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레인지로버

RR
지난 주말 랜드로버사의 신형 레인지로버를 탔다. ‘우와! 레인지로버!’라며 마냥 들뜨기엔 이미 상당히 무뎌졌다. 새 차를 바라볼 때 두근거림은 지난 5년 사이 ‘아 젠장. 이걸로 또 뭔가 써야하는군.’ 이라는 푸념으로 바뀌었다.

지루한 차들은 세상에 넘쳐난다. 레인지로버(or 랜드로버) 는 그나마 특별하다. 영국 왕실의 의전차량. 귀족들이 사냥에 나설 때 즐겨 타는 차. 이 차에는 숱한 이야기가 얽혀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와 닿은 것은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坂本龍一)의 일화다. 사카모토는 미국 뉴욕에 체류하던 시절 9.11을 겪었다. 테러의 공포가 전미 대륙을 뒤덮던 시기. 사카모토는 짐을 싸서 일본에 돌아가는 대신 레인지로버를 샀다. 이 차 안에 있으면 안전하다고 절반쯤은 믿었던 거다. 아무리 잘 나가는 음악가라도 NYC 한 복판에 개인 방공호를 쉽게 마련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육중한 몸집의 검은색 신형 레인지로버를 주차장에서 보고 한숨을 푹 쉬었다. 서울 광화문 동아미디어센터의 주차장 통로는 폭이 좁다. 이 길을 수백 번 지났어도 큰 차를 몰고 빠져나갈 땐 진땀이 흐른다. 2억 원짜리 차를 벽에 긁는 건 그 누구에게도 썩 유쾌한 일이 아니다. 넓은 길에 차를 올리고 나서야 시작이다. 5L급 슈퍼차저 엔진. 그것도 가솔린(!). 디젤 엔진의 눈부신 발전은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가솔린 특유의 상쾌한 엔진의 회전 느낌과는 비할 수 없다. 510마력의 힘을 발밑에 내려놓으면 조금은 스스로가 강해진 기분도 든다.

랜드로버와 재규어의 고급 모델은 드라이브 셀렉트라는 특이한 변속기를 달고 있다. 기어스틱을 위 아래로 움직이는 대신, 마치 전자렌지의 다이얼을 좌우로 돌리듯 전진과 후진, 파킹을 고른다. 3톤에 가까운 괴물을 손가락 끝으로 제어할 수 있다. 변속기 밑에 또 하나의 다이얼이 있다. 이건 산악지대와 모래밭, 눈길 등 지형에 맞춰 차를 움직이게 해준다. 이건 마치 전자렌지 다이얼을 돌려 ‘냉동만두’나 ‘팝콘’을 고르듯 험로를 뚫고 지나갈 수 있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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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드로버는 1948년 영국 정부의 요청에 따라 군용차로 개발돼 럭셔리 SUV로 변모했다. 최상위 모델인 레인지로버의 효용가치는 도심 속 현대인에게 그리 크지 않다. 연비는 L당 6km 남짓을 달린다. 서울 시내에서 자갈밭 위를 달릴 일도 없다.

랜드로버는 군인이나 사냥꾼보다 손끝으로 일하는 사람들에게 팔린다. 다이얼을 돌려가며 내겐 도저히 필요치 않을 숱한 과잉을 즐기다보면 꽤나 사치스러운 기분이 든다. 게다가 이 차를 타고 한남대교 위를 달리다 보면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한강으로 떨어져도 최악의 사태는 면할 수 있으리란 믿음이 아주 약간은 생긴다. 불합리한 구매행위에는 이 정도 설득의 빌미가 필요하다. 테러까지는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포스팅으로 인사를 대신합니다. 자동차, 만화, 걸그룹 얘기 등등 종종 쓰겠습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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