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끼기는 어떻게 혁신을 낳는가

애플은 정말 모서리가 둥근 사각형 전체에 대해 특허를 얻었을까? 그래서 세상의 모든 스마트폰 제조업체는 모서리가 둥근(달리 말하면 상당히 모호하고 일반적인) 스마트폰은 만들 수 없는 걸까? 물론 아니다. 내 모니터도 모서리가 둥근 사각형이라느니, 내 휴대전화도 모서리가 둥근 사각형이라느니, 하면서 마치 드레퓌스 사건이라도 되는양 “나도 고소하라, 애플!”이라고 외치는 건 넌센스다. 애플이 특허를 낸 건 아주 특별한 형태의(그러니까 아이폰과 같은 형태의) 제품 디자인에 대한 얘기다.
조금 바꿔서 얘기해보자. 그러면 애플하고 똑같은 형태의 디자인으로 제품을 만드는 건 나쁜건가? 극단적으로 말해서 예전에 중국 짝퉁 시장에서 만들던 것 같은 ‘애미콜’이나 ‘예니콜’ 같은 휴대전화를 만드는 건 나쁜건가? 그런 회사가 만약에 그냥 중국 짝퉁 업체가 아닌 삼성전자가 휴대전화 세계1위를 하는 시점에 혜성처럼 등장한  ‘차이니즈핸드헬드'(실제 업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상상의 회사)라는 세계2위 업체가 됐다면 그 회사는 비난받아 마땅한가?

삼성-애플 소송을 애국심이나, 보호무역, 미국 배심원 제도의 문제점 등으로 해석하면 안 되는 이유가 이런 게 아닌가 싶다. 내 생각부터 얘기해야겠다. 차이니즈핸드헬드는 욕해서는 안 된다. 자랑스럽고 독창적이며 우아하고 세계1위의 가치가 있을 정도로 창의적인 선두 업체가 된(한 때 노키아가 그랬고 지금 애플이 그런 것처럼) 미래의 삼성전자가 아무리 자랑스런 한국 기업이라고 해도, 차이니즈핸드헬드가 아무리 대놓고 베꼈다고 해도, 그런 짝퉁 경쟁자의 존재가 부정되면 안 된다. 내가 애플을 좋아하고 아이폰을 좋아하지만 이번 판결은 영 맘에 들지 않는 이유도 그런 점에서다.

Freakonomics » Excerpt from The Knockoff Economy: Tweakonomics.

괴짜경제학(아는 분들은 아실 베스트셀러)의 저자들이 운영하는 괴짜경제학 블로그에 재미있는 글이 올라왔다. 책 소개인데, 이 책은 이름부터 ‘짝퉁경제’다. 부제는 ‘모방은 어떻게 혁신의 불꽃을 피워올리는가'(How Imitation Sparks Innovation) 베끼기와 완벽한 창조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간극이 존재할까. 아니, 창조란 무엇을 어떻게 다르게 베낀 것일까. 우리는 하늘 아래 새로운 건 없다는 얘기를 늘 듣는다. 사실이다. 완벽하게 새롭게 등장한 사물은 없다. 다만 서로 다른 수많은 기존 창작물을 우리가 잘 쳐다보면서 이해하고, 조금씩 수정하고, 개선하거나 결합하거나 복잡함을 단순하게 만드는 과정에서 기존보다 훨씬 나은 제품이 탄생한다.

여러 차례 얘기한 적이 있지만 패션 디자인과 관련된 특허는 각국마다 인정을 하는 곳도 있고, 인정하지 않는 곳도 있으며, 인정한다해도 그 범위가 모두 다르다. 또 대부분의 경우 실효적으로 특허가 의미 없는 분야가 있다. 동대문 패션이 그렇고, 음식점의 음식이 그러하며(누가 “이 집 맛은 내 특허와 똑같다!”며 특허 소송을 걸겠나) 서체(수많은 명조체를 생각해보자)가 그렇다. 특허가 존재하긴 하는데 지키려고 노력하는 비용이 짝퉁을 그냥 놔두는 것보다 손해인 분야 말이다. 그리고 의외로 이런 분야에서 등장하는 신상품의 수가 늘 무궁무진하게 마련이고, 혁신도 빠르다. 이 책의 저자인 칼 로스티알라와 크리스 스프리그먼은 베끼기가 늘 산업을 망치는 건 아니라고 말한다.

애플-삼성 논쟁이 사람들의 머리속에 심어놓은 가장 잘못된 선입견은 “뻔뻔스럽게 베끼면 나쁘다”는 점이다. 뻔뻔스럽게 베끼는 게 자랑할 일은 아니다. 그렇게 해서 시장에서 선택받는 것도 쉽지 않다. 하지만 ‘뻔뻔스럽게 베낀 것’과 ‘참조해 개선한 것’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완전히 똑같은 모방품(예를 들어 상표까지 똑같은 중국산 루이비통백)을 만든다면 그건 바로 범죄다. 그건 도둑질이니까. 하지만 2차적 저작물에 해당하는 건 어떨까. 예를 들어 ‘나는 가수다’에서 임재범이 불렀던 윤복희의 ‘여러분’ 같은 노래라거나 앞서 말했던 글에서 든 예로 보자면 밴 모리슨의 ‘글로리아’ 같은 노래 말이다. 글로리아는 지미 헨드릭스와 도어즈, 데이빗 보위, 브루스 스프링스틴과 AC/DC, 패티 스미스 그리고 U2가 다시 불렀다. 단지 세 개의 코드만 알면 연주할 수 있기 때문에 “절벽에서 아래를 향해 기타를 던지면 그 기타가 바닥에 떨어져 튀어오르면서 ‘글로리아’를 연주할 것”이란 농담까지 나올 정도였고, 기타를 배우는 사람들이 가장 흔히 연주하던 곡이기도 했다.

이렇게 카피한 모든 사람들은 뻔뻔스럽게 글로리아를 베꼈다. 다만 자신의 목소리로, 자기 스타일대로, 자기 멋대로 조금씩 글로리아를 바꿨을 뿐이고 누군가는 바뀐 곡을 더 사랑했다. 아마도 음악계의 이런 식의 저작권 관리는 이번 소송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모두에게 유명해진 FRAND 특허의 음악 버전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글로리아 커버송(한국식으로는 리메이크)을 부르는 가수들은 자신들이 다시 부른 곡을 히트시켜 큰 돈을 벌 수 있고, 그 대가로 약간의 로열티를 밴 모리슨에게 내면 되기 때문이다.

구글이 애플의 특허는 너무나 강력해서 많은 부분이 FRAND의 범주로 들어와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마음 속에 떠올렸던 것도 이런 방식이었을 테다. 애플 한 회사에게만 독점적인 권리를 주기에는 너무나 강력하고, 너무나 일반적인 특허들 말이다. 지금 삼성-애플 특허 소송에서 가장 문제가 된 건 삼성의 특허는 FRAND이고, 애플의 특허는 그렇지 않다는데 있다. 하지만 애초에 특허제도가 도입된 건 특허권자에게 발명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이 기술을 공개해 많은 사람들이 널리 쓸 수 있도록 만들자는 점이었지, 특허권자가 자신의 기술을 혼자 사용하도록 하고 경쟁자의 시장 진입을 막아 사실상의 독점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리고 ‘모서리가 둥근 사각형’부터 시작해서 멀티터치 관련 특허라거나 바운스백 관련 특허 등은 구글의 표현처럼 ‘너무나 강력해서’ FRAND 못잖게 중요한 산업 표준 기술처럼 쓰이고 있다. 당장 바운스백을 회피한 구글의 ‘젤리빈’ 같은 OS는 전혀 직관적이지 못하고, 한 손가락으로는 단방향 스크롤만 하도록 만드는 애플의 멀티터치 특허를 회피했기 때문에 안드로이드에서 스크롤을 하려면 화면이 사방팔방으로 흔들리는 정신없음을 겪어야만 한다. 바꿔 말한다면, 아이폰보다 많은 양의 스마트폰을 쏟아내는 전 세계 업체로부터 이 기술에 대한 FRAND로서의 로열티를 받는다면 애플은 망해가는 RIM을 1년에 하나씩 사들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애플은 현금을 챙기는 대신 소송으로 가는 길을 택했다. 이는 물론 기업의 자유다. 문제는 이런 특허를 한 기업의 전유물로 허락하는 미국 특허제도의 맹점이다.

기왕 ‘짝퉁경제’ 얘기를 한 김에 저자들의 얘기를 조금만 더 소개해야겠다. 그렇다면 도대체 음악을 뻔뻔스레 베껴서 커버송을 팔아먹는 행위는 왜 음악 산업의 FRAND가 된 걸까. 현실적인 문제 탓이었다. 원래 음악의 지적재산권이란 건 참 애매모호했다. 음악은 실제로 연주를 하는 순간에야 소비된다. 하지만 과거에는 녹음기도 없었고 MP3는 더더욱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악보를 통해 하나의 지적재산으로서의 음악을 소비했다. 그래서 음악에 대한 지적재산은 악보를 통해 관리됐다. 악보를 인쇄하거나 복사하는 행위는 엄격하게 관리됐고, 무단으로 특정 곡에 대한 악보를 만들어 이를 다른 장소에서 연주할 경우 이는 무단복제에 해당했다.

문제는 ‘자동 피아노'(player piano)라는 기계가 등장했을 때였다. 기계 피아노가 알아서 자동으로 음악을 연주하는 이 기계는 악보가 아니라 피아노만 해석할 수 있는 구멍이 뚫린 종이롤을 통해 음악을 읽었다. 악보가 아니니 관련법이 없었고, 음악을 만들어낸 저작권자들은 자신의 음악이 자동 피아노에 의해 아무데서나 연주되도 손을 댈 길이 없었다. 19세기 말의 일이다. 무슨 말장난 같지만 1908년 미국 연방법원은 자동 피아노 회사의 손을 들어줬다. 사람은 자동 피아노의 종이롤을 읽을 수 없으니 악보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듬해 저작권법이 확대되면서 작곡을 ‘기계적’으로 재생산하는 것 또한 저작권의 범주에 들어가게 됐고 모든 창작곡은 ‘의무적으로’ 라이센스를 얻게 된다. 자동 피아노가 침해하는 권리를 저작권자에게 되돌려주기 위해 만들어진 이 의무 라이센스 조항 덕분에 작곡가들은 자신의 곡이 연주될 때마다 로열티를 받게 됐다. 그런데 피아노만 그렇게 된 게 아니다. 이 덕분에 가수들도 다른 가수의 노래를 부를 때 자동피아노 회사가 지불하는 정도의 로열티만 내면 그 곡을 재연할 수 있게 됐다. 돈만 내면 저작권자를 찾아가 허가를 얻을 필요도 없었다. 커버송이 등장하고, 수많은 변주가 등장한 이유다.

저작권자의 권리가 무참히 훼손된다는 걱정도 있다. 한국에서도 서태지가 패러디 전문가수 이재수 씨의 컴백홈 커버송에 분노해 음악저작권협회에서 탈퇴한 일이 있다. 이런 사람들에겐 이재수의 행위가 모욕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것도 음악저작권협회에 ‘헐값’의 로열티만 내면 맘대로 커버송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한국에선 이런 조항이 ‘강제’가 아니기 때문에 서태지처럼 활동하는 게 가능하다. 그런데 왜 미국에선 강제가 됐을까? 이올리언(Aeolian)이라는 자동 피아노 회사 때문이다. 녹음기보다 10년 쯤 앞서 대중화된 자동 피아노 기술은 당대의 가장 뜨거운 아이템이었다. 업계 1위로서 큰 돈을 벌던 이올리언은 저작권 문제가 예상되면서 작곡가들의 저작권을 모조리 사들이기 시작했다. 이는 경쟁 자동 피아노 제조업체에게는 시장이 독점으로 흐르는 것을 의미했고, 결국 미국 정부가 지금과 같은 라이센스 제도를 의무적으로 모든 곡에 강제할 수밖에 없었다. 시장의 자율 경쟁을 촉진하기 위해서.

특허나 라이센스 등 지적재산권을 둘러싼 각종 제도의 목표는 늘 변함없었다. 경쟁을 촉진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의 가치를 인정해 주며, 결과적으로 산업을 더 풍요롭게 만들고 혁신을 늘리기 위한 것. 애플과 삼성의 소송 결과가 가슴아픈 건 지금 미국 법원과 특허제도가 창의적인 아이디어의 가치를 인정하는 부분만 봤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경쟁을 줄이고, 산업을 황폐화시키며, 혁신을 갉아먹기 시작해서다. 미국이 보호무역에 빠져서 아쉬운 것도 아니고, 한국 기업이 소송전에서 졌기 때문에 올림픽 시합에서 진 것 같은 아픔을 느끼는 것도 아니다. 미국식 배심원 제도의 문제도 물론 아니다. 문제는 결국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는 제도의 문제다.

애플은 다르다고 하지만(나부터 그렇게 생각한다) 그 다름도 결국은 다른 이들이 이뤄놓은 성과의 어깨 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스티브 잡스가 GUI와 포스트스크립트와 오브젝티브C와 마우스와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만들어 우리에게 선물해 준 사람이긴 하지만, 그 또한 하늘 아래 처음부터 이런 제품을 가져온 건 아니었다. 남다른 노력은 남다른 보상으로 인정받으면 된다. 남의 노력을 막을 게 아니라. 애플은 지금 세계에서 가장 시가총액이 큰 회사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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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date 1. 쓰고 나니 모호하고 장황해졌다. 하고 싶었던 말을 거칠게 줄이자면 이것. 서태지(애플)가 죽이는 음악을 만든 건 맞는데, 유행이 좀 지난 뒤에 이재수(삼성)가 맘에 안 들게 리메이크 했을 때 이걸 어떻게 봐야 하나. 이재수 말고도 더 나은 패러디가 나올 수도 있고, 서태지 원곡보다 좋은 노래를 만들 수도 있으니 로열티 내고 쓸 수 있게 해야 한다면 나와 같은 견해. 서태지의 원곡을 망친 파렴치한 행위니 법으로 못하게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애플과 미국 법원의 판결이 생각하는 견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생각하느냐의 문제다.

베끼기는 어떻게 혁신을 낳는가”의 9개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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