 건 셈입니다. 미리 설치된 앱들도 제한적입니다. 전자사전과 페이스북, 트위터, EBS 동영상 강의 외에는 별 기능이 없습니다. 구글 캘린더와 e메일 확인 정도는 가능하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이들에게 걱정없이 사줄 수 있는 기계라고 마케팅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디바이스의 한계를 잘 둘러서 말했다는 인상도 받았습니다.

좋은 인상을 받은 또 한 가지 사실은 교보문고가 12월 1일 배송 및 오프라인 판매 시작과 함께 스티브 잡스의 민음사판 공식전기를 전자책으로 내놓는다는 겁니다. 판매 시점에 맞춰 많은 준비를 해왔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게다가 현재 구비된 9만 여 권의 전자책 숫자도 확 늘려서 발매 시점에는 10만 권이 넘도록 하겠다는 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유통은 교보문고 오프라인 매장과 온라인 매장을 통해서만 진행됩니다. 우리는 유통을 통제합니다”라는 얘기를 들을 땐 이들이 사업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감탄도 했습니다. 하이마트나 인터넷 쇼핑몰에서 팔기 시작하면 가격 통제도 어렵고, 차별화된 소비자 경험을 줄 생각은 일찌감치 접어야 하기 때문이죠. “디지털이 아니라 책”이라고 주장하면서 판매는 시장통 배추 파는 것처럼 한다면 실망했을 텐데 그 반대라 박수를 쳐주고 싶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국 최대 서점 체인이 맘 먹고 시장을 흔들겠다고 결심하면 뭔가 크게 달라지겠다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곧이어 실망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끊임없이 생겼습니다. 무엇보다 값이 그랬습니다. 교보이리더는 아이들 사주라고 만든 기계인데도 그렇게 사주기에는 값이 비쌉니다. 소비자 가격이 34만9000원입니다. 64만원짜리 아이패드2와 경쟁한다면 경쟁력이 있겠지만, 아이패드보다 기계 성능도 떨어지고 화면 크기도 작습니다. 동급으로 비교될만한 킨들 파이어는 22만 원 정도고(199달러) 흑백 전자책 단말기인 킨들은 9만원(79달러)인 마당에 이건 해도 너무 비쌉니다. 한국의 아마존이 될 생각이 있다면 좀 더 현실적인 가격을 매겼으면 어땠을까요. 교보문고에서는 “그만큼의 가치를 전달한다면 비싼 값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라지만, 눈높이는 아이패드에 맞춰져 있는데 당장 터치스크린 반응속도부터 답답하기 말할 데 없는 이 기계에 가치를 부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미라솔 디스플레이 자체는 훌륭합니다. 초당 30프레임까지 표현할 정도로 반응속도를 높였다는데,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본다면 LCD와 미라솔을 딱히 구분하기 힘들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오히려 문제입니다. 딱히 기술을 따지지도, 그럴 마음도 없는 소비자들은 이 기계가 LCD를 썼는지, 미라솔을 썼는지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미라솔은 태양광 아래에서 볼 때 배경화면이 잿빛이라 색감이 다소 왜곡되는 측면이 있고, 반응속도도 LCD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떨어집니다. LCD도 태양광 아래에선 배경화면이 잿빛이 되지만, 태양 아래에서 LCD를 보겠다는 사람은 사실 거의 없습니다. LCD는 실내에서 보는 거란 사실에 익숙해진 겁니다. 배터리가 오래간다는 걸로 소비자를 설득할 수야 있겠지만 현장에서 만져보고, 써보면서 제품 구매를 결정하는 사람들에게 오래 써봐야 느끼는 배터리 성능이 다른 단점을 커버하는 장점이 될는지는 두고봐야 알겠죠.

제조 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한계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요즘 안드로이드 디바이스 중에 터치했을 때 반응속도를 따지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처음에야 아이폰이 반응속도가 좋네, 터치감이 좋네 했지만 이제는 거의 모든 제조사가 노하우를 쌓아서 그런 걸로 기계 성능을 나눌 일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유독 교보이리더는 다시 잊고 지내던 옛날 반응속도 얘기를 다시 꺼내게 만듭니다. OS와 디바이스를 최적화시키는 능력을 교보문고에 기대하려면 얼마나 긴 시간이 흘러야 할지도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책을 수십권 샀다고 가정했을 때 원하는 책을 찾으려고 스크롤하다가 버벅거리는 스크롤에 짜증이 난다면 사용자 경험에 치명적입니다. 이 기계가 딱 그랬습니다.

크기도 문제입니다. 아직 미라솔 디스플레이의 수율이 썩 좋지 않은 모양인지, 교보이리더는 어정쩡한 5.7인치 화면으로 나왔습니다. 양복 재킷 안주머니에 들어가는 킨들조차 6인치 크기입니다. 게다가 킨들 라인업에는 PDF를 보기에 무리없는 킨들DX라는 9.7인치 제품도 존재합니다. 미라솔 제품에는 아직 그렇게 큰 화면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OLED 갤럭시탭 10.1을 볼 수 없는 것과 비슷한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퀄컴 측은 기자회견장에서 이 문제가 지적되자 “디스플레이 크기는 파트너와 상의해서 정하는데 상황과 필요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이라는 원칙적인 답변만 하더군요. 킨들을 쓰면서 느낀 건 6인치 크기로는 PDF 전자책을 읽기엔 화면이 작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겁니다. 9인치 이상의 크기가 필요한데 미라솔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는지 궁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이 기계가 잘 됐으면 좋겠습니다. 후속 버전도 계속 개발됐으면 하고요. 무엇보다 미라솔은 없는 듯 넘겨버리기엔 굉장히 훌륭한 디스플레이입니다. 특히 아웃도어에서 빛을 발하죠. LCD나 OLED는 필연적으로 유기물을 디스플레이에 사용합니다. 따라서 자외선에 약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온도가 낮아지면 반응속도가 확 떨어집니다. 반면 미라솔은 무기물로만 구성된 디스플레이입니다. 태양 아래서도 끄덕없고, 추위 속에서도 반응속도가 변함없이 유지됩니다. ‘모바일 디스플레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미라솔은 기존 디스플레이보다 장점이 많습니다. 게다가 전력소모까지 적으니 들고 다니기에는 이만한 디스플레이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참, 미라솔(Mirasol)은 스페인어로 해바라기라는 뜻입니다. 발광 또는 투광식 OLED/LCD와 달리 반사식 디스플레이인 미라솔은 해가 없으면 무용지물입니다. 늘 태양을 바라보죠. 디스플레이의 작명은 재치있는데, ‘교보e리더’는 좀 심심합니다. 더 좋은 이름은 없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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