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모바일

지난주 일본에 다녀왔다. 이틀 동안 여러 회사를 방문하고, 테크크런치 도쿄 컨퍼런스에 참석하는 일정. 사실 일본에는 몇 번 가보긴 했는데, 모두 일로 갔던지라 갈 때마다 일본이 부산 쯤 되는 듯한 짧은 일정 탓에 뭘 찬찬히 둘러볼 겨를이 없었다. 이번에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도대체 하라주쿠가 왜 좋다고 하는지, 오타쿠의 마을이라는 아키하바라는 어디에 붙어있는 건지, 연인들의 성지라는 오다이바는 과연 도쿄 맞긴 한건지… 가봐야 알지!
하지만 그래도 몇 가지 고마웠던 건 다행히도 영어를 하시는 일본 분들이 친절하게 안내해주시고 저녁도 함께 먹어주신 덕분에 현지 분위기를 많이 느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일본에 계신 한국 분들은 세계 어디서나 한국인은 다 그렇듯 주변을 압도하는 성실함과 열정을 전해주셨고, 일본어로 대화할 일도 많았지만 이번엔 세계에서 제일 훌륭한 일본어-한국어 통역 선생님을 만났던지라(헤드셋을 쓰지 않는 근거리 대면 대화에서 동시통역을 하는 건 처음봤다) 언어 장벽도 생각보다 낮았다. 그리고 재미있는 경험, 또는 독특한 경험들이 일본을 다르게 보게 해줬다.

우선 약속 시간에 놀랐다. 최근 몇 년 동안은 미국과 유럽을 주로 다녔는데 어떤 곳에서도 오후 3시 이후로 약속을 잡았던 적이 없다. 왜 늦은 약속을 잡지 않는 것인지 물어보진 않았지만, 그래도 오후 4시쯤 방문하면 혹시나 시간이 늦어질 경우 오후 5시(퇴근시간)가 넘어서 끝나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미국이나 유럽인들은 퇴근시간을 중시한다는 건 직간접적으로 들어서 알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이들이 ‘칼퇴근’을 하는 건 아니다. 실리콘밸리 기업들은 정말 늦게까지 일한다. 다른 나라에서도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은 다 열심히 한다. 하루 12시간씩 일주일에 6일 이상 일하는 사람들도 많이 봤다. 다만 그들 모두 자신은 그렇게 일해도, 남들의 저녁 시간까지 뺏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일본에선 아니었다. 좀 급하게 약속을 잡았더니, “그러면 저녁에 만나도 되겠느냐?”는 답이 돌아왔다.(미국이나 유럽에선 “그럼 이번엔 어렵겠습니다”라고 한다.) 출장자가 저녁시간이라고 딱히 할 일이 있을리 없으니 당연히 시간 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리의 공동창업자인 야마기시 고타로 부사장은 6시에 인터뷰 장소로 나타났다. 피곤에 찌든 얼굴로. 야마기시 부사장은 “오늘 아침부터 IR이 있어서 투자자들을 만나고, 기자들 질문에 답하느라 좀 힘들었다”며 웃었다. 그래놓고도 한시간 넘게 열정적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NHN재팬에서도 모리카와 아키라 대표가 일정이 너무 바쁘다면서 5시반에 찾아오면 안되겠느냐고 물었다. 두 약속 모두 인터뷰를 마치고 나니 7시가 넘었다. 그때부터 실무자들이 오피스 투어를 시켜줬다. 인상적인 건 8시가 다 돼 가는 늦은 시간에도 직원들의 70%가 남아서 일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회사 식당에서는 저녁 도시락도 팔고 있었다. “야근이 일상적인가요?”라고 물었다. “그럼 김기자는 7시에 퇴근하시나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물론 아니다. 잊고 있었다. 동아시아의 우리는 모두 워커홀릭이란 걸.

또 한가지 흥미로웠던 건 한국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심. 일본에서는 카카오톡이란 서비스의 존재감은 사실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소비자들은 카카오를 모른다. 여기선 모두 라인을 쓴다. 하지만 업계에선 다르다. 이 사진은 테크크런치 도쿄 컨퍼런스. 스마트폰의 급성장에 힘입어 성장한 서비스들을 야후재팬 카와베 켄타로 COO가 소개하면서 야후재팬의 스마트폰 시프트 계획을 발표하는 중이다. 왼쪽 두번째의 저 로고가 바로 카카오톡이다. 일본 소비자 사이에서는 존재감도 없는 서비스가 한국에서 급성장했다는 이유만으로 주목할 만한 서비스로 소개되는 중이었다. 그리나 디엔에이(DeNA)처럼 미국과 유럽에서도 세를 키워가는 일본 업체들도 저마다 SK텔레콤과의 제휴, 다음과의 제휴, 엔씨소프트와의 제휴 등을 디즈니와의 제휴 못잖은 중요한 파트너십이라며 투자자에게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있었다. 한국이 3500만 명이 스마트폰을 쓰고 있는 세계 메이저 모바일 시장인 덕분이었다.(한국은 스마트폰 사용자의 절대 규모면에서도 세계 Top5에 들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삼성전자 갤럭시 시리즈는 일본에서 왜이리 잘 팔리는지, 정말 갤럭시 광고가 시부야와 롯폰기, 신주쿠를 휩쓸고 있었다. 물론 아이폰이 훨씬 인기이긴 하지만, 아이폰 바로 다음은 누가 뭐래도 갤럭시였다. 일본 스마트폰이 아니라. 그러니 일본 모바일 업계에서 한국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었을 테다.

일본 자체의 활력도 넘쳤다. “다른 건 몰라도, 불황기에도 스마트폰 게임은 잘 될 것”이란 얘기를 이 짧은 출장 동안 너댓번은 들은 것 같다. 그것도 서로 다른 사람들로부터. 물론 만난 사람들이 다 IT 업계 사람들이니까 그렇긴해도, 확실히 뭔가 느껴졌다. 예를 들어 그리가 만든 도리란도(Driland) 같은 모바일 카드 게임은 게임 자체가 큰 인기라서 TV애니메이션도 만들어졌는데, IT와는 아무 관계없는 가이드분에게 도리란도를 아느냐고 물었더니 중년 남성의 입에서 바로 도리란도 주제곡이 흥얼거리면서 나올 정도였다. 테크크런치의 알렉시아 토시스 편집장은 ‘미국 미디어에 소개되는 법’이란 발표도 컨퍼런스에서 했는데, 내용 자체야 별 게 없었지만 “세계로 나오세요, 여러분!”이라며 컨퍼런스에 참여한 벤처기업인들을 끌어당기는게 인상적이었다. 일본 기업들의 정신나간(crazy) 아이디어를 일본에서만 사업화하지 말고 미국에서 펼쳐보란 것이다. 미국에서 관심을 끌면 세계가 본다면서. 알렉시아가 “여러분, 일본은 진짜 쿨한 나라지만, 일본이 세계의 전부가 아니에요. 바깥은 더 환상적입니다”라고 얘기하자 박수도 쏟아졌다. 일본을 갈라파고스라고 비웃었다면, 조만간 생각을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세계 3위 경제대국의 스타트업들이 세계로 쏟아져 나오면 뭐가 달라질지 모르니까. 무엇보다 일본은 모바일을 꽤 오래 전부터 해왔다. 아이폰 이전의 모바일이 뭐 별거냐 얘기할 수도 있겠지만, 피처폰으로 이메일도 보고, 게임도 하고, 인터넷 검색도 하고, 심지어 휴대전화용 소설인 ‘게타이 소설’이 베스트셀러로 출판되기도 했던 게 일본이다. 휴대전화로 해볼 수 있는 걸 거의 다 해봤고, 이제 스마트폰이란 더 훌륭한 플랫폼만 열렸다는 뜻이다. 이번에 만난 대부분의 일본인들이 “PC에서야 일본이 뒤졌을지 몰라도 모바일에선 아니다”라는 자신감으로 넘쳐 있었다.

물론 이를 가능하게 하는 건 일본 시장 자체의 매력이다. 이날 북미에서 인기를 끌던 위버(Uber)라는 스마트폰 앱 개발사의 창업자 트래비스 캘러닉도 도쿄에 와서 발표를 했는데, 발표 도중 “다음달 쯤 일본 사업을 시작할 계획인데 취업할 사람 구해요”라며 일본 지사 간접 구인광고를 시작했다. 위버는 콜택시처럼 리무진 사업자를 개인들과 연결해주는 서비스다. 택시 잡기 힘든 뉴욕과 로스앤젤레스, 몬트리얼, 샌프란시스코 같은 곳에서 인기를 끌었다. 스마트폰에서 위버 앱을 열면 인근의 차들이 나오고, 차종과 가격을 선택하면 도착 예정 시간이 GPS의 현재 위치와 함께 스마트폰에 뜬다. 결제까지 앱 안에서 끝나기 때문에 편리할 뿐만 아니라 택시기사와 실랑이할 필요도 없고, 쓸데없이 거리에서 땀흘리거나 추위에 떨 이유도 없다. 택시값이 비싼 도쿄에선 확실히 매력 있을 것 같다. 위버로서는 첫 아시아 시장 진출을 당연히 일본으로 봤다. 인구 1억 명에 경제규모 세계 3위의 거대한 시장은 일본의 압도적인 장점이다.

그렇다고 부러워만 하고 있을 건 또 뭐람. 그렇다면 일본에 가면 되지. 이렇게 생각한 사람들도 만났다. 스카이벨루가라는 작은 일본 게임회사였는데, 직원은 4명. 그런데 그들 모두 한국인이다. 한국계 일본인 말고 한국에서 교육받고 일본어는 나이들고서야 배운 토종 한국인.

이 회사 창업자들은 한국에서 서든어택, 던전앤파이터 같은 게임을 만들고 서비스하던 사람들이다. 이제 대세는 모바일이라고 생각했고, 모바일 게임은 일본이라 생각했으며, 그러면 본토에서 일해보자고 건너온 것인데… 왜 미국에 안 가고 일본에 왔을까? 신일하 대표는 숫자가 모든 걸 말한다고 했다. 사실 몰랐다. 모바일 게임 사용자들도 ARPU(1인 당 매출액)를 계산하는데, 일본은 미국이나 중국을 훌쩍 뛰어넘는 모바일 ARPU 세계 1위 국가라고 했다. 참고로, 한국은 중국보다 낮다고… 이외에도 장점이 많았다. 예를 들어 한국인이 한국에서 게임회사를 세워 게임을 팔려고 하면 세계 시장에선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있어서 모두가 꺼린다고 했다. 신용도의 문제인데, 예를 들어 중국 회사와 계약하면 계약 완료 시점에 제품이 제대로 전달될 가능성이 절반도 안된다는 것이다. 한국 회사는 중국과는 달라서 어찌어찌 계약을 지키긴 하는데, 과정이 뭔가 불안하고, 완성품을 받고도 찝찝한 느낌이 든다고 했다. 반면 일본 회사는 계약은 칼이어서 무조건 완수하낸다고. 그래서 일본 기업으로 등록돼 있으면 돈을 벌었을 때 세금을 일본에 내야 하긴 하지만, 성공할 기회를 잡거나 계약을 따내기는 훨씬 쉽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시장이 워낙 큰데다 오타쿠 문화 덕분에 소비자 충성도도 높아서 ‘대박’을 노리지만 않는다면 생존 자체는 한국보다 쉽다는 얘기에도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러니까 일본은 지금 한국 또는 주변국의 기업가들에게 성공을 위한 발판 역할까지 하기 시작했다. 한국은? 우리는 해외의 뛰어난 인재들에게 문을 얼마나 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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