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버노트 백화점

비웃을지도 모르겠지만, 난 맥과 아이폰, 아이패드에서 아주 빨리 열리고 빠르게 동기화되는 ‘메모’ 앱의 신봉자였다. 설마…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 설마가 맞다. 그 노란 종이와 갈색 바인더가 달려 있는 촌스러운 디자인의 기본 설치된 메모 앱 말이다. 뭔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늘 메모 앱을 열었다.
나도 에버노트가 좋은 메모 도구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에버노트를 약간식 쓰기도 했다. 심지어 프로모션 판매 기간에 다른 소프트웨어들과 함께 번들로 구입한 1년 프리미엄 사용권까지 갖고 있다. 그런데도 기본 메모 앱을 고집했다. 에버노트는 여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고, 동기화 시간도 너무 많이 걸렸기 때문이다. 앱이 구동되는 쓸데없는 시간 동안 아이디어는 사라지기 일쑤였고, 아이폰에서 끄적인 메모가 앱을 너무 빨리 종료한 탓에 동기화되지 않아 맘을 잡고 앉은 키보드 앞에서 일을 시작하려면 다시 폰을 켜고 동기화를 눌러야 했다. 귀찮았다. 그래서 본질이 중요하다는 생각이었다. 메모는 말 그대로 메모니까, 동기화가 잘 되고 글만 잘 쓸 수 있으면 됐다.

그랬는데 요즘 다시 에버노트로 돌아가볼까 고민중이다.

에버노트가 다시 메모의 본질에 접근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메모란 기억의 확장이다. 잊지 않기 위해서 남겨두는 기록 말이다. 그게 한 두 개의 단어일 수도 있고, 사진이나 음성녹음일 수도 있다. 다른 이에게 전하기 위한 쪽지일 수도 있고. 하여튼 장기 보관을 위한 것이 아닌 나중에 다른 일을 할 때 사용하기 위한 보조적 재료를 만드는 게 메모를 작성하는 이유다. 그래서 에버노트는 이런 용도로 쓸 수 있는 기능들을 슬금슬금 추가했다. 그리고 이제는 에버노트에서 작성한 메모가 언제 어디서 작성한 메모인지 시간과 장소를 노트 제목으로 자동으로 달아서 쉽게 기억하게 도와준다. 에버노트에서는 나중에 보기 위한 PDF 파일도 저장해서 볼 수 있고, 심지어 PDF 내부를 클라우드에서 OCR로 인식해 검색 가능한 파일로 변환해준다. 에버노트 ‘헬로’ 같은 앱은 페이스북과 링크드인 프로파일이 연동돼 만난 사람을 더 쉽게, 잘 기억하게 돕기도 한다.

심지어 조금 전에는 펜얼티밋 업그레이드 보도자료도 받았다.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Pen Ultimate은 아이패드용 손 글씨 메모장이다. 굉장히 자연스러운 필기가 가능해서 인기를 모았던 유료 앱이다. 그런데 이 회사를 에버노트가 인수했다. 그리고 아이패드에서 손으로 쓱쓱 써놓은 손글씨 메모를 이제는 굳이 에버노트 앱을 열 필요없이 펜얼티밋 안에서 에버노트 메모로 바꿔준다는 것이다. 한 가지 더, 유료로 살 가치가 충분했던 이 앱을 에버노트는 무료로 풀었다.

펜얼티밋은 왜 무료가 됐을까.

이 사실에 관심이 갔다. 충분히 잘 팔리던 앱을 무료로 풀어놓는다는 건 사람들이 더 많이 쓰는 게 수익보다 더 중요하다는, 아니 무료로 풀어도 장기적으로 더 큰 수익을 낼 수 있다는 얘기다. 왜? 내 생각엔 사용자들의 경험을 위해서다. 이렇게 에버노트와 관련성이 없어 보이는 전혀 다른 앱에서의 데이터가 에버노트 데이터로 자동으로 이전되는 경험 말이다. 사람들이 이런 데 익숙해지면 앞으로는 온갖 앱들을 이런 식으로 에버노트로 묶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페이퍼 앱에서의 그림 작업을 하다가 저장하면 바로 에버노트 안에 그리던 그림이 저장될 수 있다. 심지어 에버노트용 워드, 에버노트용 스프레드시트, 에버노트용 프레젠테이션 앱도 등장해서 우리의 작업 기록도 잊지 않을 메모로 변화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사진은? 동영상은? 기타 수많은 사용자의 파일은? 그 때에도 에버노트가 단순한 메모장일까? 말 그대로 세상의 모든 정보를 다 담고 있는 기기가 될지 모른다. 구글이나 페이스북이 탐을 낼 수도 있고, 에버노트가 또 다른 구글이 되고자 노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전통적인 디렉토리 구조의 파일 시스템은 너무 불편했다. 사용자가 폴더 관리를 해야 한다는 건 스마트폰과 태블릿을 짜증나는 사무기기로 바꿔놓는 퇴보였으니까. 그 때 애플이 파일 시스템의 혁신을 보여줬다. 아이클라우드 얘기다. 아이클라우드는 윈도 식의 파일관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여기엔 복잡한 폴더 구조를 사용자가 외울 필요가 없었고, 루트 디렉토리가 뭔지 복잡하게 배워야 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앱 안에서 파일을 직접 관리하는 것으로 충분했고, 모든 건 클라우드에서 동기화됐다. 그런데 혁신적인 아이클라우드 방식의 가장 큰 문제점은 애플의 모든 혁신적인 제품들이 다 그렇듯 다른 운영체제와의 교환이 썩 쉽지 않았다는 데 있다. 에버노트는 그 서로 다른 운영체제를 연결하는 플랫폼이 될 작정인 듯 보인다.

에버노트는 처음 사업을 시작할 때만 해도 기본 메모 앱의 느리고 무거운 대체품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아무 것도 아니었단 뜻이다. 그런데 지금의 에버노트는 예상치 못한 거대한 존재가 됐다. 아마도 앞으로 에버노트는 애플 아이클라우드와 구글 클라우드의 경쟁자가 될 것이다. 그 때에도 과연 우리는 에버노트를 계속 노트라고 부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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