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스컬리

1983년, 애플은 펩시의 사장이었던 존 스컬리를 영입합니다. 존 스컬리에게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죠. 굴지의 음료 회사였던 ‘펩시’의 사장에게, 차고에서 창업한지 몇 년 되지도 않은 회사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하다니요. 하지만, 결국 스컬리는 자리를 옮기고 맙니다. 스티브 잡스 덕분이었죠. 스컬리는 스티브와 처음 만났던 때를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스티브가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리곤 저를 노려보며 말하더군요. ‘그럼 당신은 계속 거기에서 설탕물이나 팔고 있을 거요, 아니면 그곳을 그만두고 나와 함께 세상을 바꿔볼테요?’ 그래서, 전 바로 스카우트되기로 결심했죠."

하지만 당시에는 스티브도 몰랐습니다. 이 자신만만하던 젊은 청년 사업가는 결국 나중에 스컬리에 의해 애플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어쩌겠어요. 제가 사람을 잘못 뽑았던 거죠. 스컬리는 제가 10년 동안 애플에서 일궈낸 모든 것들을 파괴했어요."

이 후, 스티브가 다시 애플에 돌아올 때까지 걸린 시간은 무려 11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시기를 스티브의 고난의 시기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아마도 그 과정이야말로 철없는 젊은 벼락부자를 노련하고 훌륭한 사업가로 성장시킨 교육의 시간이었을 겁니다. 마치, 예수가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에 맞섰던 것처럼 말이죠.

한편으로 스컬리 덕분에 오늘의 애플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잡스가 스컬리 때문에 회사에서 쫓겨났을 때, 스컬리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곤 했습니다.

"애플과 보이스카우트의 차이점은 단 하나 뿐이다. 보이스카우트는 어른이 감독한다는 것. 이제 애플도 간신히 보이스카우트를 따라잡게 됐다."

스티브에게는 심한 말이지만, 사실 스컬리의 경력을 생각한다면 이는 매우 적절한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특히나 그가 펩시에서 이뤄낸 성과를 생각한다면 말이죠. 1970년 펩시에 입사한 스컬리는 1983년 애플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펩시를 미국 2위의 음료 회사로 키워냅니다. 스컬리의 마케팅 전략은 탁월했죠. 블라인드 테스트를 통해 소비자에게 코카콜라와 펩시콜라 사이에 더 맛있는 걸 고르게 하고는 펩시가 더 많이 나왔다는 사실을 대대적으로 광고한 겁니다. 캠페인의 이름은 ‘펩시의 도전'(the Pepsi Challenge)이었습니다. 펩시의 최연소 부사장, 최연소 사장으로 승승장구하던 스컬리가 애플로 옮기자 매스컴은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이때만 하더라도 스티브 잡스와 존 스컬리의 불화라는 건 떠올리기조차 힘들었죠.

스컬리의 마케팅 전략은 애플의 위치와 딱 맞았습니다. 마침 애플은 IBM이라는 골리앗에 맞서는 다윗의 이미지를 가져왔고, 이건 또 하나의 ‘펩시의 도전’이었습니다. 스컬리는 매킨토시를 주류에 도전하는 다윗으로 포지셔닝시켰고, 대중은 이 이미지에 열광합니다. 스티브 역시 다윗의 이미지였죠. 마케팅에는 딱이었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죠. 결국 불화가 시작됐고, 두 사람은 서로 등을 돌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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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 래스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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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개인용 컴퓨터 가운데 95% 이상이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즈 운영체제를 사용합니다. 이런 압도적인 점유율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IBM 덕분이었습니다. IBM이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고서는 그 규격을 공개하자 미투(Me, too) 제품이 쏟아져 나왔고, 이들 대부분이 모두 마이크로소프트의 MS-DOS를 사용하기 시작했던 것이죠. 이 마이크로소프트 왕국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바로 매킨토시입니다. 컴퓨터와 운영체제 소프트웨어 모두 말이죠.

매킨토시가 탄생한 것은 1984년입니다. 당시 스티브 잡스는 매킨토시 발표회장에서 매킨토시로 하여금 합성된 언어로 말을 하게 합니다. 매킨토시는 뭐라뭐라 한참 떠들다가, 마지막에 한 마디를 하죠. "그럼 여러분에게 제 아버지와 같은 분을 소개해 드리죠. 여러분, 스티브 잡스입니다."

이때 뒤에서 묵묵히 분노를 참고 있었던 사람이 있습니다. 매킨토시의 ‘진짜 아버지’였던 제프 래스킨이었죠. 스티브 워즈니악이 개발한 ‘애플II’를 자신이 거의 다 개발한 것처럼 만들어버린 경우와 마찬가지로, 스티브 잡스는 제프 래스킨이 세워 놓은 매킨토시 프로젝트를 송두리째 빼앗아 버립니다.

매킨토시는 ‘혁신’과 ‘최초’로 분칠된 아리따운 제품이었습니다. 스티브는 매킨토시에 환상적인 GUI(Graphic User Interface)와 마우스라는 혁신적 기능이 포함된 최초의 퍼스널 컴퓨터를 만들었다고 큰 소리를 쳤죠. 커서로 명령어를 입력해 작동시켜야 하는 IBM 컴퓨터에선 꿈도 못 꿀 일이라는 비교는 말할 것도 없었고요. 하지만 이 모든 개념은, 이미 제록스의 팰로앨토 연구소에서 다 만들어놨던 것입니다. 스티브가 한 일이라고는 개발자들을 데리고 제록스 연구소에 견학을 간 뒤, "저런 걸 만들라"고 자신의 개발팀을 닥달한 것 정도였죠.

게다가 이 아름다운 컴퓨터를 구상했던 것은 제프 래스킨이었습니다. 래스킨은 이미 빌 앳킨슨, 버렐 스미스 등 재능은 뛰어났으나 괴짜였던 직원들을 한 데 모아 환상적인 팀을 만들어놓았어요. 래스킨이 이 팀을 구성했을 때, 스티브는 이들을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스티브는 그 때 ‘리사’라는 자기만의 프로젝트에 집중하고 있어서 매킨토시는 쓸데없는 일 정도로 여겼던 겁니다. 래스킨의 팀은 회사 구석의 작은 빌딩에서 눈에 띄지 않게 매킨토시를 개발하고 있었죠. 그러다 리사 프로젝트가 점점 좌초하기 시작합니다. 스티브는 뭔가 획기적인 전환점이 필요했죠. 그래서 스티브는 매킨토시 팀에 눈을 돌립니다. 창업자이자 대주주였던 스티브가 매킨토시의 팀장을 맡겠다는데, 래스킨에겐 방법이 없었습니다. 회사를 떠날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결과적으로 세상에 등장한 매킨토시는 래스킨이 초기에 꿈꿨던 매킨토시와는 많이 달라졌다고 합니다. 래스킨이 원했던 새로운 퍼스널 컴퓨터란 오늘날의 PDA처럼 텍스트를 방향키로 오가며 조작할 수 있는 식의 제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토스터’처럼 빵을 넣으면 구워져 나오는, 매우 사용하기 편리하고 단순한 기계가 래스킨의 목표였죠. 하지만 스티브는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에게는 ‘세상을 바꿀 멋진 기계’가 필요했습니다. 쉽고 편한 것보다는 ‘COOL’한 것이 중요했죠. 결국 매킨토시에 멋진 케이스와 화려한 그래픽을 덧붙인 것은 스티브였습니다. 스티브는 래스킨이 만든 맛있는 케잌에 장식을 올리고 포장을 했던 거죠. 그러니까 래스킨이 착하고 성실한 배우자를 구하는 모범생이었다면, 스티브는 결혼생활이야 편하든 말든 관계없이, 함께 있으면 가슴이 뛰고, 데이트를 하려고 고급 레스토랑에 들어서면 식당의 모든 손님들이 자신들을 쳐다보게 할 정도로 매력적인 연애 상대를 찾는 바람둥이였던 겁니다.

제프 래스킨은 2005년 사망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가 몸 담았던 전문 분야는, 사용자 인터페이스 제작이었죠. 쓰기 편하고, 사용하기 쉬운 모든 제품을 구상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습니다. 애플을 그만둬야 했지만, 사실 평생 그를 먹여살렸던 것은 ‘매킨토시의 실제 개발자’라는 칭호였습니다. 유명한 BMW의 iDrive 시스템을 리뷰한다거나, 대학에서 UI 관련 강의를 했던 것 등 말이죠.

Wirehead

1970년대, 실리콘밸리의 고등학생들은 전자공학 클럽의 회원을 가리켜 ”와이어헤드(wirehead)”라고 부르곤 했다고 합니다. 일종의 소속감을 느끼기 위한 은어였는데, 아마도 한국어로 번역하자면 ”전깃줄머리”, ”전선대X리” 등등으로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싶지만, 사실 경멸적인 표현은 아니었다고 해요. 실리콘밸리 고등학생들이 전자공학을 하는 사람들을 보는 시선에는, 적어도 대전의 고등학생들이 카이스트 학생들을 바라보는 시선만큼의 감흥은 담겨 있었을 테니까요.

이 와이어헤드 가운데에 스티브 잡스와 스티브 워즈니악이 있었습니다. 애플의 두 창업자들이죠. 하지만 이 두 스티브 가운데 유명세를 탄 것은 스티브 잡스였습니다. 결국 그저 ”워즈”라고 불리게 된 스티브 워즈니악은 나름대로 유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스티브 잡스보다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애플컴퓨터를 개발하고, 초기 애플컴퓨터 기술의 핵심이었던 그의 위치에 비교하자면 억울할 지경이었죠. 그건 워즈가 스티브보다 못나서가 아니라, 아마도 스티브가 교활했고, 요령이 있었으며, 자신만이 돋보이는 상황이 될 때까지 고집을 피워댔기 때문일 겁니다. 정작 학창시절부터 공부도 잘했고, 전자공학에 재능도 있었으며, 사람들이 인정하는 엔지니어였던 건 워즈였습니다. 스티브는 그저 이것저것 기웃거리고, 자신이 돋보일 방법을 궁리했으며, 탁월한 요령으로 ”과정보다는 결과”를 얻어내던 학생이었죠.

아타리(”퐁” ”벽돌깨기” 등으로 1970년대의 초기 비디오게임 시장을 점령했던 회사)의 창업자인 놀런 부슈넬은 젊은 스티브와 워즈를 고용할 일이 있었는데, 이런 캐릭터의 스티브 잡스에게 호감을 느낍니다. 그는 당시의 스티브에 대해 스티브는 어떤 프로젝트를 하고 싶으면 나한테 몇 달이나 몇 년이 아니라 며칠이나 몇 주만의 시간을 요구했다. 나는 이런 게 마음에 들었다"고 회고합니다.(iCon 스티브 잡스)

과연, ”과정”이 좋지 않은 스티브가 저런 뛰어난 결과를 자신만의 능력으로 얻어냈을까요. 천만에요. 스티브가 저런 평가를 얻을 수 있던 것은 바로 ”워즈”였습니다. 컴퓨터 천재 워즈가 친구였기 때문에 워즈에게 이러저런 개발과 연구를 맡기면 됐던 것이죠. 결국 스티브와 워즈는 나중에 크게 싸우게 됩니다. 재주는 워즈가 넘고 돈은 스티브가 챙기니, 제대로 유지되기 힘든 우정이었죠.

스티브는 매우 능력있는 인물입니다. 프로젝트를 맡으면 단기간에 끝장을 보겠다고 달려드는 집중력, 끝장을 볼 때까지 밀어붙이고야 마는 추진력, 그리고 사람들을 휘어잡고 자신의 뜻에 따라 사용하는 능력. 다만 인간적인 리더라면 이렇게 성과를 낸 뒤에는 그 보상을 자신의 지도에 기꺼이 따라준 팀원들과 나눌 텐데, 스티브는 팀원들에게 성과를 나눠주는 데 인색했습니다. 속이 좁고, 배려가 부족했다는 것이죠. 사람들은 스티브의 인성이 원래 이 모양 이 수준인 것으로 믿고 있곤 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스티브의 주위에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것도 매우 능력있는 사람들이 득시글거렸죠. 독불장군에 괴팍스러운 성격의 스티브 잡스가 일종의 ”귀무가설”이라면, 그 주위의 수많은 인재를 보여주는 것이 ”대립가설”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스티브 워즈니악은 그저 시작일 뿐입니다.

걸으면서 일하기(Walk to work)

하루 종일 모니터만 쳐다보고 있다보면, 눈에게도 미안하고, 뱃살에게 방빼라고 하기도 민망하며, 심혈관계에게도 몹시 부끄럽습니다. 굳이 니콜라 샌더스의 심장과 뉴런까지 떠올리지는 않는다고 해도요.

이런 불만, 또는 욕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매우 많은 모양입니다. 일하면서 걷는 사람들이 정말로 있더군요.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런 식으로 일하는 것이 실제로 업무 효율도 높여준다는 겁니다. 막상 트레드밀에 올라서게 되면, 책상에 앉아 전화를 받을 때보다 다른 곳에 정신을 분산시키는 경우가 훨씬 줄어든다는 것이 직접 이렇게 일해 본 사람들의 얘기입니다. 뉴욕타임즈 기사를 보세요. 이런 기계를 이들은 ”워크스테이션”이라고 부르는군요. 고성능 업무용 컴퓨터를 지칭하는 Workstation 대신, Walkstation 말이죠. 그것도 펀드매니저, 로펌 변호사 등 꽤 머리를 쓰는 직종에 일하는 사람들이 이런 근무형태의 예찬자라는 사실이 눈에 띕니다.

가장 좋은 건, 사무직 샐러리맨들의 숙적인 비만에 이런 근무 형태가 몹시 도움이 된다는 것이겠죠. 게다가 ”걷기”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운동입니다. 뉴욕타임즈 기사에 등장하는 콜로라도 대학의 제임스 힐 박사는 이런 근무 형태가 대단한 체중 감량이나, 심혈관기능 개선 등으로 이어지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살이 더 찌는 건 막아줄 것"이라며 긍정적인 평가를 내립니다.

사실, 뒤져보면 좀 더 극단적인 케이스도 있어요. ”와우”(World of Warcraft) 게임에 푹 빠진 사람들 가운데에는 실내용 자전거운동기구를 탄 채로 매일 두시간씩 와우를 하면서 석 달 동안 41파운드(약 18kg)를 뺀 사람도 있습니다. 이보다 더한 사람 가운데에는 트레드밀에서 걸으면서 매일 두세시간씩 와우를 한 덕분에 100파운드(약 45kg)를 뺀 사람입니다. 처음 트레드밀에 모니터와 키보드, 마우스를 올려 놓을 땐 와이프 눈치가 가장 걱정되는 일이었다는군요.(누가 좋아하겠어요.)

일도, 게임도, 일어서서 움직이면서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너무 오래 앉아 있곤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