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드, 네이버가 생각하는 소셜네트워크

그녀는 싸이월드를 만든 사람이라고 했다. 한국인 3000만 명이 쓰던, 그러니까 인터넷을 하는 한국 사람이라면 거의 다 쓰던 싸이월드가 그 사람 손에서 만들어졌다. 이람. 네이버서비스2본부장. 돈도 없을 때 열정만 갖고 열심히 키웠던 회사가 SK텔레콤에 팔린 뒤로는 NHN으로 자리를 옮겼다. NHN에서는 다음이 카페가 강하니 네이버에서도 카페를 키워야 한다는 당연한 얘기가 나오고 있었고, 그러자면 커뮤니티에 뭔가 성공 사례가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얘기도 나왔고, 인터넷 커뮤니티하면 싸이월드였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이람이 그곳으로 갔고, 네이버 카페는 이후 다음 카페랑 경쟁하는 수준으로 성장했다. 참, 하나 더. 이람은 카페와는 별도로 네이버 블로그도 만들었다.
“저는 그 시절에 이글루스를 썼는데요? 그게 더 먼저 나온 것 아니었어요?”

이 질문에 그녀는 네이버 블로그가 먼저라고 정정해 줬다. 비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면 뭐하느냐, 이글루스가 더 좋아서 그걸 썼다, 게다가 지금도 네이버 블로그는 뭐랄까, 쿨(cool)하지 않고 아줌마들이나 쓰는 서비스라는 인식을 준다…

당연하겠지만, 이람은 자기가 만든 서비스에 대해 “아줌마 같다고 말한다니 가슴 아프다”고 했다. 그래도 그게 돌려 말하면 쓰기 쉽다는 뜻 아니겠냐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와서 계속 생각해 봤다. 쉬운 서비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서비스. 말은 좋은데, 뭐가 쉬운 걸까?

지금 생각해 보면 중요한 건 맥락이다. 이람은 개발자가 아니다. 사회과학도였고, 잡지사 일을 했으며, 잡지를 만들어서는 도저히 먹고 살 수가 없어 동아닷컴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인터넷 서비스 기획을 시작했다. PC통신을 썼고, 초창기 게시판형 서비스에 익숙했으며, 새 글이 올라오면 댓글이 달린다거나, 글발이 좋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논쟁이 벌어지는 형식의 구조를 이해했고 확대재생산시켰다.

이후 그녀가 성공시킨 서비스를 보자. 싸이월드 미니홈피는 게시판 위주의 PC통신 문화에서 막 ‘그림을 단 게시판’으로 사람들이 옮겨오던 2000년대 초에 ‘쿨한 그림'(일본에서 유행하고 젊은 여성들이 일찌감치 받아들였던 픽셀아트)을 단 게시판으로 대박을 쳤다. 차이는 우리 모두 보던 게시판에서 ‘내 게시판’을 만들었다는 점 정도. 이람은 “미니홈피가 ‘나’라면 나는 옷을 입고, 옷은 사입는 거니까, 옷을 팔자”는 생각으로 만든 게 미니홈피였다고 했다. 인터넷으로 돈을 벌고 싶은데 돈이 안 벌려서 굶을 지경에 이르니 뭐라도 팔 수 없을까 생각하다 만든 게 미니홈피였던 셈이다. 하지만 그 개념이 모든 걸 갈랐다. ‘우리’밖에 없던, 그것도 시솝이라는 권력의 정점 밑에 부시솝들이 각 게시판들을 군대식으로 관할하던 PC통신 시절의 잔재가 거기서 깨어졌다. 좀 다른 얘길 하자면, 미니홈피의 성공은 하나회 척결과 맞먹는 문화적 대사건이 아니었을까. 어쨌든 이건 정말 기존과는 다른 서비스였는데 기존 서비스보다 훨씬 쿨했다. 쓰기는 쉬우면서. 쉽다는 건 그런 거였다. 쿨한데 쉬운.

네이버 블로그의 가장 큰 장점은(본인은 어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스마트에디터다. 내가 아줌마들이나 쓰는 것 같다고 불렀던 바로 그 지점 말이다. 누구나 쉽게 사진 찍어 붙이고 디자인할 수 있는 기능. 그 덕분에 정말 수많은 아줌마들이 주방용품, 요리법, 육아용품을 리뷰하거나, 홍보하거나, 영업하면서 네이버 블로그를 즐긴다. 그리고 서로 방문하고 댓글 달고 욕하고 차단했다 다시 보면서 웃고 울고 즐긴다. 계속 즐긴다. 싸이월드 사람들은 자기 서비스 사용자들이 “스물여섯살이 되면 졸업한다”고 말한다. 소녀들은 자라서 아줌마가 되고, 아줌마들은 싸이월드에서 노는 대신 네이버로 옮겨가 논다.

문학소녀 기획자는 자라서 초보 아줌마가 됐고, 본부장이 된 지금은 학부형이 됐다. 그리고 ‘밴드’를 만들었다.

도대체 이 서비스는 뭘까. 워낙 새 서비스가 많이 나오는 시대라서 난 요즘 어지간한 신규 서비스엔 관심도 없다. 흥미도 안 생긴다. 차별화됐다고 얘기해봐야 그 차별화를 애써 이해하기가 귀찮기만 하다. 그런데 밴드에는 관심이 생겼다. 사실 서비스가 좋아보여서였다기보다는, 이건 ‘카페를 말아먹겠다는 생각 아니면 안 만들 것 같은 서비스’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카페 앱을 더 잘 만들어서 모바일 카페를 좀 더 키워보지, 이게 무슨 카니발라이제이션인가. 앱을 다운로드 받은 뒤엔 더 황당했다. PC에선 쓸 수도 없고, 밴드를 만들었더니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글쓰고 사진 올리는게 고작인데, 아니, 이봐요, 이런 거 하는 건 인스타그램과 카카오스토리가 있잖아.

오늘 기사에도 썼지만 밴드는 사실 그래서 만든 서비스라는 게 이람의 설명이었다.

인터뷰를 시작했을 때 그녀가 처음 보여준 게 바로 이 슬라이드였다. 이건 구글 출신(지금은 페이스북)으로 구글 플러스의 ‘써클’ 기능에 큰 영향을 줬던 폴 애덤스가 ‘현실의 소셜네트워크'(real life social network)를 설명하는 그림이다. 온라인에서 그냥 통으로 관리되는 사람들과의 소셜네트워크와는 달리 현실에선 내 주위 사람들이 그룹별로 묶여있게 마련이라는. 결국 구글은 이런 방식을 도입해 구글플러스에 써클이라는 형태로 친구들을 구분하는 기능을 만들었고, 애덤스가 페이스북으로 옮긴 뒤에는 페이스북에도 그룹이라는 비슷한 형태가 도입됐다.(이른바 ‘친친소팅’, 즉 친한 친구 분류하기가 이래서 가능해졌다.) 네이버에서도 뭔가 만들면 이런 걸 만들고 싶었다는데, 결정적인 문제는 페이스북 그룹이든, 구글플러스 써클이든 간에 처음 쓰는 사용자들은 뭔가 쓰기가 복잡하고 어렵다는 데 있다.

그래서 밴드(서비스)에선 그냥 밴드(서비스 내의 모임)를 만들면 그 밴드끼리만 묶이게 해놨다. 밴드앱 내에서도, 네이버에서도, 절대로 밴드 사용자가 어떤 밴드에 가입돼 있는지 검색되지 않는다. 끼리끼리 모이고, 끼리끼리 얘기하다가 그 밴드 돌아가는 분위기가 맘에 안 들면 나오면 그만이다. 물론 일단 나오고 나면 다시 초대받을 때까진 한 번 나온 밴드를 되찾아 갈 수도 없다. 검색이 안 되니까. 이거 좀 무서운 것 같지만, 사실 현실 속 관계가 그런 게다. 그러니까 카페와는 다르다. 카페는 검색돼야 하고, 카페 속 지식이 곧 카페의 존재 이유다. 밴드는 아니다. 검색되면 안 되고, 밴드 속 정보는 그 집단만 공유해야 하는 약한 비밀에 해당한다.

허술해 보일 지경이었던 밴드의 기능도 이람의 설명에 따르면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었다. 처음 쓰는 사람들은 도대체 이 서비스가 왜 만들어진 것인지를 직관적으로 이해해야 했는데, 그렇게 하려면 기능이 많은 것보다 적은 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밴드를 처음 기획했을 때 목표로 삼은 건 대학생들이 조모임 할 때 쓰는 서비스였다고 했다. 그래서 사진 올리고, 약속 잡고, 전화번호 공유하고, 글 쓰고 채팅하는데에만 집중했다는 얘기다. 조모임이 타깃이었기 때문에 곧 추가할 기능도 N드라이브하고 연동해서 파일을 주고받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놓고보니 활용처가 의외로 다양했다. 이람 스스로 ‘1학년5반’, ‘사사과91학번’, ‘Exconnect’(NHN 임원모임) 등 서로 섞
면 어색할 모임들을 만들어 따로 가입해 있었다. 이외에도 잘 돌아가는 모임으로 교회의 지역모임도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알고 지내면 괜찮지만, 페이스북 피드에 뜨는 건 싫은 사람과의 느슨한 관계도, 날마다 할 말이 무지 많지만 이 사람과의 얘기가 다른 페이스북 친구들에게 공개되는 건 싫은 끈끈한 관계도 따로따로 잘 관리되는 셈이다.

이 글의 제목은 네이버가 생각하는 소셜네트워크라고 달았지만, 사실 ‘밴드’는 ‘이람이 생각하는 소셜네트워크’다. 성공할까? 나도 모른다. 나로서야 그냥 페이스북만 쓰는 세상이 더 편하고 좋은 것 같긴 한데, 생각해보면 그건 네이버 블로그 초창기를 볼 때도 내가 했던 생각이다. 왜 네이버는 선진적인 워드프레스나 무버블타입 같은 걸 안 만들고 저렇게 후진 네이버 블로그를 만드느냐고. 그렇게 주장하던 내가 어느날 워드프레스로 회사 홍보 블로그를 만들었다가 그 콘텐츠를 함께 관리할 우리 팀원들에게 된통 잔소리를 들었다. 에디터 쓰기가 너무 힘들어서 블로그를 새로 배우는 것 같다는 얘기였다. 네이버 카페를 보면서도 저게 무슨 정보의 보고냐고 비웃기 일쑤지만, 사실 그렇게 비웃는 집단은 전체 인터넷 사용자 가운데 극소수다.(아마도 이 블로그를 찾아주시는 여러분?)

홈페이지와 블로그 그리고 현재의 페이스북 페이지와 타임라인 등으로 사용자를 교육시키며 진화했던 미국 인터넷 문화는 한국 인터넷 문화와는 많이 다르다. 미국에선 Geek들이 직접 혼자서 모든 걸 다 하면서 인터넷에 접근하기 시작했다가 가입형 서비스들이 확대되기 시작했고, 결국 대부분의 미국인이 가입하는 서비스가 등장했다. 반면 한국에서는 PC통신 게시판부터 시작해서 포털 게시판, 카페 게시판, 미니홈피 게시판, 블로그 게시판의 순서로 시작부터 지금까지 모두가 함께 갔다. 인터넷 사용자가 증가하긴 했지만 핵심사용자들은 변함없이 모든 서비스를 관통하는 일관된 정서를 가진 사람들이다. 게시판과 댓글 문화.

그리고 이람은 지금 모바일 게시판을 만든 것이다.

어떻게 될까. 그녀의 꿈처럼 한국의 모바일 게시판이 세계의 게시판으로 확대될까. 아니면 타임라인과 써클의 모바일 공략이 한국까지 접수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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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네트워크 버블

지난달 가트너의 브라이언 프렌티스 부사장을 만났다. 특별한 주제 없이 올 한 해 IT 업계의 트렌드에 대해 이러저런 얘기를 나눴다. 인상적인 부분이 몇 가지 있었는데 빅데이터에 관한 이야기는 신문에 기사로 간단히 소개했다. 그때 함께 소개하지 못한 이야기 가운데 하나가 SNS에 대한 얘기다. 그는 “단언하는데 지금은 SNS가 버블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시기”라며 “SNS 투자에 낀 거품은 2013년 이전에 터질 것”이라고 말했다. SNS의 ‘닥터 둠’이랄까.
그는 “이해해야 할 건 내가 지금 사람들이 페이스북을 쓰지 않게 된다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라며 “투자에 있어서의 버블이 터지리라는 게 내 예상”이라고 강조했다. 프렌티스 부사장 스스로도 페이스북 팬이기 때문이다. 그 스스로가 점점 더 많은 시간을 이 놀라운 서비스에 쏟아붓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SNS의 미래는 어둡다. 바로 벤처캐피탈 때문이다.

프렌티스 부사장은 “벤처캐피탈이 실리콘밸리에 얼마나 많은지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리고는 “이 수많은 벤처캐피탈은 안 좋은 습성을 갖고 있는데 그게 바로 ‘무리짓는 습성'(Swarming Instinct)”이라고 꼬집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이해가 갔다. 벤처캐피탈들은 지금 모두 성공 신화를 안겨 줄 ‘대박 기업’을 찾아 헤맨다. 그리고 미국 경제가 IT 산업 중심으로 살아나면서 투자금이 다시 몰려들어 이들의 주머니에 들어 있는 돈도 최근 수년 동안 가장 많은 상태다. 이 때문에 벤처캐피탈들은 “투자를 고려할 때 절반 정도는 그냥 날릴 각오를 하고, 48%에서는 본전만 찾겠다고 생각한다. 다만 단 2%의 대박을 바랄 뿐”이라는 게 프렌티스 부사장의 설명이다.

이런 벤처캐피탈의 부릅뜬 눈에 엔지니어들이 놀아난다. 어쩌면 엔지니어들이 벤처캐피탈을 놀아나게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실리콘밸리에서 엔지니어와 투자자들은 거대한 무리 가운데에서 함께 공생하는 관계다. 이들이 지금 하는 대부분의 일이 바로 ‘소셜 뭔가’(social something)이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소셜 게임, 소셜 네트워크, 소셜 미디어, 소셜 뮤직, 소셜 무비 등 앞에 ‘소셜’만 붙으면 서비스가 뭔가 있어 보이는 상황이 지속돼 왔다. 페이스북의 성공 덕분이었다. 게다가 페이스북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패스나 핀터레스트 같은 2차 성공 사례가 끊임없이 등장하는 게 이런 소셜 열풍을 계속 불러 일으킨다.

문제는 투자자의 요구와 엔지니어의 개발 방향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 괴리다. 프렌티스 부사장은 “문제는 SNS가 제한적이란 점”이라며 “소셜네트워크라는 건 일종의 중력과 같은 것이라서 사람들이 서로를 끌어당겨야 의미가 있다”고 했다. 페이스북을 쓰다가 다른 SNS를 쓰려면 친구가 나를 초대하고, 끌어당겨야 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페이스북 같은 서비스가 하나 더 생긴다고 쉽게 그쪽으로 옮겨갈 리가 없다. 특별한 기능을 갖춘 서비스가 등장한다면 돈도 많고 엔지니어도 뛰어난 페이스북이나 트위터가 그런 기능을 순식간에 따라서 추가하게 마련이다.

문제는 이 점이다. 벤처캐피탈은 늘 “2%의 홈런을 날리고 싶어한다.” 그런데 2%의 홈런은 이미 페이스북과 트위터가 날렸다. 핀터레스트가 있다고? 아직은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다. 하지만 더 확실한 건 핀터레스트 뒤로 등장하는 SNS의 성공 가능성은 핀터레스트보다 더 낮다는 점이다. 물론 SNS에 틈새 시장은 존재한다. 프렌티스 부사장은 “예를 들어 ‘애완견 애호가 SNS’ 같은 SNS는 살아남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문제는 이런 틈새 SNS가 벤처캐피탈로 하여금 홈런을 치도록 도와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투자자들은 홈런을 원한다. 그런데 이미 8억 명의 사용자 가운데 4억 명 이상이 페이스북에 매일 접속하고 있다. 결국 남는 건 ‘펑’. 거품의 붕괴 뿐이다. 그 때 벤처캐피탈은 쪽박을 차게 될 것이다.

폐쇄적인 구글플러스, 개방적인 페이스북: GNS vs SNS

어느 순간부터 페이스북을 통한 블로그 유입이 1위가 됐습니다. 그냥 조용히 그렇게 돼 버렸어요. 페이스북은 스며듭니다. 페이스북으로 뭘 한다고 요란하게 광고하지 않아도 계속 성장하고, 계속 늘어나며, 조용히 모두가 쓰는 서비스가 돼 갑니다. 그렇게 얼마 전 가입자 8억 명이 넘었죠. 정말 놀랐습니다. 도저히 이 미친 듯한 성장세는 꺾이질 않는군요.
반면 구글플러스는 몇 가지 아쉬움이 있습니다. 4500만 명이 구글플러스에 있다고 하는데, 무엇보다 제 친구들이 없어요. 딱 한 명 있는데 Geek입니다. 직장도 그쪽이고요. 회사 동료는 단 두 명이 등록돼 있을 뿐입니다. 둘 다 이 쪽 테크 관련 기사를 쓰거나, 썼던 사람들이죠. 동창도 단 한 명이네요. 게임회사 다니는. 그나마 이 사람들이 모두 페이스북에서는 열정적으로 글과 사진을 올리는데 구글플러스에선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 정도면 이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그냥 GNS일 뿐.

소셜네트워크의 가장 큰 성공은 사용자들의 열정적인 전파에서 나옵니다. 아직도 지금 구글플러스에서 서클로 연결돼 있는 사람들을 제외한, 이 서클 외부의 사람들로부터 “구글플러스 좀 써봐”라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왜 그럴까요?

최근 짧은 글을 구글플러스에 올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전 그러지 않아요. 이유는 단순합니다. 구글 플러스에 올려야 할 짧은 글도 제 경우에는 그냥 블로그에 올리기 때문이죠. 블로그가 그러기에 훨씬 더 적절한 플랫폼입니다. 댓글도 올릴 수 있고, 트랙백도 보낼 수 있고, 고유주소도 훨씬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블로그에서는 구글플러스와 같은 활발한 ‘소셜 상호작용'(social interaction)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얘기는 있는데, 그것도 말이 되질 않습니다. 이 블로그는 페이스북 소셜플러그인을 사용해 댓글 시스템을 바꾼 뒤로는 충분히 소셜 상호작용이 일어나고 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이 상호작용을 통한 유입량이 엄청납니다. 트위터가 속보를 전파하는 도구라면, 페이스북은 글에게 긴 생명을 부여하는 마술지팡이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걸 감안한다면 구글플러스가 해야 하는 역할은 텀블러나 블로그 같은 외부 서비스를 직관적으로 쉽게 지원해주는 소셜 플러그인을 만드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구글플러스가 지금 하는 일은 소셜 플러그인이 필요가 없어지도록 구글플러스를 잘 만들어서 이 안으로 사람들을 가두려는 게 아닌가 싶어요. 이건 구글이 평소 얘기해 오던 개방성(openness)과도 어긋납니다. 본인들은 펄쩍 뛰시겠지만, 제 눈에는 구글플러스가 페이스북보다도 더 폐쇄적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SNS가 도대체 뭘 해야하는지에 대한 기본적인 고찰이 없는 느낌입니다. 페이스북의 가장 큰 경쟁력은 신뢰였어요. 제가 블로그의 댓글 시스템을 페이스북으로 바꾼 가장 큰 이유도(심지어 디스커스마저 집어치우고) 신뢰였습니다. 페이스북은 실명 서비스가 아니지만, 사실상 실명 서비스와 흡사하기 때문이죠. 페이스북은 그 자체로 신뢰를 줍니다. 페이스북이 초창기부터 가장 신경을 썼던 부분도 신뢰였습니다. 하버드대 학생들만 가입시키기, 확장은 아이비리그 내에서만 하기, 그 다음 확장도 대학생들만 대상으로 하기, 이 과정에서 절대로 시스템은 다운시키지 말기… 페이스북에서 가장 중요한 건 실명보다 더 확실한 아이덴티티 증명 방법인 얼굴 사진이었고, 이를 올리도록 하기 위해 ‘poke’를 포함한 각종 기능을 만들어냈습니다. 데이트 상대 찾으라고 한 거라고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신뢰가 필요한 만남 중에 가장 부담없는 만남이 뭐죠? 그게 바로 데이트 상대 구하는 것 아닌가요?

이 과정을 뻔히 봤던 구글은 다 알면서도 다른 길을 택합니다. 구글 초대 기능을 통해서만 가입시키기, 확장은 초대장으로만 하기, 그 다음 확장은 그냥 모든 유저들을 다 받아들이기… 프리메이슨처럼 시작해놓고는 어느날 갑자기 비밀결사에 아무나 들어올 수 있게 해준다고 합니다. 물론 구글 측도 실명 아이덴티티의 중요성은 알고 있었지요. 하지만 그걸 조용히 얼굴 사진을 올리도록 해서 만들어놓은 페이스북과는 달리 구글은 동네방네 “구글플러스는 아마도 실명으로 해야 할 걸요?”라는 선전선동만 하고 다녔습니다. “데이트 신청 받아주실래요?”라고 묻는 사람과 “이력서 줘 보세요”라고 말하는 사람. 누구랑 저녁식사를 같이 하고 싶으세요?

의사들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 Sermo

약을 복용했는데 특이체질이라서 10만 명에 한 명 쯤 발생하는 부작용을 겪게 된다면 어떤 느낌일까요?

제품의 불량이라면 1000개에 1개 정도면 참을만한 수준이지만, 사람의 건강과 생명은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것이라서 1000번에 1번 심각한 부작용을 겪는게 ‘참을만한 수준’일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신약이 세상에 나오려면 수많은 임상실험을 거치는 것이기도 하죠. 그래도 문제는 어디선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더 많은 실험을 거쳐 완벽한 약을 만드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일단 어디선가 발생한 부작용을 빠르게 보고받고 대책을 마련할 수 있다면 훨씬 효율적이겠죠. 세상에는 오늘도 계속해서 약을 처방하는 수많은 의사가 있을 테니까요. 문제는 의사들이 이런 경험을 나누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제약회사에 문제점을 보고해봐야 제약회사에서는 충분한 사례가 보고될 때까지는 드문 부작용을 크게 알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겠죠. 실제로도 약의 부작용 때문인지, 다른 문제 때문인지 쉽게 결론내릴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다고 FDA나 한국의 식약청 같은 곳에서 이런 수많은 예외사례를 하나하나 검토하기도 인력과 예산 문제 등을 감안하면 쉬운 일이 아닐 겁니다.

그래서 다니엘 팔레스트런트는 인터넷을 이용해 서비스를 하나 만듭니다. 일종의 의사들을 위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였죠. 페이스북도 어차피 처음에는 하버드대학 학생들을 위한 SNS였으니 특정 직업을 위한 SNS를 만드는 것 자체가 그렇게 별다를 것도 없었습니다.

이 서비스가 특별해진 건 가입할 때 의사 면허 등 구체적으로 자신이 의사임을 증명할 수 있는 서류를 요구하면서도 정작 서비스 상에서 활동할 때에는 의사 개인을 익명으로 활동할 수 있게 해줬기 때문입니다. 가입 때에만 의사라는 증명을 요구할 뿐 일단 이 증명만 마치고 나면 스스로 정한 닉네임만으로 활동할 수 있게 해주죠. 실명이었다면 제약회사의 소송이 두려워 아무 얘기도 못했을지 모르는 의사들이 자유롭게 약물 부작용의 가능성에 대해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게다가 의견을 나누는 사람들이 모두 의사들이어서 괜한 말을 하지 않을 거라는 기대도 있었습니다. 엄청난 변화가 생긴 거죠. 혹시나 생길 수 있는 부작용을 막기 위해 의견에 대한 평가도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만약 의도적으로 잘못된 약물 부작용 정보를 올리는 사람이 있다면 다른 의사들이 이를 의심해 나쁜 평가를 주고, 이게 쌓이면 해당 닉네임은 신뢰도가 낮아지는 시스템이죠.

그러자 결과적으로 10만 명이 넘는 미국 의사들이 이 사이트에 가입하게 됐습니다. 혼자 떨어져 환자를 돌봤더라면 알지 못했을 다양한 진료 경험이 인터넷을 통해 공유되는 건 물론 특정 약물에 대한 부작용이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날 경우 전문가 집단 사이에 일종의 ‘경고’가 빠른 속도로 확산되기 시작한 겁니다. 모두가 이 서비스를 좋아했습니다. 의사들은 신뢰할만한 동료들의 의견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아했고, 환자들은 개별 의사들의 경험이 간접적으로나마 풍부해지기 때문에 의료행위에 대한 신뢰를 더 가질 수 있어서 좋아했죠. 일부 제약회사들은 약물 부작용에 대한 ‘잘못된 소문’이 돌 수 있다며 불편하게 생각했지만 사람들은 이들의 주장을 그다지 설득력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의사들은 이 서비스를 이용할 때 돈을 내지 않습니다. 가입비도, 이용료도 없습니다. 신뢰할만한 좋은 경험을 무료로 얻을 수 있으니 가입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대신 돈은 제약회사나 연구소, 정부기관 등이 지불합니다. Sermo의 서베이나 이 서비스를 통해 모아진 전문가 의견 등이 워낙 품질이 높다보니 기꺼이 돈을 내고 사겠다는 것이죠.

비슷한 모델을 다른 전문가 집단에도 적용시킬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예를 들어 학교의 급식을 담당하는 영양사들만 접속할 수 있는 소셜네트워크라면, 주어진 예산 안에서 짤 수 있는 훌륭한 식단이라거나 지역별로 나는 특산 재료 위주로 식단 만드는 법 등을 이들이 고민해서 아이들에게 예산 범위 내에서 더 좋은 밥을 먹일 수 있지 않을까요? 기술이 엔지니어의 손 안에서만 머물 때 기술은 그저 상품이 됩니다. 하지만 기술이 전혀 다른 분야와 결합해 퍼져나가면 기술은 문화가 되죠. 한국의 다니엘 팔레스트런트는 어디 있을까요?

저는 기계가 아니라 귀가 있고, 눈이 있는 사람입니다.

설 연휴 마지막날이 당직이라 오늘부터 하루 일찍 연휴에 들어갔습니다. 어차피아내도 출근했고, 집에 있어봐야 늘어질 게 뻔한지라 일부러 지하철을 타고 좋아하는
카페가 있는 곳까지 나왔습니다. 이 카페엔 콘센트가 하나뿐인데, 조금 전 학생 둘이
들어왔습니다. 제가 앉아 있는 자리 바로 옆자리에 앉으려다 둘이 뭔가를 큰소리로
상의합니다. 제가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습니다. 내용은 대략 이랬습니다.

 

"아 노트북 써야하는데 어쩌지, 나가야 하나. 나 꼭 노트북 써야 하는데…",
"다른 데 갈까? 세시간 반 동안 앉아있을 곳이 여기 말고 없는데…",
"글쎄, 어쩌지. 전기 있어야 하는데."

 

제 바로 옆에 서서 하는 얘기였습니다. 그냥 저를 보고 "저희도 컴퓨터를
써야 하는데 혹시 다른 자리를 쓰시면 안될까요?"라고 물어봤다면 전 이미 이
자리에서 한시간 정도 충전을 한지라 흔쾌히 그러라 했을 겁니다. 왜 저를 보고
말을 걸지 않은채 들으라는 듯 저렇게 얘기하는 걸까요? 결국 그들은 제 얼굴을 한
번 쳐다보지도 않은 채 제 한걸음 옆에서 둘이서만 대화를 하다 자리를 떴습니다.
제가 미처 대화에 끼어들 틈도 없었습니다.

 

갑자기 다른 기억들도 떠오릅니다. 만원 지하철을 탈 때나,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면, 사람이 붐비는 곳에서 "아, 사람 왜 이렇게 많아"라고 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마치 수많은 다른 사람들이 들으라는 듯 큰 소리로 얘길
하시죠. 물론 그분들도 그 많은 사람을 이뤄가는 한 명입니다. 이럴 때면 전 마치
NPC가 된 느낌을 받게 됩니다. NPC란 온라인게임 속에 등장하는 컴퓨터가 만들어낸
캐릭터인데, 사람이 조작하는 플레이어 캐릭터와는 달리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행동이
정해져 있는 Non-Player Character입니다. 인격이 없는 프로그램이죠. NPC가
된 저는 이런 분들 앞에서 그저 사물이 되어갑니다. 앞에 있는 플레이어의 반응에
알아서 자리를 비켜주거나 몸을 움츠리든지, 그냥 조용히 듣지 못한 척 하며 가만히
있어야 하는 거죠…

 

최근 평소 즐겨 읽는 @gatorlog님의 블로그에서 ‘아이폰과
침묵의 소용돌이
‘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스마트폰이 늘어나면서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던 공간에서 대화가 사라져 버리고, 가까운 사람들의 모임에서 얼굴을 마주보고
하는 대화 대신 함께 앉아 일제히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트위터를 하는 이상한 현상을
다룬 글입니다. 제가 겪고 있는 경험들이 앞에 있는 ‘안면이 없는’ 사람들을 인격을
갖춘 대화상대가 아닌 일개 사물처럼 대하는 현상이라면, 이 글에 나오는
현상은 인격을 갖춘 ‘안면이 있는’ 대화상대를 눈 앞에 두고도 그들보다 오히려
사이버 커뮤니티 속의 대화 상대에게 훨씬 친밀하고 가까운 감정을 느끼는 현상이죠.

 

우리의 인간 관계가 점점 이렇게 변해가고 있는 건 아닐까요? 트위터가
대단하고, 페이스북의 성공이 놀랍다면서 관계망을 기술로 확장한다고 장밋빛 미래라도
도래할 것처럼 기대를 하고 있지만, 사실은 수십 수백년 간 이어온 사회적 관계와
규범을 무시한 채 눈앞의 대상을 사물화해 버리고 서로를 소외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싶은 거죠. 20세기의 우리는 도시화를 걱정했습니다. 지역 공동체가 모조리 파괴되고
도시라는 섬에서 모두가 익명의 그늘에 숨어 살아가는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시대가
지난 세기의 화두였죠. 그곳에서도 우리는 여러 가지로 새로운 커뮤니티를 이뤘지만
‘소외’의 문제가 그 이전 세기보다 훨씬 심각해졌다는 건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세기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요. 피와 살을 갖춘 다른 사람들을 NPC처럼
만들어버리고, 알고 지내던 사람들 사이의 관계조차 사이버 관계망보다 소홀히 취급될
수 있다면, 이건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새해입니다. 설 기간 동안에는 노트북을 덮고, 스마트폰의 데이터통신도 꺼놓은
채 가족과 친지들에게 집중해 보는 건 어떨까요. 물론, 저부터 지키기 어려워 보이는
일이긴 합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