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WC 2013 결산

지난 주에 모바일월드콩그레스에 다녀왔다. 행사장에서 만난 한 CEO는 MWC에 대해 “세상이 변했는데도 아무 생각없는 통신사들이 풍광 좋은 곳에서 전시회 열고, 비즈니스클래스 비행기 타고 놀러와서 특급호텔에서 며칠 묵으며 환담 나눈 뒤 돌아가는 폼 잡는 행사”라고 혹평했다. 솔직히, 본질적으로 그런 행사라는 생각을 나도 지울 수가 없었다. MWC의 최근 몇 년 간 성과라는 게 전부 허울좋은 말장난이었기 때문이다. 세계 통신사 공동 앱스토어라던 WAC 같은 건 한 번 제대로 시작도 못해보고 끝났고, ‘미래의 기술’이라며 자랑하는 근거리무선통신(NFC) 기술은 올해도 여전히 ‘미래를 경험해 보세요’ 수준이다. NFC가 스마트폰에 딱 맞는 기술이라며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게 2010년이다. 이미 지금이 그 때보다 3년 가까이 지난 미래인데 무슨 미래를 더 경험하라는 얘기?
게다가 올해 행사에서는 모두들 짐을 싸고 있었다. 스티브 잡스 시절의 애플이 자체 행사에서 워낙 주목받던 시기에는 일종의 ‘반 애플 동맹’이 MWC에 모여들었지만 애플도 예전같지 않은 지금은 이해 관계가 달라졌다. 원래 한 때 잘 나가던 앙시앙 레짐의 절대군주들은 혁명군의 예봉만 꺾이고 나면 돌아서서 각자 전리품 챙기기에 나서게 마련 아니던가.

예를 들어 이번 MWC에서 전시관도, 신제품 발표도, 컨퍼런스도 열지 않았던 구글은 그래도 공간은 ‘비공개로’ 빌려서 이러저런 ‘비공식’ 만남은 쉼없이 계속 진행했다. 삼성전자도 갤럭시노트 8.0을 공개하긴 했지만 그보다 더 큰 뉴스는 ‘갤럭시S4를 뉴욕에서 3월14일 공개한다’는 일정 발표를 MWC에서 했다는 사실이었다. 삼성이든 구글이든 MWC는 큰 무대가 아니었던 셈이다. 여기 오는 주요 파트너들과 물밑에서 작업을 벌이는 곳일 뿐. 그나마 소니는 아주 성실하게 공식 후원사로 참여하면서 엑스페리아T를 참가자 상당수에게 무료로 뿌렸고, 바르셀로나 시내 광고판 대부분을 (마치 애플이 신제품 발표 직후 샌프란시스코에 하던 것처럼) 신제품인 엑스페리아Z로 가득 채웠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갤럭시S4 얘기만 하더라. 불쌍한 소니.

파이어폭스와 우분투, 타이젠이 엄청난 관심이라도 끌어 모은 것처럼 얘기되긴 했지만 이것 또한 약간 맥이 빠졌다. 일단 삼성전자나 LG전자, 소니, HTC 같은 이른바 안드로이드 메이저 업체는 시제품을 전혀 전시하지 않았다. 대신 “앞으로 하겠다”는 계획만 발표했다. 이런 회사들의 고위관계자들은 “통신사에서 요구하니까 협조하는 것”이라는 얘기를 딱히 비밀도 아니라는 듯 쉽게 얘기했다. 그러니까 딱히 대안 OS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물론 타이젠을 인텔과 함께 밀고 있는 삼성전자의 입장은 조금 다르다. 삼성은 좀 더 진지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 삼성조차 타이젠 자체의 방향성을 확정짓지 못한 상태다. 정작 만져볼 수 있는 수준의 시제품이 등장한 건 파이어폭스 뿐이었는데, 그 시제품 제조사가 중국의 ZTE였고 당연히 초저가 스마트폰이란 사실은 이게 참 갈 길이 멀다는 것만 보여줬다. 이외에는 (어이없게도) 알카텔이 파이어폭스 스마트폰 시제품을 내놨는데, 이들이 증명한 것이라곤 딱 하나뿐이었다. 북유럽 제조기술은 중국에게 확실하게 밀린다는 사실.

그러니까 이른바 ‘대안 OS의 등장’은 GSMA 차원에서 논의된 통신사들의 위기감의 발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일단 어떤 통신사도 대안 OS로 만든 스마트폰을 시장에 적극적으로 팔겠다는 얘기를 하지 못했다. 마치 ‘파이어폭스 전도사’라도 된 듯 모질라재단을 후원하던 텔레포니카조차 막상 파이어폭스 스마트폰은 중남미 5개국에 ‘제한적으로’ 팔 계획이라고만 설명했다. 올해 파이어폭스 단말기는, 내 생각엔 모두 합쳐도 삼성전자의 갤럭시노트 8.0만큼도 안 팔릴 것 같다. 손에 쥘 수 있는 데모조차 없는 우분투폰과 타이젠폰은 그냥 올해 내로 완성품이 나와만 줘도 성공이란 생각이다. 물론 이런 OS들의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까지 무시할 생각은 없지만, 이런 대안 OS들이 주목받은 건 좀 거칠게 말하자면 “구글과 애플과 삼성과 인텔과 화웨이와 소니와 HTC 등을 경쟁시켜 다시 우리가 甲질 해보자”는 통신사들의 희망에 따른 것이다.

사실 가장 눈에 확 띈 건 구글에 대한 통신사들의 깊어진 원한이었다. 국내외 통신사를 막론하고 구글에 대한 반감은 엄청 높아졌다. 당연한 결과다. 애플이 미우니 애플의 적은 친구였지만, 이제 애플이 밀리기 시작했으니 구글은 통신사에게 새로운 애플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삼성전자와 구글 사이의 불편한 관계를 얘기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들 가운데 누가 제일 많은가하면 바로 통신업계 사람들이다. 통신업계의 관심사는 하나다. 자기들 빼고 모두를 갈라놓기. 그런다면 힘의 균형이 이뤄질 거라고 보는 것이다. 이건 전형적인 귀족들의 행태다. 평민들의 반란은 용납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강력한 왕권도 견딜 수 없는.

그래도 구석구석 재미있는 제품들도 있어서 눈이 심심하진 않았다. 구글글래스가 요즘 화제이지만 사실 이걸 써볼 수 있는 사람들은 세상에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후지쯔가 비슷한 컨셉의 제품을 선보였다. 물론 구글글래스는 안경처럼 쓰고 다니는 컴퓨터라는데 초점이 더 맞춰져 있고, 후지쯔 제품은 그보다는 디스플레이 자체에 신경을 더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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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모델이라 남보기에 그럴싸하지 못해 좀 민망하지만, 전시회에서 갑자기 모델 구해서 남의 사진 찍을 수도 없어서… 어쨌든 사진에서 보듯 눈에 밀착한 흰 플라스틱 통 안에 작은 거울이 달려 있고 이 거울이 레이저를 눈으로 바로 쏘아준다. 물론 후지쯔에서는 시신경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 아주 약한 강도의 레이저라고 얘기한다.(아직까지 내 눈에는 별 이상이 없다.) 레이저를 사용한 덕분에 망막에 맺히는 화상은 아주 또렷한데, 특히 배경이 어두운 곳을 바라보면 정말 TV가 눈앞에 떠있는 수준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검은색 벽을 본다거나, 검은 종이를 바라봐도 화면이 확 살아난다. 그리고 일반적인 환경위로 영상이 겹쳐지면서 투명하게도 보인다.

이게 뭐 대단한 거냐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구글글래스 같은 안경 형태 디스플레이의 가장 큰 문제는 초점이다. 한쪽에 맺힌 스크린은 두 눈동자에 서로 다른 초점거리를 강요한다. 이걸 보정해서 해결할 수도 있지만 문제는 우리 눈이 끊임없이 바라보는 거리에 따라 다른 초점거리를 맞춘다는 데 있다. 레이저로 망막에 영상을 직접 쏘아준다면 이런 움직이는 초점거리의 문제가 상당부분 해결된다. 게다가 후지쯔는 내년이나 내후년에는 이 볼품없이 큰 기계를 실제 선글래스 크기로 소형화하겠다는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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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후지쯔가 선보인 스마트폰. 일반적인 안드로이드폰이지만 UI를 완전히 바꿨다. 보면 알겠지만, 직관적이고 간단하다. 마치 노키아 피쳐폰을 보는 느낌. 그러니까 이른바 ‘시니어폰’이다. ‘크롬’도, 위젯도 없다. 그냥 인터넷과 지도, 카메라 등이 큼지막한 그림과 함께 나온다. 스마트폰은 스마트폰인데 피쳐폰처럼 쓸 수 있는 스마트폰이다. 의외로 이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일본 기업들은 확실히 틈새를 잘 잡는다. 초고령화 사회니까 가능해 보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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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엉망으로 찍어서 영 별로지만, 이건 소니가 이번 행사 기간에 새로 공개한 태블릿Z다. 뭐 별 게 있겠어 싶은데, 막상 손에 들면 느낌이 다르다. 삼성전자가 만든 넥서스10을 처음 보면 그 커다란 크기와 중후한 디자인에 겁을 먹는데, 막상 손에 쥐면 플라스틱 재질과 고무질감 표면 덕분에 가볍고 착 감기는 느낌을 받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무엇보다 가볍다. 기대보다 가벼워서 놀랄 정도. 이런 걸 보면 왜 태블릿을 꼭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야만 하나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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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ZTE가 만든 파이어폭스 폰. 하도 형편없다는 평가가 많아서 그런데, 싼데다 운영체제가 아주 초기라는 점을 감안하고 보면 생각보다는 괜찮다. 게다가 웹 기반이란 건 일단 안정화되면 오류도 적을 거란 느낌도 주고, 무엇보다 업그레이드도 쉬울 테다. 발전할 일만 남은 폰을 미디어들이 너무 혹평했다는 인상도 받았다. 기억에 남는 말 한마디는, 웹 기반 모바일 OS라는 게 일종의 발전해 나갈 트렌드라고 수년 전부터 주장해 왔는데 구글이 계속 미적거리다가 ‘파이어폭스 OS’가 구체화된 뒤에야 구글이 안드로이드에 크롬 브라우저를 넣기 시작했다는 주장이었다. 바꿔 말하면 구글이야말로 이 시대의 마이크로소프트라는 얘기다. 파이어폭스가 없던 시기에는 IE를 업그레이드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얘기.

파이어폭스는 그래서 존재 자체가 늘 고맙다. 점유율이 자꾸 떨어지는 현실은 안타깝지만. 미안하게도, 나도 크롬을 쓴다.

카톡-라인을 밀어내자?

스페인에서 열리는 모바일월드콩그레스(MWC) 행사에 와 있다. 그런데 한국 기사를 보니 이석채 회장이 “카카오톡과 라인을 밀어내자”고 말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이상하다. 그런 얘기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물론 카톡과 라인이 통신사의 수익을 갉아먹는 회사라는 얘기는 했다. 그건 사실이니까. 기조연설에 그런 부분도 들어있었다. 기사가 잘못된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런데 이 회장 얘기를 패널토론까지 들어보면 뉘앙스가 좀 달랐다는 걸 알 수 있다.
MWC 둘째날 기조연설은 도이치텔레콤, 에릭슨, KT, 그리고 바이버의 CEO가 돌아가면서 15분씩 자기 얘길 하고 함께 20분 정도 토론을 했다. 무료통화 앱을 만드는 바이버가 끼어들어 토론이 흥미진진해졌는데, 마지막 기조연설자였던 탤먼 마르코 바이버 CEO는 “혁신(innovation)과 상호호환성(interoperability)은 반대 방향을 가리킨다”고 해서 논쟁이 붙었다.

“바이버 같은 기업은 혁신을 향해 달려가기 때문에 와츠앱, 스카이프와 상호호환을 신경쓰지 않는다. 혁신이란 곧 다른 기업과의 차별화이기 때문이다. 반면 통신사는 서로 다른 통신사와의 상호호환에 가장 신경을 쓴다. 차별화를 없애는 방식이라 혁신이 생기지 않는다. 통신사에게 유일한 차별화는 가격이고, 그건 저가 출혈경쟁으로 이어진다.”

새파랗게 젊은 앱 개발자가 이런 소리를 면전에서 해대니 당연히 통신사는 발끈할 수밖에 없었다. 도이치텔레콤의 CEO 르네 오버만은 “상호호환이야말로 혁신이고, 바이버 같은 기업은 통신사의 이런 기술을 이해조차 하지 못한다”며 “정보보안도 못 지키고 개인정보 보호도 소홀한 기업이 혁신을 얘기하다니”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마르코는 “우리 최고보안책임자가 AT&T 통신망을 해킹했던 사람”이라며 맞섰다. 이 회장도 사회자가 의견을 물어 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차피 바이버는 물론 카톡이나 와츠앱 같은 회사가 문을 닫는다해도 어떻게든 그런 식의 비즈니스모델을 가진 새 회사가 나올 겁니다. 우리가 규제를 통해 이들을 막으려 해도 브로드밴드라는 건 이런 사업자들에게 이를 우회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열어줄 거에요. 막으려고 해도 못 막습니다. 이들과는 협력할 방법을 찾아나가며, 이들이 못하는 서비스를 우리가 해야 하지 않겠어요?”

난 이게 ‘카카오톡과 라인을 밀어내자’는 얘기와는 다른 얘기라고 생각한다. KT를 딱히 편들거나 이 회장을 개인적으로 지지할 생각은 없는데, 이번 MWC에서 KT의 얘기는 확실히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유럽 통신사들의 옛날식 사고와 비교할 때엔 매우 진일보한 얘기였다. 물론 스마트폰 보급률이 아주 높은 한국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하루하루 온갖 비난과 싸워가야 하는 한국 통신사의 현실이 배경이 됐겠지만.

난 KT가 카카오톡보다 좋은 서비스를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나도 마르코와 비슷한 생각인데, 상호호환성은 차별화를 통해 이룩하는 혁신과는 반대방향을 가리키기 쉽다. 하지만 이번 MWC에서 통신사와 앱개발사, 인터넷 회사들은 으르렁거리기만 하는 게 아니라 뭔가 접점을 찾는 느낌이었다. 예를 들어 결제. 회원가입 후 신용카드를 등록해야 애플, 구글, 아마존 앱스토어를 쓸 수 있는데 이렇게 신용카드 정보를 자발적으로 알아서 입력하는 스마트폰 가입자가 전체 가입자 가운데 얼마나 될까? 오히려 통신사가 통신요금에 합산해서 대신 과금해주고 수수료를 받아주면 편하지 않을까? 구글이 구글플레이를 한국에서 처음 시작할 때 통신사 지불대행 서비스를 요구하고 상당한 수수료를 통신사에게 지불했던 것도 이런 이유다. 결제는 앱개발사에게도 필요하고, 통신사가 잘 할 수 있는 분야다. 이런 걸 서로 찾아내는 게 아마 통신산업의 미래가 아닐까.

판단은 어차피 각자 할 일. 다음은 이 회장의 키노트 내용이다. 짧은 영어로 인한 오역과 듣다가 손가락이 아파 받아적지 않은 생략이 존재하긴 하는데, 그래도 보도자료보다는 낫지 않을까 싶다.

KT CEO Dr. Lee

이 자리에 서서 영광입니다. 세계에서 오신 여러분. KT는 상대적으로 작은 회사입니다. 우리는 글로벌 회사도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왜 여기 서서 말하고 있는 걸까요? 무슨 자격으로 ‘통신의 미래’를 얘기하고자 나섰을까요? 그건 제게 자신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KT가 처한 현실, 그리고 우리에게 비즈니스모델을 다시 부활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준 상황이 제 자신감의 배경입니다.

이는 어떤 측면에서는 우리가 최전선에 서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KT는 과거의 유산인 구식 통신망을 갖고 있는 회사입니다. PSTN(유선 시내전화망) 매출 비중이 컸죠. 그런데 이게 급격히 감소하고, 문자메시지(SMS) 매출도 마지막 통계로 기존보다 65% 하락했습니다. 제 체감에는 최근에는 75% 이상 감소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한국에서 SMS를 이용하지 않기 때문이죠. 음성통화도 16%나 감소했습니다. 그 자리에 OTT(over the top, 통신망 위에서 사업하는 카카오톡 같은 유사통신사업자를 통신사가 부르는 용어) 업체가 엄청난 성공을 거뒀습니다. 특히 한국에서 성공했죠. 이들이 무선통신을 엄청나게 씁니다.

여러분, KT의 경험을 바탕으로 비전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지금은 이른바 All-IP 시대입니다. 유선통신때보다 훨씬 더 큰 변화가 무선에서 일어날 거에요. 세계 모든 지역이 변할 겁니다. 이 장소에 오기 전에 에릭슨의 리포트를 봤습니다. 50달러 미만의 스마트폰이 나올 거라고 얘기하더군요. 한국에선 이미 3분의2 이상의 휴대전화 가입자가 스마트폰을 씁니다. 한국에서 한 사람이 한 달 동안 쓰는 무선 데이터 양은 1.7GB에요. 2009년 초만 해도 1인 당 10MB를 썼습니다. 160배 늘어난 겁니다.

All-IP 얘기를 하는 게 이런 배경에서입니다. 1990년대 말, 유선 브로드밴드는 거대한 사이버공간을 탄생시켰습니다. 그런데 통신사 대신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이베이, 네이버 같은 회사가 이 공간을 차지했죠. 통신사는 여기서 아주 작은 조각만 차지했습니다. 모바일에선 더 큰 사이버 공간이 생길 것으로 예상됩니다. 특히 세계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갈 겁니다. 전자정부를 비롯해 수많은 다른 서비스 들이 이 공간에 등장할 거에요. 그런데 이게 커다란 인터넷사업자, 새로 번성하는 OTT에 의해 점유된다면 어떨까요?

지난 4년간 KT의 수익은 성장을 멈췄습니다. 반면 시설투자는 40억 달러에 이르렀죠. 모바일 데이터를 위한 망 투자 때문입니다. 또 경쟁은 심했고, 정부 규제도 심했죠. 이건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 통신사가 동일할 겁니다. 그런데 All-IP 시대에서는 이러닝, 이헬스, 이가버먼트 등이 모두 IP망으로 갈 겁니다. 우리는 이걸 가상재화(virtual goods)라고 부릅니다. 실물 재화(physical goods)에 대항하는 말이죠. 이게 세계 경제를 이끌어갈 테고, 이런 사이버공간에서의 가상재화 판매로 구글, 네이버 등의 사업자들이 돈을 벌고 있습니다. KT는 이런 시장에서 번영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새로 확장된 가상 공간에서 우리는 르네(앞서 발표했던 도이치텔레콤 CEO)가 얘기했던 것처럼 근본적으로 다른 접근이 필요합니다. 구글은 가상재화의 시대에 최적화된 네트워크를 직접 준비하고 있습니다. 클라우드 컴퓨팅 등을 소프트웨어 공학 기술로 해결해나가기도 합니다. 통신의 경계로 들어오고 있어요. 그런데 통신사는 기존의 통신 경계, 인프라만 만들던 그 경계에 갇혀 있습니다. 경계를 넘어서야 합니다. 여러분이 아는 것처럼 우리는 WAC(통신사 공동 앱스토어)을 만들려다 실패했습니다. 아마 제가 WAC 얘기를 꺼내면 그 단어 자체가 듣기 싫은 분들도 계시겠죠. 그런데 WAC 같은 가상재화 공동시장을 제안하면 맘에 들어하실까요? 아닐 겁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WAC은 비현실적이었습니다. 미들웨어를 하나 만들고 그게 성공할 거라 믿었으니 불구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상재화 단일 공동시장도 당연히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건 가입자라는 고객 기반이고, 그걸 나눠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타이젠, 파이어폭스 등 다양한 대안 OS도 지원해야 합니다. OASIS를 보세요. KT와 차이나모바일, NTT도코모가 함께 하는 서비스입니다. 2년을 했는데 우리가 작은 성공의 사례를 만들어가고 있어요. 이렇게 같은 아이디어를 갖고, 지역적 기반에서, 심지어 경쟁업체들이라 할지라도 합쳐가면서 빠르게 시장을 확대하고 가입자 기반을 늘리는 게 중요합니다.

지속가능한 방법이 있습니다. KT는 이미 혁명적인 All-IP 네트워크를 소프트웨어적으로 만들었습니다. 클라우드 컴퓨팅 역량도 갖췄습니다. 통신 사업이지만 경계를 넘어서려고 하고 있죠. 우리는 또 미디어 그룹으로도 변하고 있습니다. IPTV를 유선과 모바일 양쪽에서 서비스하고, 이런 기반을 이용해 사회의 교육적 불평등을 해소하는 이러닝 등을 제공합니다. 컨텐츠 프로바이더 역할도 시작했죠. 그러니 이런 걸 확대해야 합니다. 여러분 글로벌 가상재화 시장을 키웁시다. 제 생각에 이건 옵션이 아니라 숙명입니다.

점점 마이크로소프트처럼 변해가는 구글

세계 최대의 전자제품 전시회인 CES 행사에서 가장 큰 전시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회사는 전자업체인 소니나 삼성전자가 아닙니다. 두 회사의 전시공간도 입이 딱 벌어질만큼 크지만 정작 가장 큰 공간을 차지한 건 마우스나 키보드, 엑스박스를 빼놓고는 별다른 전자제품을 만들지 않는 마이크로소프트입니다. 게다가 CES에 참석한 전 세계 전자업계 사람들과 언론사 앞에서 한 해 전자산업의 미래를 설명하는 기조연설자로 매년 초청되는 유일한 업체가 바로 마이크로소프이기도 하죠.
올해 MWC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구글은 거대한 전시공간을 빌려 안드로이드로 이를 꽉 채웠고,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구글의 최고경영자(CEO)인 에릭 슈미트가 수많은 통신사와 휴대전화 제조업체 관계자들 앞에서 기조연설을 합니다. 구글이 통신업계의 마이크로소프트가 된 셈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CES에 공을 들이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PC에 머물고 있는 자신들의 소프트웨어 비즈니스를 다양한 전자제품으로 확대하고 싶기 때문이죠. CES에 참가하는 전자업체들은 늘 마이크로소프트와의 제휴를 앞세워 광고합니다. 빌 게이츠가 아이리버의 MP3 플레이어를 들고 나오고, 삼성전자의 TV에 엑스박스를 연결하는 모습을 보여줬던 게 국내 언론에서 중요하게 다뤄졌던 걸 기억하실 겁니다. 똑같은 일을 구글이 하고 있습니다. 전시장 곳곳에서 수많은 업체들이 안드로이드 로봇 인형을 세워놓고 있습니다. 삼성전자는 구글폰인 ‘넥서스S’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자랑하고, 소니는 안드로이드폰에서 플레이스테이션 게임을 할 수 있게 했다며 “기쁘다”고 강조합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위세가 점점 줄어들면서 그 자리를 구글이 빠르게 빼앗고 있는 셈이죠. 사실 원래 통신사 위주의 행사였던 MWC가 세계적인 전자업체들과 소비자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쇼로 변한 것도 구글이 이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한 지난해부터입니다.

구글은 단순히 전시회 참가 전략에서만 마이크로소프트를 닮아가는 게 아닙니다. 산업을 재편한다는 측면에서도 비슷합니다. 올해 MWC의 화두는 업체들이 내세워 자랑하지는 않지만 ‘가격전쟁’입니다. 똑같은 안드로이드 태블릿을(따라서 기능 차이도 크지 않은 제품을) 모토로라는 800달러에 만들어 판매하고, 중국의 화웨이는 300달러에 팔 계획입니다. 소비자가 90만 원짜리 갤럭시S를 팔던 삼성전자가 올해는 150달러(약 17만 원)짜리 스마트폰을 만들거라고 선언합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프리미엄제품’이었던 스마트폰이 통신사 대리점 두세곳만 돌아다니면 어렵잖게 건질 수 있던 ‘공짜 폴더폰’과 똑같아진 셈입니다.

우리는 이 과정을 1980년대 이후 지겹게 봐왔습니다. MS-DOS와 윈도로 이어지던 마이크로소프트 제국 시절 PC제조업체들이 끊임없는 가격경쟁을 벌이던 모습이었죠. 그 결과 제조업체는 모두 쓴맛을 봤습니다. IBM은 PC사업부를 중국 레노보에 팔아치웠고, 컴팩과 HP는 서로 합병할 수밖에 없었으며, 새로운 왕자인 줄 알았던 델은 에이서같은 대만업체의 추격에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이런 상황을 즐기며 떼돈을 벌었죠. 휴대전화 사업도 똑같습니다. 안드로이드의 업데이트가 이어지면서 노키아는 회사를 사실상 마이크로소프트에 갖다 바쳤고, 모토로라는 휴대전화 사업부를 떼낸 뒤 끊임없는 매각설에 시달리는 상태며, 순식간에 세계3위까지 성장하던 LG전자는 도대체 어디를 향해 달려야할지 갈팡질팡하는 와중입니다. 구글은 이런 상황을 즐기며 떼돈을 벌고 있습니다.

이후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우리는 모두 마이크로소프트 윈도를 쓰기 시작했고, 컴퓨터 학원에서 “이것이 컴퓨터”라며 윈도 사용법과 MS워드 사용법을 가르쳤습니다. 블루스크린에 짜증을 내고 액티브엑스에 갑갑함을 느껴봐야 별 수 없었죠. 세상은 그냥 그들의 천하가 됐습니다. 구글이 마이크로소프트의 자리를 빼앗는 세상에서도 그런 갑갑함이 벌어지려나요.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리고 그러지 않을 가능성도 마이크로소프트 때보다는 조금 더 높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뭘 어떻게 해서 그러지 않게 되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은 구글이란 절대권력의 선의에 달려있다는 사실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