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과 역차별과 역차별에 대한 차별

최근 아시아계 응시자들이 하버드에 소송을 제기했다. ‘신입생 인종 비율 맞추기’가 하버드의 관행이라는 강력한 증거가 제출됐다. 각 인종·민족 집단의 입학생 수가 매해 현저히 비슷한 비율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자료다. 아시아계 입학생 수가 유난히 높은 해가 드물게라도 있으면 그다음 해부터는 아시아계가 눈에 띄게 줄었다는 통계도 있다.

뉴욕타임즈 칼럼을 번역한 중앙일보 기사. 이 기사에 등장하는 어퍼머티브 액션(Affirmative Action)이란 말을 처음 들은 건 대학생 시절 캐나다에 갔던 때였다. 긍정적인 의미에서 큰 충격을 받았던 개념이었다. 북미가 선진 사회라고 놀란 건 아니고, 이들의 생각에 대해 놀랐다. 우리는 모두 우리의 편견에 의해 서로를 차별하게 마련이니, 차별을 줄일 수 있도록 우리가 우리를 역차별해서 평등을 만들어 보자는 사회적 약속을 만들었던 것이니까.

그러니까 애초에 이 제도는 흑인 학생이 좋은 대학에 입학하지 못하면 사회의 높은 지위도 차지하기 힘들고 그러면 이 흑인 학생들은 백인들끼리 밀어주고 끌어주는 네트워크에서 소외돼 흑인들이 집단적으로 불이익을 보는 상황이 발생한다는 문제에서 비롯됐다. 이를 해결하려면 흑인을 억지로 비율을 정해 뽑으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면 그들끼리 밀어주고 끌어주면서 백인 주류 집단과 경쟁할 능력을 갖추게 되고, 그렇게 되면 지금은 흑인 학생들의 성적이나 과외 활동 등이 (사회적 여건, 가계 소득, 가정 환경 등으로 인해) 백인 학생들보다 뒤진다고 해도 그들의 후대에선 개선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 칼럼이 지적하는 문제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이 칼럼 얘기는 지금은 아시아계 학생들이 ‘실력대로’ 뽑으면 백인을 제치고 주류가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하버드에 불어서 아시아계 학생들이 역차별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퍼머티브 액션이란 게 미국 내 소수인종을 위한 백인에 대한 역차별 제도인데, 이 역차별 제도가 백인을 위해 소수인종(아시안)을 역차별한다는 이상한 얘기가 현실이 됐다. 많은 아시아계 학생들은 이미 경제적으로 윤택하고, 성공을 위한 인종그룹별 네트워크도 갖추고 있다. 그래서 아시아권 문화가 하버드를 점령하는 상황을 백인들이 두려워할 수 있다는 얘기아. 물론 이 또한 가정에 불과하고, 통계를 통한 추론일 뿐이다. 하지만 이 경우 어퍼머티브 액션은 아시아계에 대한 또 다른 차별이다. 인종 쿼타를 맞추기 위해 더 많이 뽑을 학생들을 억지로 줄여 뽑으면서 백인들에게는 상대적 우대를 해주는.

그래서 그냥 쿼타를 없애고 평등하게 가자는 아시아계의 주장은 과거 (흑인들 때문에 유태인 자리가 줄어든다고 생각해서) 어퍼머티브 액션이 필요없다고 주장했던 유태인들의 주장과 묘하게 비슷하다. 문맥 그대로 살피면 올바른 얘기가 인종적 맥락에서 살피면 올바르지 않은 얘기가 된 셈이다. 그런데 이런 게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절대적 진리라고 내가 뭔가를 주장해 봐야 사실은 자신의 입장에서만 진리에 불과한.

글 쓰던 선배

힘이 든다.

이 블로그에 IT 관련 얘기가 아닌 걸 쓰는 일은 아주 드문 일인데, 신해철 얘기를 썼던 게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또 IT는 오간데 없고 먼저 떠난 사람 얘기를 쓴다. 구본준 선배와의 인연은 신기하게도 처음과 마지막 대화가 다 기억난다.

“선배, 저 선배 팬이었어요. 이렇게 뵙게 되어 정말 영광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처음이었다. 2005년 대구였다. 장소도 잊혀지질 않는다. 구본준 선배가 본인이 정말 하고 싶어했던 경제부 산업담당 기자를 하던 때였다. 한국전자전 취재 장소였다. 사실 구 선배의 바이라인은 엄청나게 봤지만, 본인을 현실에서 만난 건 처음이었다.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취재하러 온 현장에서 후배 기자가, 그것도 다른 회사 기자가, 다른 사람들도 옆에서 듣는데 “팬이었어요”라고 하는 경우는 흔치 않으니까. 나중에 동아일보의 다른 선배가 전해 줬다. “너 구본준 선배 아니? 네 얘길 하던데.” 전략같은 건 아니었지만, 의도치 않게 그렇게 선배에게 내 이름을 알렸다.

“상훈씨, 내가 요새 그냥 노는데, 시간이 좀 많아. 같이 밥이나 먹자.”

그건 이전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받은 전화였다. 마지막 통화였다. 페이스북으로 안부를 묻고 소식을 들으니, 그냥 밥이나 먹는 일은 좀 뒤로 미뤄도 되는 줄 알았다. 그 때 빨리 약속 잡고 만나서 밥을 먹을 걸, 하는 흔한 후회를 나도 하게 될 거라곤 그때만 해도 몰랐다. 얼마전 선배의 페이스북에 밥 안 사주시냐는 댓글을 남길 때까지도 여전히 몰랐다.

난 동아일보에 있었고, 구 선배는 한겨레에 있었는데도, 묘하게 선배한테 많은 걸 배웠다. 열혈강호와 용비불패를 다룬 기사, 베르세르크를 소개한 기사, 미스터초밥왕 기사 등등 한달에 한두번은 꼬박꼬박 만화를 보면서 밤을 새곤 하던 1990년대 후반의 대학생에게 구 선배의 기사는 단비 같았다.

만화 담당 기자가 이러저런 신문사에 생기던 때였지만, 그 때 내게 ‘정말 만화를 좋아하는 기자’라고 느껴진 건 구선배 뿐이었다. 늦게 군대를 전역한 뒤 일자리를 찾을 때가 되었을 때, 언론사 시험을 봤던 것도 “만화 기사를 써도 기자를 할 수 있구나” 싶어서였다. 사건 취재하고, 정치인을 취재하는 건 애초에 관심이 없었다. 기자라는 직업을 존경하긴 했지만, 내가 그걸 하기엔 내 능력이 부족해 보였으니까. 그런데 뭔가 만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면서도 기자를 할 수 있고, 그게 나같은 독자들에게 정말 절실히 읽힐 거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그런 모델이 구 선배의 형태로 한국에 있었으니까.

많은 선배들이 내게 뭔가를 가르쳐줬다. 기사는 이렇게 쓰는 거라고 했고, 취재원은 저렇게 관리하는 거라고 했다. 그런데 지내보니 다 틀렸더라. ‘이렇게’대로 쓰는 정형화된 글은 독자들이 진저리를 냈고, ‘저렇게’대로 뻔한 수에 따라 관리당하는 취재원들은 기자를 더러운 벌레 보듯 보더라. 그냥 내가 좋아서 쓰는 글을 독자들도 좋아했고, 내가 좋아서 만나는 취재원들은 인생의 스승이 됐고 둘도 없는 친구가 됐다. 그리고 구 선배는 몰랐겠지만, 그렇게 좋아서 하는 법을 구 선배에게 배웠다. 사실 구 선배는 늘 “난 정말 글을 못 쓴다”면서 글 잘 쓰는 사람을 부러워했다. 말도 안 되게 글을 잘 쓰면서 그 소리를 하도 하니까 주위에서 정색을 하면서 “그건 겸손이 아니라 오히려 허영”이라고 뭐라고 했을 정도로. 그리고 취재원들하고는 같이 여행을 가거나, 심지어 함께 집을 짓고 옆집 이웃으로 살기도 했다. 그래서 구 선배 주위에는 글쟁이가 득시글거렸고, 전문가들이 도와줄 준비를 다 해놓고 우글대곤 했다.

그런 선배가 어느 날 저녁 자리에 날 불렀다. 이 사람 저 사람이 나올 텐데, 다 책 읽고 쓰는 걸 좋아하고, 좋은 분들이라며. 만나보니 정말 그런 분들이었다. 내가 그 자리에 같이 앉는 게 뭔가 자리의 격을 떨어뜨린다 싶어 보일 정도로.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구 선배가 “상훈씨 책은 정말 열심히 아주 수고롭게 취재해서 쓴 책이던데? 책 들여다보고 자료 모으는 게 아니라 진짜로 발로 뛰어서 쓴 거로구나 싶어서 대단했다”고 말해줬다. 서로 칭찬하는 의례적인 순간이 아니라, 그냥 최근 읽은 책들 얘기를 서로 죽 늘어놓던 와중에 지나가듯 툭. 구 선배는 그 자리에서 내 책을 내가 선물해 드리기도 전에 스스로 사서 정독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냥, 구 선배는, 늘, 자기가 진짜 좋아하는 사람에게 자기가 진짜 좋아한다는 걸 아무런 숨김 없이 그냥 말하곤 했다. 그래서 선배 주위에는 늘 좋은 사람들이 몰렸다. 그리고 나같이 별 볼일 없던 사람도 그 좋은 사람들 틈에 쉽게 섞여 들어가게 도와줬다.

“난 상훈씨가 어디서 뭘 하든 그냥 계속 후배라고 생각해. 우린 글 쓰는 사람이니까.”

그게 마지막으로 내가 구 선배와 얼굴을 맞댔을 때 나눴던 얘기였다. 사실, 그래서 힘든데도 꼭 이 글을 써야지 싶었다. 우린 어디서 뭘 하든 글 쓰는 사람이니까. 선배한테는 꼭 이렇게 작별해야 할 것 같아서. 눈물도 안 난다. 그냥 거짓말 같다.

윤윤수의 꿈

윤윤수라는 사람 알아요? 휠라를 인수하신 분. 처음엔  이탈리아 본사에 찾아가 ‘한국에서 당신 회사 제품을 좀 팔아보겠다’고 제안했다죠. 그런데 이탈리아 애들이 한국이란 듣도보도 못한 나라에서 그런 제안이 왔으니 무시한 거에요. 그러자 이번엔 포기하지 않고 휠라USA를 찾아가서 제안했어요. ‘미국에서 받은 제품 중 일부만 나한테 넘기면 내가 한국에서 팔아다 줄게’ 하고요. 미국인들은 이탈리아인들보다 도전적이잖아요. 새 기회가 생긴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어서 어디 한 번 해보라고 했죠. 그렇게 윤윤수가 휠라를 한국에 들여와서 팔기 시작하자, 그것도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팔자 갑자기 휠라USA 매출이 확 오르기 시작한 거에요. 이탈리아 본사에서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죠. 미국에선 한국의 윤윤수라는 사람 덕분이라고 했죠. 그 다음엔 윤윤수가 지사를 내고 휠라코리아를 세워서 이탈리아 본사 물건을 직접 팔았어요. 엄청나게. 그 뒤 아예 휠라 본사를 인수했어요. 한국에서 외국 기업 지사장을 한다면, 그 정도는 했으면 합니다. 지금도 직원들에게 말해요. ‘여러분, 그냥 외국 기업 직원으로 살지 말고 저와 함께 윤윤수의 꿈을 꿉시다’라고요. 한국에선 그렇게 할 수 있어요.

예전에 동창회가 있었다. 경영학석사 과정 동창회였으니 당연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드디어 동창 분 가운데 월급쟁이로 시작해 대표이사가 되신 분이 나오셨다. 외국계 기업의 한국 지사장. 즐겁게 술잔이 몇 순배 돈 뒤 한 말씀만 해주십사 부탁드리자 해주신 말씀이 위의 얘기다. 윤윤수의 꿈.

외국계 기업에 다니는 친구들은 높은 연봉과 좋은 근무조건, 합리적인 기업문화를 자랑하긴 하는데 가끔 불만을 내뱉는 경우가 있다. 그 불만의 대부분은 ‘본사가 시키는대로’에서 시작된다. 사람들은 늘 자기주도적으로 일할 때 가장 행복하게 마련인데 언어장벽이 있고, 시차 탓에 의사소통까지 더딘 먼 곳의 본사 사람들로부터 휘둘린다는 느낌을 받으면 행복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거다. 그러면 결국 그냥 주는 돈이나 열심히 받고, 시키는 일이나 하자는 수동적 생각을 하기 쉬워진다. 그런데 그런 환경에서 누군가는 자족하는 대신 상자를 벗어나서 생각한다. 그게  ‘윤윤수의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