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살 때 만난 컴퓨터게임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의 일입니다. 아버지께서 컴퓨터를 한 대 사오셨죠. 그리고는 선언하셨습니다. “컴퓨터는 미래의 도구이니 써도 좋다. 열심히 배워라. 하지만 게임은 안 된다.” 저는 게임이 해보고 싶었습니다. 동네 오락실에서 동키콩과 버블보블을 하던 초등학생에게 컬러모니터를 갖춘 8비트 컴퓨터가 게임기가 아니면 뭘로 보였겠어요. 너무너무 하고 싶다고 얘기하자 아버지는 조건을 하나 걸었습니다.
“네가 직접 게임을 만들 수준이 된다면 게임도 할 수 있다.”

그때 저는 겨우 초등학생이었습니다. 하지만 게임이 하고 싶었습니다. 아주 많이. 원래 목표가 있는 곳에 노력이 들어가게 마련이고, 노력이 들어가는 곳에 결과가 나오게 마련이죠. 그 때 제 8비트 컴퓨터에서 기본으로 프로그래밍이 가능했던 베이직(BASIC)이란 프로그래밍 언어가 제 정복 대상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간단한 프로그램을 하나 완성했습니다. 기본 함수도 베꼈고, 순서도도 베꼈지만, 그래도 디자인도 직접 했던 게임입니다. 물론 수준은 형편없이 낮았죠. 혹시 아타리가 만든 ‘퐁’(PONG)이란 게임을 아시나요? 두 개의 흰색 막대를 탁구채 삼아, 흰색 동그라미 하나를 공 삼아 가상의 탁구로 가정하고 공을 주고받는 게임이었습니다. 제 게임은 그 퐁보다도 훨씬 단순화된 탁구 게임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약속을 번복했습니다. “내 말은 네가 만든 게임만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건 게임을 하지 말라는 얘기였죠. 그래서 그 뒤로는 숨바꼭질이 시작됐습니다. 이후 저는 몇 년 동안 몰래 게임 소프트웨어를 사다가 부모님 눈을 피해서 게임을 즐겼습니다. 밤도 많이 새웠습니다. 성장기였는데, 그 때 잘 잤더라면 키가 좀 더 크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게임에 빠져들었습니다. 중독이라고요? 사춘기에 사람들은 뭔가에 몰입합니다. 누군가는 소설을 읽고 누군가는 멋을 부리며, 누군가는 첫사랑의 열병을 앓고, 누군가는 운동에 빠져들죠. 저는 게임에 빠져들었습니다. 게임이 아니었더라도 분명히 뭔가에 빠졌을 겁니다.

요즘 그런 얘기가 있습니다. “문제는 롤플레잉게임(RPG)이야, 시간을 많이 쏟고 중독적이거든.”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었긴 하지만 제가 제일 좋아하던 게임이 바로 RPG였습니다. 나이를 먹은 지금도 ‘월드오브워크래프트’ 같은 온라인 RPG를 제일 좋아합니다. 예, 맞습니다. RPG는 중독적입니다. 하품을 하면서도 밤잠을 설치며 몬스터를 때려잡고, 레벨 한 번 올리겠다고 ‘노가다’라고 불리는 단순 행위를 반복합니다. 그 때문에 밤을 새우고 학교에서 엎드려 잤던 적도 있죠. 어린 시절이야 그렇다고 쳐도 “나이가 삼십대 중반인 회사원이 아직도 뭐 하는 짓이냐, 역시 게임은 문제로군”이라고 하실는지 모르겠지만, 저로서는 이게 사반세기를 해온 일입니다. 이런 게 게임세대입니다. 그리고 아마 저는 한국에서 그 세대의 시작점쯤에 있을 겁니다. 좋은 부모를 만나 일찍 컴퓨터를 접했으니까요.

물론 지금은 사춘기때처럼 게임에 열중하진 못합니다. 제겐 중독될 다른 일들이 많으니까요. 예를 들어 지금하는 이 블로깅이나, 책을 읽는 일, 아이와 놀아주는 일, 누워서 뒹굴거리는 일 등이 있겠죠. 음, 게임보다 훨씬 나쁜 술마시는 일도 합니다. 건강도 버리고 시간도 버리는데 게임보다 훨씬 중독적이고 강렬하며 돈도 많이 듭니다.

혹시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이란 영화를 아시나요? 어제 아침 출근길에 우연히 차 안에서 그 영화의 노래 한 곡을 들었습니다. ‘찬찬찬’이란 곡이 흘러나오자 괜히 눈물이 나더군요. 아름답고 구슬픈 가락과 카네기홀에서 공연하던 그 영화의 장면이 겹치면서 이제는 세상을 떠난 쿠바 음악가들의 부재(不在)가 미치도록 아쉬워진 겁니다. 그런 경험 있으신지요? 부끄럽고 창피하신가요? 아마 아닐 겁니다. 제가 지금 하는 얘기는 영화에 대한 얘기니까요. 그것도 예술적이라고 인정받은 유명한 음악 다큐멘터리의 얘기니까요.

그렇다면 ‘파이널판타지’는 어떨까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RPG입니다. 이 RPG의 7편에서는 기억을 잃어버린 용병이 자신의 자아를 찾아 스스로와의 싸움을 벌여가면서 결과적으로는 강하게 생태주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을 모른다면 찬찬찬의 선율이 떠오르지 않아 감동을 공감할 수 없듯, 파이널판타지7을 모른다면 용병 클라우드의 비극적인 인생이 떠오르지 않아서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의 감동도 공감할 수 없을 겁니다.

물론 제가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을 듣고서 갑자기 평소처럼 록음악을 듣는 대신 쿠바 음악 마니아가 됐다거나, 파이널판타지7을 끝내고 난 뒤 지구를 사랑하는 환경론자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거든요. 하지만 이 영화를 본 뒤 쿠바를 떠올리면 이브라임 페레와 오마라 포르툰도가 생각나고, 이 게임을 마친 뒤 환경에 관련된 이야기를 듣다보면 녹색의 생명흐름과 무분별한 자원개발의 이미지가 대비됩니다. 영화처럼 게임도 심상을 만들어주는 것이죠. 결과적으로 이런 작품들은 예술의 영역으로 변해가면서 제 삶을 풍요롭게 만들었습니다.

게임세대가 게임을 통해 예술적 고양을 느끼는 순간은 아마도 게임을 모르는 ‘게임 이전 세대’가 느끼는 것보다 굉장히 많을 겁니다. 어린 시절, 저는 게임의 세계 속에서 인류를 괴롭히는 용을 천신만고 끝에 쓰러뜨린 전사였습니다. ‘드래곤 슬레이어'(Dragon Slayer)였죠. 그런데 막상 용을 쓰러뜨리고 기뻐하려고 맘을 먹었던 그 순간 용이 대사를 한 마디 뱉어내는 겁니다. “나는 너희 스스로가 만들어낸 오만과 탐욕의 상징일 뿐이다.” 영웅전설이란 게임이었습니다. 우리가 악으로 규정하는 상대방의 모습이란 건 결국 우리 스스로의 악을 타인에게 반영했을 뿐이라는 얘기였죠. 원효대사의 이야기를 공부하는 것과 이 게임을 하는 것 사이의 차이가 그렇게 큰 걸까요? 사람들 사이의 상호작용은 또 어떻습니까. 온라인게임 ‘리니지2’에서는 일부 레벨이 높은 사용자들의 전횡에 맞서 능력이 부족한 사용자들이 전쟁을 벌입니다. 게임 속 이야기가 이후 ‘바츠해방전쟁’이란 이름으로 일종의 영웅 서사시처럼 전해지면서 결국 언론에 기사로 등장할 정도였습니다. 집단적 민중봉기의 경험이 게임 속에서 벌어졌던 것이죠.

사실 소설도 처음 나왔을 때에는 온갖 추잡한 저자의 소문을 실어 나르는 사라져야 할 문화였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부모가 자녀가 소설을 읽는 걸 말리나요? 오히려 어떤 소설을 보는지 관심있게 들여다보면서 함께 책을 선택하는 방법을 가르칩니다. 록음악은 한 때 ‘사탄의 음악’으로 지탄받았습니다. 하지만 저를 비롯해 아마도 많은 분들이 비틀즈와 핑크플로이드, 송골매와 시나위에 열광하며 자랐을 겁니다. 비틀즈는 사탄은 커녕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는데 일조했습니다. 오늘날 어떤 부모도 자녀가 듣는 록음악에 기겁하면서 헤드폰을 빼앗지 않습니다. 대신 취향을 더 다양하게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하죠. 영화는? 만화는? 드라마는? 모두 같은 전철을 밟았습니다. 처음에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모두가 즐기는 예술이 됐습니다.

이런 두려움은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됩니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건 늘 두렵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불에 대한 두려움을 버린 뒤에야 간신히 동굴 밖으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게임과 함께 자라난 아이들의 불은 짓밟는다고 해서 꺼지지 않습니다. 저부터 그랬으니까요. 그러니 이제는 모두 함께 불을 다루는 법을 배우기 위해 동굴 밖으로 걸어 나올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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