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

나는 서태지 세대다. 춤도 하나도 못 추면서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회오리춤을 교실 뒤에서 연습하곤 했던. 바로 그 비슷한 시기에 온 세상이 ‘난 알아요’만 듣고 있던 그 때, 신해철이 넥스트라는 밴드를 만들고 새 앨범을 냈다. 내 중학교 2학년 시절이었다. 앨범은 정서에 딱 맞았다. 아마도 신해철은 중2병의 대마왕이었을 테니까.

1988년 대학가요제였다. 무한궤도의 노래를 처음 들으면서 “무조건 저 팀이 1등할거야. 아니어도 난 저 팀 팬이 될 거야”라는 생각을 했다. 나만 그랬을까. 아직도 싸이는 콘서트 때마다 ‘그대에게’를 부른다. 노래도 거지같이 못하면서 말이다. 참, 싸이는 나하고 동갑이다. 신해철은 우리보다 아홉살이 많았고. 그런데도 묘하게 정서적으로 통했다. 서태지가 시대를 같이 살아갔다면, 신해철은 왜 저 나이에도 저러고 있을까, 싶은 정서였다. 마이너하고, 반항적이고, 자의식 강하고, 왕자병이고, 딱 사춘기 소년 같은. 어쩌면 평생, 지금까지도.

1996년 여름 스튜디오에서 신해철을 만났다. 한 교육전문 케이블TV 채널에서였다. 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대학신입생 패널이었고 해당 프로그램 사회를 보던 고정 강사는 ‘신세대 바람’을 타고 막 새로운 인기직종을 찾은 전직 운동권 ‘문화평론가’였다. 신해철을 섭외하는데 성공했던 우리는 모두 두근거리면서 넥스트의 리더를 기다렸다. 그가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라면서 가볍게 목례하면서 들어오던 키작은 남자 얼굴에서는 빛이 뿜어져 나왔다. 아니, 신고 있던 엄청난 키높이 굽 때문에 사실 키도 별로 작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는 예의 낮은 목소리로 방송을 진행했다. 멋졌다.

녹화가 끝나고, 사인을 받고, 함께 담배를 태우면서 개인적으로 다들 몇마디씩 질문을 던졌다. 난 “넥스트 노래들 보면 염세적이다가, 낙관적이다가, 이랬다 저랬다 싶은데 이런 걸 쓰시는 신해철 형에겐 인생의 의미 같은 게 있어요?”라고 물었다. 나도 그때까지 그냥 중2병이었던 듯 싶다. 인생의 의미는 무슨. 역시 신해철은 쿨하게 대답했다. “그런게 어딨어, 그냥 사는 거지. 나도 몰라, 그딴 거.”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 지기 싫어서 한마디 더 물었다. “그러면 왜 그런 가사를 써요?” “그럼 너는 왜 그런 질문을 이런 자리에서 하는데?” 동문서답의 끝판왕. 사람 바보만들기 대마왕. 아, 그런데, 사실 그 답이 좋았다. 퉁명스럽게 던지는 시니컬한 말투도. 그리고 그날 받은 그 사인도. 물론 지금은 잃어버렸지만.

21세기가 됐고, 신해철은 노무현을 지지했고, 대마초 합법화 얘기를 꺼냈고, 북한 미사일이 어쩌고 사교육이 어쩌고 화제를 모았다. 그냥 다 시끄러웠다. 날을 세우고 목소리를 높이는 신해철은 “아, 시끄러, 닥치고 음악이나 들어. 노래에 다 있잖아”라고 얘기할 것 같던 쿨한 신해철과는 달라 보였다. 안 쿨해 보였다. 그리고 최근의 신해철. 나보다 열살 가까이 많은 신해철이 또 방송에 나왔다. 새 앨범도 내려고. 살쪘다고 놀림까지 받아가면서. 마왕이. 여전히 중2병이.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형은 그대로고 나만 변했던 거다. 이 아저씨는 여전히 마이너고, 쿨하고, 반항적이고, 할 말은 꼭 다 내뱉고 말면서 살았는데, 난 그냥 세상 사는대로 살았으니까 내가 보기에 그래 보였던 거다. 난 정치엔 관심없고, 대마초 같은 건 어차피 안 피는데 내가 왜 신경을 쓰느냐 싶고, 북한 미사일이나 사교육엔 관심 없고, 그냥 다 시끄러운 주제였으니까. 중요한 문제인데도. 내가 이렇게 살 게 뻔하니까, 자기보다 열 살 어린 놈들도 서른 넘으면 이래 변할 게 뻔하니까 25년 전부터 이런 가사를 썼겠지.

“나만 혼자 뒤떨어져 다른 곳으로 가는 걸까, 가끔씩은 불안한 마음도 없진 않지만, 걱정스런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친구여. 우린 결국 같은 곳으로 가고 있는데.”

그래서 오늘 슬프다. 하지만 가는 형은 슬픈 표정 하지 말았으면. 결국 우린 같은 곳으로 가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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