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과 불렛포인트

평소 좋아하고 존경하는 엔지니어 선배가 있는데 트위터에 글을 하나 올렸다. “내가 사장이 되면 가장먼저 하고 싶은 일; 파워포인트는 무조건 제목과 불릿포인트만 쓰는 한가지 양식으로만 작성하게 하기. 우리나라만 그런건지 모르겠지만.. 파워포인트 꾸미는데 낭비되는 시간만 절감해도 정말 엄청날듯.”
간단히 불렛포인트로 말하자면,

– 파워포인트 꾸미는 시간은 낭비가 아님
– 우리 나라만 파워포인트에 신경쓰는 게 아님

제목과 불렛포인트라. 특히 효율과 성과를 중요시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저 표현에 동감할 것 같다. 나도 꽤 효율과 성과만 생각하는 편이라고 스스로 여기지만, 적어도 ‘제목과 불렛포인트’에는 동의하지 못하겠다. 파워포인트를 하얀 바탕에 검은 글씨로 제목과 불렛포인트만 쓰게 하면 그 다음 회의에서 일어나는 일은 딱 한 가지다. 얘기하는 사람만 떠들고, 당장 발표자의 평가 라인이나 결제 라인에서 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다 졸게 된다.

이렇게 “내 일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니까”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 졸게 되면 그 조직의 미래는 산으로 간다. 뭔가를 공유하자고 시작한 발표인데, 전혀 공유되지 않는 상황인 셈이니까. 그렇다고 다 큰 성인들을 모아놓은 직장에서 어떻게 한 명 한 명 졸지 말라고 할까. 불렛포인트로 대충 만든 발표자료가 너무 졸렸다고 말할 사람도 없을테니 발표자는 자기 발표가 졸렸다는 사실도 모를텐데 그것도 문제다. 그렇다면 시험을 볼까? 안 그래도 스트레스 천지인데? “우리 모두 이 발표를 봐야 합니다”라고 소리높여 사명감을 강조할까? 그 얘기조차도 졸릴 게 뻔하다.

나도 비즈니스스쿨에서 공부할 때 제일 황당했던 경우가 커뮤니케이션 수업이었다. 무려 경영대 학장(!)이 커뮤니케이션 과목을 담당한 교수였는데, 두 과목 6학점을 강의했다. 첫 과목의 수업 교재가 ‘프레젠테이션 젠'(Presentation Zen)이었다. 아시는 분은 아실 것이다. 어떻게 하면 더 멋들어진 발표 슬라이드를 만들 수 있느냐는 걸 디자인적으로 가르쳐주는 책이다. 이 교재로 멋진 발표 교재를 만들고 나면 그 다음에 해야 하는 과제는 실제 발표 실습이다. 잘 발표하기. 그러니까 사람들을 졸지 않게 만들기 위해 재미있는 그림(소위 ‘짤방’이라고 하는)을 슬라이드에 집어넣는 기술, 감동적인 일화를 소개하면서 사람들을 몰입시키는 기술, 내 일화에서 출발해 조직의 얘기로 이야기를 점증시키는 기술, 심지어 청중을 바라보고 슬라이드의 왼편에 서기(그래야 오른팔을 움직일 때 몸이 화면을 가리지 않는다) 등등을 배운다. 이 수업을 듣고 처음으로 앞에 나가서 발표를 하기 시작했다. 난 무대 공포증 같은 게 있어서 사람들 앞에서 벌벌 떨었기 때문에 그전까지는 다른 팀원들에게만 발표를 부탁했다. 그런데 이 때 한 번 시작하고 나니까 의외로 재미도 느꼈다. 그래서 이젠 가끔 강의도 한다. 일단 시작하면 달라진다. 그리고 가끔 좋은 평가도 듣게 됐다. 이유는 하나였다. 슬라이드에 신경을 쓰니까. 말주변도 없고, 유머 감각도 없으니 발표 전에는 스토리라인을 정하고, 좋은 자료를 모은다. 그렇게 각자 자기 스타일을 찾는 게 발표다.

겪어보진 않았지만 가끔 미국 애들의 중고교, 대학 학부 시절 수업 얘기를 들을 때가 있다. 나도 대학원 수업은 조금 겪어봤으니까 미국 교육과 한국 교육의 가장 큰 차이가 뭐냐고 물어보면 (잘은 몰라도) 주저없이 커뮤니케이션이라고 얘기할 것 같다. 남의 얘기를 잘 듣고, 따라서 질문도 잘 하기. 기분 나쁜 질문도 주저않고 던지지만, 그런 질문일수록 농담을 섞어서 유머러스하게 해서 듣는 사람도 기분 나쁘지 않게 답하도록 배려하기. 남들 앞에서 내 얘기와 의견과 주장을 논리있게 말하지만, 재미있게 말해서 집중시키기. 이건 이과와 문과 차이도 아니고, 인문학과 공학의 차이도 아니며, 쓸데없는 일과 쓸모있는 일의 차이는 더더욱 아니다. 서로 다른 총천연색 스펙트럼의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남의 이목을 끌고, 관심을 이어가며, 그들에게 내 주장을 설득시키기 위해 노력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다. 디자이너라고 발표를 잘 하지 않고, 문학 전공자라고 감동적인 스토리라인을 만들지 못한다. 자기 실력과 뚜렷한 주장이 좋은 발표의 기본이다. 그런데, 기본만으로는 누구도 설득시키지 못한다. 기본보다 더 하는 사람이 늘 존재하기 때문이다. 특히 인상적인 발표나 토론을 내가 해내기란 더더욱 불가능하다.

생각해보면 참 단순한 일이다. 우리는 늘 인상적인 발표나 토론을 통해 내 주장을 주위 사람과 주위 조직에 전염시키려고 일한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기 위한 가장 쉽고 좋고 편한 수단인 슬라이드를 제목과 불렛포인트로만 만들까. 그렇게 일하려면 그냥 혼자서 일하면 된다. 사람들과 함께 일하지 말고.

p.s. 첫 줄에 인용된 분이 누구인지는 검색하면 그대로 나오니까 미리 사과 및 양해를 구하자면, 딱히 개인을 지칭해서 쓴 게 절대로 아니고, 최근 커뮤니케이션 얘기를 많이 들어서 일반론을 얘기하는 겁니다. 이해해 주세요. 그리고… 제목과 불렛포인트는 좀 아니에요. -_-;

Advertisements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