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허핑펀포스트가 좋은 점은 아마도 이렇게 세계 각국의 허핑턴포스트 기사를 번역할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오른쪽 클릭을 막아놨네. 바보같은 웹사이트다. 이 글은 내게는 ‘마스터 키튼’으로 처음 접하게 된 우라사와 나오키의 인터뷰. 많은 사람들은 그냥 친구가 나오는 ’20세기 소년’ 혹은 ‘몬스터’로 기억하는 모양이지만, 나는 아무래도 마스터 키튼이 좋다. 인디아나 존스의 일본식 짝퉁이든 말든.

물론 만화가 무료가 되었다고는 해도 만화를 배급하는 회사가 작가에게 돈은 지불하지요. 하지만 그건 이 문제와 관계가 없습니다. 만화가와 독자 사이에 ‘대가를 내고 구입한다’는 계약이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대가를 내가 구입해야만 작품에 대한 경의랄지, 역으로 말하면 불평할 수 있는 권리랄지, 여러 가지가 발생하는 거예요. 근데 그게 무료라면 뭐랄까 그 ‘당연한 관계성’이 생기지 않는 느낌이 듭니다.

돈을 낸 사람에게는 계속 불만을 말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무료로 볼 거라면 궁시렁궁시렁 하지마’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본래 작가에게 있어서 궁시렁궁시렁 얘기해주는 독자의 존재란 매우 중요해요. 물론 ‘재미있어요’라고 말해주면 기쁘지만. 그러니까, 얼마 되지 않는 돈이라도 지불하고 산 의견이란 건 무게가 다르다는 이야깁니다. 만화가와 독자의 위치가 이상하게 대등한 느낌이 듭니다.

종이책 밖에 내지 않는 구식 아저씨지만, 계속 이렇게 해줬으면. ‘빌리 배트’도 그렇고, ‘플루토’ 같은 리메이크 만화도 역시 종이책이어서 좋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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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가 좋아졌나?

시리가 좋아졌다고 애플 전문 블로거 존 그루버가 한마디 한 덕분에 스토리파이 뉴스레터에서 관련 내용을 소개해줬다. 트위터를 통한 대화들이 나오는데, 위에 링크한 존 그루버의 ‘시리 vs. 구글 나우’ 속도 비교에 대해서 “유럽에선 더 빠른데?”라면서 아이폰으로 비디오와 또 함께 비교한 내용이 재미있다. 잠시 나도 이 비디오에 내 아이폰을 대놓고서 “한국에선 더 빠른데?”라고 하려다 그냥 멈췄다.

시리는 그루버의 말 마따나 최근에 많이 좋아졌는데, 일본 아이폰 유저로 짐작되는 사람이 “일본에선 여전히 개판”(Japanese Siri still sitnks.)이라고 한 것처럼 한국에서도 불만을 가진 사람이 여전히 많다. 게다가 구글 한국어 음성인식이 워낙 좋아서 비교되기도 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개인적으로 시리를 훨씬 많이 사용한다. 안드로이드폰을 쓰다가 다시 아이폰으로 돌아온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차에서 구글나우로 할 수 있는 일이 사실상 거의 없어서였다. 시리는 “음악 틀어줘”, “와이프한테 전화해줘”, “김기사 열어봐”, “이 노래 건너뛰자” 등을 다 알아듣는다. 구글 나우는… “OOO에게 전화”라고 딱딱한 명령어를 입력해야 하고, 알아듣는 경우도 적다. (무엇보다 “졸린데 재미있는 얘기 좀 해봐” 이런 장난도 칠 수 없다. 시리는 이런 경우… 정말 대답을 제대로 한다.)

시리는 정말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 그런데 그냥 좀 멍청한 말귀 못 알아듣는 답답한 친구랑 얘기하는 느낌이다.(좀 심하게 답답한) 구글 나우는 굉장히 정확하게 내 말을 알아듣는다. 그런데 손으로 입력해야 할 걸 입으로 입력한다는 느낌 뿐이다. 똑똑한 기계랑 얘기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운전하는 동안 답답한 친구와 함께 갈 것인지, 기계랑 갈 것인지 생각해 보면 난 아무래도 친구가 좋더라.

아래는 관련 스토리파이.

내가 바로 샤를리다. #JeSuisCharlie

우리는 협박에 맞섰습니다. 왜냐하면 때때로 공격적으로 들릴 수 있을지라도,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사는 세상을 좀 더 즐겁고 좋은 곳으로 바꿔 나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
저는 피해자들과 같은 생각을 합니다. 그들의 가족들은 물론 프랑스인들, 그리고 나아가 자신의 생각과 견해를 다른 이들과 나누려는 사람들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심지어 용기가 있어야만 이런 견해를 나눌 수 있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프랑스의 풍자 주간지 ‘샤를리엡도’에 대한 비극적인 총격 테러에 놀란 세계가 “내가 바로 샤를리다”라면서 희생자를 애도하는 동안, 다른 한편에선 테러는 잘못됐지만 그래도 샤를리엡도 또한 너무한 게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난 개인적으로 표현이 어떻게 됐든지, 그것이 표현의 영역일 땐 또 다른 표현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본다. 총칼이 아니라.

그런데도 뉴욕타임즈의 칼럼니스트인 데이빗 브룩스 같은 사람조차 샤를리엡도 테러에 대해 ‘나는 샤를리가 아니다’라는 주장까지 하고 있다. 테러는 반대하지만, 샤를리엡도도 종교에 대해 잘못된 접근을 했고 이걸 사회 전체가 ‘내가 샤를리다’라면서 지켜줄 건 아니란 얘기다. 칼럼니스트보다 저커버그가 낫다. 우리가 표현의 자유에 대해 얘기할 때 지켜줘야 하는 건 잘 포장된 얌전하고 정선된 이야기가 아니다. 이게 과연 우리가 지켜줘야 하는 것인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 애매모호한 바로 그 논쟁적인 지점이야말로 표현의 자유로 보호돼야 하는 부분이다.

2015년 새해 맞이

새해에 뭔가 다짐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다가 지난해 교황이 방한하셨을 때 썼던 글을 다시 읽게 됐다. 생각해보니 큰 다짐이 필요한 세상이 아닌 것 같다. 좋은 가르침을 다시 새기고 제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게 아닐까 싶어서 다시 여기 옮겨둔다. 불필요한 오해를 막기 위해 미리 밝혀두자면 난 기독교인이 아니다. 불교인도 아니고 이슬람교인도 아니다. 난 세상 모든 신들을 믿고, 그 모든 종교를 존중한다. 천년을 넘게 이어진 세상 모든 가르침에는 배울 점이 참 많으니까.

어쨌든 다른 종교와도 이러저런 인연이 있어서 관심을 갖게 됐고 공부도 해보게 됐지만, 그 중에서도 기독교와의 인연은 우연하게 시작된 데다, 그 경험 또한 아주 강렬했다. 시작은 성경이었다. 군대에 가기 직전 마침 소설처럼 고쳐 쓰인 현대어로 된 구약을 읽고 있었다. 보면서 한심했다. 이 야훼라는 신은 변덕이 죽끓듯해서 뭘 해라, 하지 말아라 하는 얘기가 시시때때로 변했고, 인간들이 큰 잘못을 한 것 같지도 않은데도 툭하면 세상을 멸망 직전으로 몰고 가는 천벌을 내려대곤 했다. 노아의 가족들만 빼고는 세상을 물에 잠기게 한다거나, 바벨탑 좀 지었다고 사람들의 말을 서로 통하지 않게 만들어버린다거나, 이집트인들이 유대인들을 구박했다며 이집트인들을 몰살시키려 한다. 소돔과 고모라야 소돔과 고모라니까 그렇다쳐도.

구약을 읽고서 이런 신을 믿는 사람들은 도대체 뭘 믿고 살아가나 싶었다. 신을 믿고 의지하다보면 불벼락을 맞을 것만 같은데. 그리고나서 군대에 갔다. 곧이어 책이 없는 환경과 마주쳤다.(이거 진짜 괴롭다.) 유일한 책은 성경과 금강경. 그래, 구약은 읽었으니 이 기회에 신약이나 읽어보자 싶어서 집어 든 게 공동번역성서(천주교 개신교 공동 번역)였다. 현대어로 성경을 번역했기 때문에 이 또한 소설을 읽듯 읽기 편했다. 그리고 예수의 삶을 읽으면서 난 이 종교에 완전히 매혹됐다. 아마도 이등병 시절에 신약을 읽어서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신약에서는 구약의 신은 오간 데 없었다. 예수는 인간 세상으로 내려온 신의 아들이자 동시에 사람의 아들이었는데, 그는 세상에 사람의 육신을 빌어 등장한 뒤 인간의 목소리로 하늘의 가르침을 전했다. 그가 했던 말은 오직 하나.

“이제부터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서로를 사랑하라.”

신의 아들이 직접 입을 열자 복잡한 규칙을 정했던 변덕스런 야훼의 모든 모습이 사라져 갔다. 그 이상한 신의 모습은 선지자라는 사람들이 각자 자신들이야말로 신의 뜻을 안다며 떠들어댔기 때문에 생겨났던 얘기였다. 신의 아들이 직접 신의 뜻을 얘기해 주니 모든 논쟁은 정리됐다. 예수의 가르침은 지극히 단순했다. 서로를 사랑하라는 것. 나머지 가르침은 그 아래의 하위 조항 정도에 불과했다.

신약에 따르면 사람들이 서로를 사랑하려면, 그것도 진정으로 사랑하려면 반드시 해야 하는 게 있다. 사랑받지 못하고 소외당하는 약한 곳, 낮은 곳부터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잘 살고 편안한 힘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건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할 수 있으니까 온기가 없는 곳부터 돌봐야 한다. 그래서 예수는 아흔아홉마리의 어린양을 놓아두고 굳이 길 잃은 한 마리의 어린양부터 찾아가라고 가르쳤다. 또 원수를 만나도 용서하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스스로 로마 제국 아래에서 고생하는 평민들을 찾아갔고, “(신의 아들인 내가) 너희의 죄를 용서했으니 너희도 서로를 용서하라”는 말을 했던 것이다.

기독교 교리는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이등병 때 계속 부대 성당에 다니면서 수녀님들과 천주교 교리도 공부하고 성경도 꼼꼼히 읽었는데 이 단순한 얘기를 다양한 사례로 변주해 설명해 주고 가르쳐 주는 과정이 곧 기독교인이 되는 과정이었다. 세례도 받고 싶었지만, 교회에 세번인가 나가면 세례를 주는 개신교와는 달리 천주교 성당에서는 교리공부를 몇 차례 했다고 교인 자격을 쉽게 주지는 않았다. 결국 그래서 기독교인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 때 했던 공부만큼은 그 과정 자체가 큰 위안이 됐다. 세상 전체가 이등병인 나를 괴롭히는 것 같은 시절이었는데도, 교회에만 가면 성경과 신부님의 설교와 우리가 부르는 찬송이 모두 “기독교는 너처럼 약한 사람을 제일 우선하는 종교”라고 반복해서 얘기해 줬다.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세계적인 찬사와 함께 한편에서는 온갖 비난도 일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교황이 성경에서 인정하지 않는 동성애를 인정하는 발언을 했고,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도, 야훼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도 양심에 따라 살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주장한데다, 공산주의자처럼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있다는 게 문제가 된다고 했다. 그것도 기독교인들이 그를 비난한다고. 내가 그들에게 되묻고 싶다. 성경은 읽어 봤느냐고.

지난해 교황의 공항 영접에는 평신도 가운데 “복자로 선포되는 시복대상 후손들과 함께 세월호 참사 희생자 유가족, 새터민, 외국인 이주노동자, 범죄피해자 가족모임 회원, 장애인, 중·고교생, 가톨릭노동청년” 등이 참석했다. 또 방한 기간 동안 교황은 “세월호 참사 생존자와 유족,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를 기다리며 오랜 세월 고통 속에 살아 온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용산참사 유족,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제주 해군기지와 송전탑 건설 반대 운동을 하는 강정마을과 밀양 주민들”을 만났다. 예수께서는 교인들에게 그렇게 살라고 했고, 교황은 그렇게 살았다. 사실 다른 종교의 가르침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부자와 권자를 위한 세속 교권은 있어도, 신들의 음성은 늘 빈자와 약자를 향해 있기 마련이었다.

2014년은 참 힘든 한해였다. 잔인하리만치 가슴아픈 일들이 주위에 많았고, 수많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좋은 일들도 많았지만, 이렇게 힘들었던 한 해가 또 있었나 싶을 정도로 우리 모두에게 안 좋은 기억부터 생각났던 한 해였다. 2015년은 좀 더 나아지기를. 그리고 지난해의 교훈과 가르침에서 조금씩 더 성장하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반다이와 손오공, 씁쓸한 차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우리가 어릴 적엔 늘 외제가 더 좋았다. 과자도 미제 과자가 더 맛있고, 장난감도 일제 장난감이 더 좋았고, 기계도 독일 기계가 최고였다. 그래서 국산품 애용 운동도 있었고, 품질 개선을 위한 각종 검사필증이 생기기도 했다.

다 옛말인 줄 알았다. 지금은 세계에서 제일 좋은 스마트폰을 만드는 회사가 한국 회사고, 세계에서 제일 재미있는 게임을 만드는 게임회사 가운데 몇 곳이 한국에 있으며, 세계에서 제일 재미있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도 한국에 있으니까. 그런데 크리스마스를 맞아 선물 복 터진 아들의 장난감 상자를 뜯으면서 씁쓸해졌다.

아직도 일제가 더 좋잖아!

뭐라고 할 말이 없다. 올 크리스마스 부모들의 애간장을 녹였던 다이노포스 시리즈와 역시 아이들에게 인기였던 카봇 시리즈 장난감 몇 개가 아들 손에 들어갔다. 사진은 그 중 일반적인 모델인 파라사건(일본 반다이 완구)과 카봇 에이스(한국 손오공 완구)의 패키지 뒷면이다. 모두 정해진 기준에 따라 표시해야 할 내용을 표시해 놓았다. 주의사항과 상품명과 제조자, 제조국가 등.

차이가 좀 있다. 일제 다이노포스는 제조국이 태국이다. 원가를 낮추려면 당연히 아웃소싱을 할 수밖에. 그리고 한국제 카봇은 제조국이 대한민국이다. 그런데도 태국 제조가 한국 제조보다 낫다. 사실 사람 손보다는 품질 관리의 문제니 그렇다치고 좀 더 살펴보자. 다이노포스의 제조사는 반다이산업이고, 카봇의 제조사는 초이락컨텐츠팩토리다. 앞서 말했듯, 품질은 확실히 반다이 제품이 더 낫다. 물론 값에 차이는 있다. 반다이 제품이 전반적으로 비슷한 크기의 제품일 경우 50% 정도 더 비싸다. 도대체 왜 그럴까. 엄청나게 많은 분야에서 한국산이 대부분 일본산에 크게 뒤지지 않는 품질로 제품을 만들고 있는데 왜 아이들에게 돈을 아끼지 않는 부모로 가득찬 한국에서 장난감 품질은 내가 어릴 때와 똑같은 격차를 그대로 갖고 있는 듯 보이는 걸까.

궁금해서 두 회사를 잠깐 검색해 봤다. 손오공과 반다이는 둘 다 한국과 일본을 대표하는 어린이 완구 회사다. 손오공은 수도꼭지를 만들다가 끈끈이 장난감으로 대박을 낸 뒤 이후 완구와 게임, 애니메이션 제작 등으로 사업 영역을 확대했다. 반다이는 전후 양철깡통 장난감 등으로 인기를 끌다가 건담의 프라모델을 제작하면서 그게 엄청난 히트를 쳐서 성공한 회사다. 반다이 역시 나무코(Namco)와 합병을 통해 게임 사업 쪽을 제대로 확장했고, 애니메이션과 파워레인저 같은 특수촬영 어린이드라마 등도 제작한다.

반다이의 지배구조는 심플하다. 반다이와 나무코 두 회사를 반다이나무코홀딩스라는 지주회사가 지배한다. 반다이는 완구 제조 쪽으로, 나무코는 게임 쪽으로 각각 특화돼 있으며 서로의 지적재산을 활용해 영역을 확장한다. 반면 손오공은 여기서부터 뭔가 이상하다. 상자를 보면 나오듯 손오공의 완구 제조를 초이락이 맞는다. 초이락컨텐츠팩토리는 이 기사에 따르면 손오공 창업자 최신규 회장의 아내와 아들이 경영한다고 했다. 손오공이 계열사에게 제조를 맡기는 셈이다.

돈 되는 카봇 완구에 더해 손오공이 돈을 쓸어담는 캐시카우 역할을 한다는 리그오브레젠드 매출은 손오공IB라는 또 다른 자회사의 매출로 잡힌다. 연결재무제표에 반영되는 지분법손익 외에는 구체적인 현황을 살필 도리가 없다. 코스닥 상장사에 한국 대표 완구업체인데 도대체 뭘 어떻게 장사를 하고 있는지 투자자의 입장이라 생각하고 살펴보려 해도 알 수 있는 게 없다. 심지어 초이락컨텐츠팩토리는 말 그대로 완구 제조가 아니라 카봇 애니메이션 같은 콘텐츠 제작사다. 그런데 왜 여기서 제조를? 그리고 최신규 창업자는 손오공 대표이사를 물러나 손오공IB에 전념한다고 했고, 손오공은 손오공IB의 채무보증도 서주고 구로구 대지도 손오공IB에게 판매한다. 왜 자꾸 상장법인인 모회사 손오공의 영역은 줄여가면서 비상장 자회사 쪽 거래량을 늘리고, 창업자 가족들도 그쪽으로 움직이고 있는 걸까?

반다이는 좀 다르다. 이 회사는 파면 팔수록 이상한 짓을 한다.

이건 반다이 프라모델 공장의 유니폼이다. 모든 사원들이 출근하면서 입는. 그런데 아래 사진과 비교해보자. 어릴 적 건담을 좀 봤다면 모두 알고 있을 그 군복이다. 아무로 레이가 속해 있는 지구연방군 군복.

손오공의 재무제표를 보면 사업분야는 크게 세가지로 나뉜다. 완구 및 게임, 캐릭터 로열티, PC방 수수료(LoL). 완구와 게임이 분리되지 않고 공시된다. 비중은 약 84:1:15 정도. 반면 반다이의 재무제표는 토이호비(Toy-Hobby),  콘텐츠, 어뮤즈먼트 시설 사업으로 나뉜다. 비중은 4:5:1 정도. 이것도 이상하다. 손오공은 왜 이렇게 분류하는 걸까.캐릭터 수입은 의미없는 수준이고, PC방 수수료는 라이엇게임즈와의 계약에 종속되는 불안한 사업인데. 반다이는 이해가 간다. 완구류 제조와 콘텐츠 제작은 두개의 중심축이 되는 것이고, 어뮤즈먼트 시설이란 오락실/빠찡코 같은 게임센터 사업이라 다른 두 축과 묶이기 힘든 게 당연하기 때문이다.

쓸데없이 길게 썼지만, 결국 하고 싶었던 말은 하나다. 본질에 집중하는 회사가 좋은 제품을 만든다. 반다이 프라모델을 사느라 한국 아빠들이 대형마트 매대에서 번호표까지 받아가며 줄을 서야 하는 현실은 좀 짜증나지만, 내가 아들 선물을 골라줘야 하는 나이가 된 지금, 국산품 애용하는 마음만으로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건지도 잘 모르겠는 회사의 제품을 사고 싶지는 않다.

우버엑스 업데이트

우버가 화제가 되는 송년 시즌이라 다시 우버로 검색하는 분들이 많으신 것 같아 업데이트를 하는 게 예의라 생각해 짧게 업데이트. 아니면 내가 여전히 우버엑스 욕하는 사람이 될 듯 싶어서. 결코 그렇지 않다.

최근 송년회 시즌이라 택시는 여전히 승차거부를 밥먹듯 하기 때문에 또 우버를 탔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역시 좋았다. 우버블랙은 당연히 좋았고, 우버엑스도 유료화가 되면서 더 좋아졌다.(이걸 타면 탄 사람도 처벌당하는 건가?) 우버엑스는 송년회 귀가길 전쟁 때 탔고,(20분을 택시 기다리다 지쳐 부른 우버엑스가 5분도 안 돼 도착했다) 우버블랙은 지방 갔다 올라온 심야 서부역 앞에서 탔다. 택시기사들이 줄을 서서 “노원 방향 4명 모이면 만원씩에 갑니다, 줄서서 기다리시면 이 추위에 한시간은 서계셔야 할 거에요”라고 협박을 하더라. 서울시는 이런 것부터 단속해야 하는 것 아닌가? 어쨌든 이 상황에서 우버앱을 켰더니 바로 코앞에 우버블랙이 지나가던 중. 한시간은 커녕 1분만에 잡아타고 집에 갔다. 비싸기야 하지만, 한시간을 기다리느니…

최근의 주요 변화

  1. 우버엑스는 무료에서 유료로 전환. 이것 때문에 서울시가 내년부터 우버 불법운행 신고 포상금을 늘리는 이른바 ‘우파라치’ 제도를 실시한다고. 벌금도 대폭 늘리고. 이런 걸 뭐라고 하나, 표적 수사? 어쨌든 승객 입장에선 우버를 잘 타고나서 탑승일시와 차량번호만 증명하면 현금도 손에 쥐게 되는 셈. 승객들은 신고해보고 싶을 듯.

  2. 어쨌든 이런 결과를 예상했는지, 우버엑스는 유료 전환과 함께 단골 손님들에게만 우버엑스 활성화. 신고하고 포상금 노릴 손님 대신 실제로 쓸 손님들만 받겠다는 뜻. 그리고 기사들도 대거 정리. 얌체짓하는 못된 기사들 얘기를 앞에 썼는데 그런 사람들이 우선 정리된 듯. 최근 타 본 우버엑스는 우버블랙만큼 프리미엄 서비스는 아니라도, 값싸고 친절해서 아주 기분좋았음. 잡히기도 잘 잡히고.

  3. 결국 우버는 서비스를 개선했고, 서울시는 소비자 만족도가 높아지는 서비스를 때려잡는 위치에 서게 됐음. 우버의 좋은 전략적 판단이 될 거라고 생각. 법규를 무시하는 잘난 외국 기업보다, 소비자가 사랑하는 서비스를 하려고 했는데 구시대의 규제로 처벌받는 기업이 되는 편이 장기적으로 훨씬 이익. 진작 이런 포지션을 취했어야 했는데.

  4. 아니나 다를까, 오늘 우버 한국지사장이 회원들에게 편지를 씀. 서울시 조치에 반대해달라는 호소. 이런 여론전은 먼저 약자가 되어 탄압받는 쪽이 지지를 이끌게 마련인데, 서울시는 택시업계가 강자가 되는 송년회 시즌에 사용자가 만족도가 높아지는 우버를 적으로 돌리고 탄압을 하는 입장이 됐음.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된 전략. 어차피 조례가 효력을 발휘하려면 내년이 되어야 하는데 이게 이렇게 서둘 일이었을까 싶음. 서둘 거라면 아예 11월에 통과시켰어야지.

결론은 우버엑스를 좀 더 두고봐야지 싶다. 아직 몇 가지 문제는 남아있는데, surge pricing, 그러니까 택시의 할증 같은 할증요금 제도가 대표적이다. 우버는 할증 구간에서는 확실하게 예상요금을 보여주고 할증 경고를 하는데,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이걸 잘 이해못한다. 여기에 대고 지금까지 우버의 방식은 “너네가 이해 못했으니, 너네 잘못” 이런 식에 가까운데, 이건 좀 곤란한 것 아닌가. 물론 이해 못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그건 미국식이고, 한국에선 더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방법이 있어야 한다. 안 그러면 안 그래도 적이 많은 우버가 이 할증 문제 하나로만 줄기차게 욕을 먹을 게 뻔하다. 이미 미국에서도 문제가 됐던 내용이고. 물론 나는 할증을 직접 겪어본 적이 없이 계속 말로만 들어서 사실 판단을 잘 못하겠다. 이미 이런 기사는 나왔다.

또 하나는 안전. 우버 기사들은 난폭운전을 일삼는 일부 택시기사들과 비교하면 훨씬 안전하게 운전하기 때문에 우버엑스 기사들을 신뢰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우버기사가 난폭운전하면 나중에 영수증 지도의 운행구간 정보로 다 확인 가능해진다.) 문제는 동승자에 대한 보험적용 여부다. 언제라도 사고의 위험은 있는 법이고, 방어운전을 체질화한 베스트 드라이버도 사고는 내게 마련이니까. 아직 우버는 이런 부분에 대해 명확한 해명이 없는데, 사실 서울시는 이런 문제부터 해결해야 하는 것 아닐까. “너넨 보험 안 되니까 불법”이라고 할 게 아니라, “너희도 이렇게 해서 보험을 완비해라, 대신 너희는 택시와 달리 라이센스가 없으니 보험료를 비싸게 내”같은 식으로 접근하면 잘 풀릴 텐데 왜 그저 때려잡으려고만 하는지. 당장 나부터 불만이다.

차별과 역차별과 역차별에 대한 차별

최근 아시아계 응시자들이 하버드에 소송을 제기했다. ‘신입생 인종 비율 맞추기’가 하버드의 관행이라는 강력한 증거가 제출됐다. 각 인종·민족 집단의 입학생 수가 매해 현저히 비슷한 비율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자료다. 아시아계 입학생 수가 유난히 높은 해가 드물게라도 있으면 그다음 해부터는 아시아계가 눈에 띄게 줄었다는 통계도 있다.

뉴욕타임즈 칼럼을 번역한 중앙일보 기사. 이 기사에 등장하는 어퍼머티브 액션(Affirmative Action)이란 말을 처음 들은 건 대학생 시절 캐나다에 갔던 때였다. 긍정적인 의미에서 큰 충격을 받았던 개념이었다. 북미가 선진 사회라고 놀란 건 아니고, 이들의 생각에 대해 놀랐다. 우리는 모두 우리의 편견에 의해 서로를 차별하게 마련이니, 차별을 줄일 수 있도록 우리가 우리를 역차별해서 평등을 만들어 보자는 사회적 약속을 만들었던 것이니까.

그러니까 애초에 이 제도는 흑인 학생이 좋은 대학에 입학하지 못하면 사회의 높은 지위도 차지하기 힘들고 그러면 이 흑인 학생들은 백인들끼리 밀어주고 끌어주는 네트워크에서 소외돼 흑인들이 집단적으로 불이익을 보는 상황이 발생한다는 문제에서 비롯됐다. 이를 해결하려면 흑인을 억지로 비율을 정해 뽑으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면 그들끼리 밀어주고 끌어주면서 백인 주류 집단과 경쟁할 능력을 갖추게 되고, 그렇게 되면 지금은 흑인 학생들의 성적이나 과외 활동 등이 (사회적 여건, 가계 소득, 가정 환경 등으로 인해) 백인 학생들보다 뒤진다고 해도 그들의 후대에선 개선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 칼럼이 지적하는 문제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이 칼럼 얘기는 지금은 아시아계 학생들이 ‘실력대로’ 뽑으면 백인을 제치고 주류가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하버드에 불어서 아시아계 학생들이 역차별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퍼머티브 액션이란 게 미국 내 소수인종을 위한 백인에 대한 역차별 제도인데, 이 역차별 제도가 백인을 위해 소수인종(아시안)을 역차별한다는 이상한 얘기가 현실이 됐다. 많은 아시아계 학생들은 이미 경제적으로 윤택하고, 성공을 위한 인종그룹별 네트워크도 갖추고 있다. 그래서 아시아권 문화가 하버드를 점령하는 상황을 백인들이 두려워할 수 있다는 얘기아. 물론 이 또한 가정에 불과하고, 통계를 통한 추론일 뿐이다. 하지만 이 경우 어퍼머티브 액션은 아시아계에 대한 또 다른 차별이다. 인종 쿼타를 맞추기 위해 더 많이 뽑을 학생들을 억지로 줄여 뽑으면서 백인들에게는 상대적 우대를 해주는.

그래서 그냥 쿼타를 없애고 평등하게 가자는 아시아계의 주장은 과거 (흑인들 때문에 유태인 자리가 줄어든다고 생각해서) 어퍼머티브 액션이 필요없다고 주장했던 유태인들의 주장과 묘하게 비슷하다. 문맥 그대로 살피면 올바른 얘기가 인종적 맥락에서 살피면 올바르지 않은 얘기가 된 셈이다. 그런데 이런 게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절대적 진리라고 내가 뭔가를 주장해 봐야 사실은 자신의 입장에서만 진리에 불과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