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

밥 먹기 싫어하는 사람들을 함께 밥 먹게 해주는 스타트업, 셰프가 만든 고급 음식을 집으로 배달해주는 스타트업, 식당 예약을 해주는 스타트업… 수많은 요식업 관련 스타트업이 활약합니다. 우리는 평소에도 수없이 입버릇처럼 “이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라는 얘기를 하곤 합니다. 그 먹고 사는 일을 혁신하는 회사들이 인기를 끄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이렇게 먹는 음식과 관련된 스타트업을 일반적으로 푸드테크(Food Tech) 혹은 푸드 스타트업(Food Startup)이라고 일컫곤 합니다. 종류는 여러가지지만 크게 보면 모두 먹는 경험을 더 즐거운 경험으로 바꾸려는 일입니다. 배달전문 스타트업이 가장 큰 규모로 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것도 이런 이유일 겁니다. 좋은 음식을 먹으려면 요리를 직접 하거나, 또는 남이 만든 요리를 사먹어야 하는데, 요리를 사먹으려면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가야 하니까요. 배달앱들은 그래서 배달만 대신 해주는 게 아니라, ‘맛집’도 메뉴 선택 과정에서 추천해 주고 어디가 맛있는지 ‘리뷰’도 보여줍니다. 주문과 결제 과정의 편리함은 기본이며 배달 소요시간까지 알려줘서 식사를 준비할 수 있도록 해주죠. 이렇게 해서 식당의 배달 주문이 늘어나면 소비자도 이익이고 식당도 이익일 듯 합니다.

물론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수수료 문제, 리뷰 조작 문제 등은 단골로 제기되는 문제죠. 이 정도는 예상 가능합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배달 음식이 ‘식당의 명성에 먹칠을 한다’는 소송까지 벌어집니다. 예를 들어 미국 서부에서 인기를 끈 햄버거 체인점 인앤아웃은 최근 도어대시라는 음식배달 스타트업을 고소했는데, 도어대시가 인앤아웃의 로고를 대가없이 사용해 브랜드 가치를 도용했고 배달시간을 고려하지 않고 만들어지는 인앤아웃 음식을 배달하면서 소비자 만족도를 떨어뜨리고 있기 때문이란 이유에서였습니다. 식당 입장에서는 좋은 음식을 집에서 편하게 먹도록 한다는 푸드 스타트업이 오히려 식사의 질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보였던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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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햄버거를 배달하면 식어서 맛이 없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음식을 단순 배달해주기 보다는 소비자가 음식을 먹게 될 순간의 경험까지 고려해 조리에 반영하는 스타트업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먼처리(Munchery) 같은 스타트업이 대표적인데요, 이들은 반조리 상태의 음식을 각 가정에 배달합니다. 15분 동안 요리할 수 있는 상태로 모든 걸 만들어서 배달하는 먼처리는 고기도 미리 썰어놓고 빵도 구워놓은 채로 음식을 포장합니다. 소비자는 이 음식을 받아서 조립하듯 재료를 잘 배치해 가열만 하면 됩니다. 무엇보다 이런 음식은 유명 레스토랑의 셰프가 고안하는 특별한 레시피에 따라 준비된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레스토랑 수준의 식재료 준비 및 양념이 모두 끝난 음식을 집에서 조금만 더 손 보면 멋진 저녁식사를 할 수 있으니 인기를 끌 수밖에요. 단순 배달음식보다 최종 완성된 요리의 수준이 월등히 높을 뿐만 아니라, 준비하는 사람들은 간단히 요리하는 즐거움까지 맛볼 수 있어서 최근 먼처리와 비슷한 스타트업들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습니다.

요리 준비를 누가 대신 해준다면 나도 ‘냉장고를 부탁해’를 찍을 수 있다!

집에서 먹는 음식은 이렇게 해결한다고 쳐도, 밖에 나가서 식사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결국 맛집 정보를 찾아 헤매게 됩니다. 정보를 담고 있는 것은 역시 미디어죠. 신뢰도가 중요하고, 변화되는 환경에 따라 업데이트가 신속하게 진행돼야 하며, 내 취향과 잘 맞는 정보까지 얻을 수 있다면 최고입니다.

예전에 이 분야의 선두주자는 옐프(Yelp)였습니다. 세계의 수많은 서비스들이 옐프에게서 배우고자 했죠. 믿을 만한 리뷰의 관리, 새로 생긴 음식점과 문 닫은 음식점 업데이트를 빠르게 도와주는 충성스런 사용자 커뮤니티 등. 하지만 요새는 모든 푸드 스타트업이 일종의 미디어가 됐습니다. 배달앱은 배달음식점 리뷰앱이 됐고, 식재료 장보기 앱은 좋은 식재료 가게의 리뷰앱이 됐으니까요. 그래서 최근의 레스토랑 리뷰를 하는 스타트업은 뉴미디어처럼 변화합니다. 뉴스나 정보지 못잖은 기능을 갖추면서 진화하는 것이죠. 독자에게 개인의 관심사에 따른 뉴스를 보여준다거나, 뉴스를 하나 읽고 나면 관련 뉴스를 추천해 주는 뉴미디어 서비스처럼 레스토랑 리뷰 서비스들도 진화합니다. 평소 라자니아를 잘 하는 레스토랑을 찾았던 사람에게는 새로 생긴 이탈리아 레스토랑을 추천해주고, 단골 중국 음식점의 예약이 꽉 찼다면 다른 레스토랑을 추천해주는 식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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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에 목숨 거시는 사장님…

한 술 더 떠 레지(Resy) 같은 스타트업은 원하는 식당에 원하는 날짜 예약을 바로 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냥 예약하려면 한 달은 미리 앞서서 예약해야 하는 인기 레스토랑들이 대상입니다. 비결은 단순합니다. ‘예약비’를 따로 받는 것입니다. 레스토랑 입장에서 예약을 적게 받는 이유는, 일반적인 예약 시스템을 도입할 경우 생기는 이른바 ‘노쇼’(No-Show) 고객들 때문입니다. 나타나지 않는 고객들이 손해를 주니까요. 반면 그런 사람들 때문에 빈 자리를 찾는 고객은 식당 앞에서 줄을 서야 하죠. 레지는 예약 과정에 돈을 받으면서 이런 불편을 해결해 줍니다.

말이 나온 김에 식당에서 돈을 내는 과정도 한 번 볼까요? 한국에서야 거의 모든 레스토랑에서 식사가 끝나면 계산대로 나가서 돈을 냅니다. 이게 일반적이죠. 반면 미국에선 다릅니다. 종업원을 불러서 계산서를 가져다 달라고 하고, 주문 내용을 확인합니다. 그 뒤 다시 종업원을 불러서 현금 혹은 신용카드를 내죠. 그러면 계산을 마친 영수증을 종업원이 다시 가져다 줍니다. 여기에 팁을 남겨놓고 일어서야 계산이 끝납니다. 식사를 다 마친 뒤부터 진행되는 이 과정은 길면 10분 이상도 걸립니다. 한국인의 시각으로 보면 속이 터질 노릇이죠. 미국인들도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커버(Cover)라는 스타트업은 이 결제 과정만 담당합니다. 커버의 약 300개에 이르는 가맹 레스토랑에서는 고객들이 식사가 끝나면 커버 앱으로 결제를 하고 그냥 일어섭니다. 애플페이로 낼 수도 있고, 신용카드 결제도 괜찮습니다. 미리 식당을 골라놓은 뒤 식당에 들어가면서 “커버로 낼 거에요”라고 얘기하면 됩니다. 주문한 음식은 자동으로 계산되고, 팁도 식사중 몇 퍼센트를 줄지 정하면 됩니다. 친구들끼리 나눠내기 기능도 지원하죠. 종업원을 불러서 계산서를 가져다 달라고 하지 않아도 된다는 단순한 편리함 때문에 이 회사는 이미 매월 200만 달러 이상의 결제를 처리하는 회사로 성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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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지 않고 바로 돈 내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사업이 된다니!

하지만 어떤 스타트업들은 전혀 새로운 관점으로 음식을 바라보기도 합니다. 과연 맛이란 무엇일까, 영양이란 무엇일까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죠. 이들에게 맛은 ‘요리사의 손맛’이라기보다는 특정한 환경에서 일어나는 분자구조의 화학적 결합입니다. 영양이란 목초를 먹으면서 청정 지역에서 자라난 1등급 한우 대신, 단백질 함량이 높은 고단백 식품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좀 드라이하고 멋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이게 음식의 미래일지 모릅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모던메도우(Modern Meadow)라는 회사는 현대식 초원이라는 이름 뜻에 걸맞게 고기를 ‘생산’합니다. 푸른 풀이 가득한 초지가 아니라 실험실에서 생산한다는 것이 차이죠. 방법은 간단합니다. 소나 돼지 등 육류에서 떼어낸 생체조직을 배양해서 3D 프린터로 고기 모양으로 재구성해내는 것이 이들의 일입니다. 마치 샬레 위에서 세균을 배양하는 식이죠. 그런데 이렇게 햄버거 패티와 소시지, 다진 고기 등을 실험실에서 공장처럼 생산하는 세상을 만든다면 공장식 축산의 폐해도 줄어들고, 고기 생산에 들어가는 어마어마한 물과 곡물의 낭비도 줄어들 거라는 게 이들의 생각입니다. 결과적으로는 인류가 좀 더 지속가능한 삶을 살게 되겠죠.

아무래도 실험실에서 세균 배양하듯 배양하는 고기는 좀 꺼려진다면, ‘진짜 단백질’인 곤충으로 만든 고기는 어떨까요? 식스푸드(Six Foods)라는 회사는 하버드 동기생 세 여성이 창업한 회사입니다. 이들은 여섯개의 다리를 가진 동물들이야말로 인류의 식량 문제를 해결해 줄 거라는 믿음을 갖고, 회사 이름도 그렇게 정했습니다. 바로 곤충 얘기죠. 이들이 처음 만든 음식은 처프칩(Chirp Chips), Chirp는 곤충소리의 의성어이니, 한국어로 옮기자면 귀뚤귀뚤칩 정도가 되려나요. 콩과 쌀 구운 귀뚜라미가 원료인 이 칩은 소금맛, 비비큐맛, 체다치즈맛으로 팔리고 있습니다. 일반 감자칩과 비교해 단백질 함량이 세 배가 넘는다고 하니, 술안주나 심지어 식사 대용으로도 그만이겠네요. 징그럽다고요? 식스푸드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곤충을 이미 먹고 있는지 강조합니다. 빨간색 식용색소의 거의 전부가 연지벌레로 만들어집니다. 시금치통조림이나 가공음식 대부분이 일정 수 이하의 벌레가 함께 가공되는 걸 용인해서 만들어지고 있죠. 곤충을 먹는다고 큰 일이 생기지 않을 뿐더러, 우린 이미 벌레를 많이 먹고 있다는 겁니다.

먹는 일은 정말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매일 수차례 씩 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그렇죠. 누구도 먹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먹는 일을 다루는 기업들이 많아지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일상이 행복해지는 일이 되리라 기대합니다.

터닝메카드

전에 이런 글을 한 번 쓴 적이 있습니다. 값도 거의 차이나지 않는 손오공의 완구와 일본 반다이의 완구 사이의 차이에 대한 글이었죠. 그게 벌써 1년 전이네요. 크리스마스 때였습니다. 완구업체 대목이죠. 올해도 크리스마스가 오는 모양입니다. 페이스북을 보니 지인 분께서 아들 선물로 터닝메카드를 사셨다는 사진을 올리셨네요. 아들이 눈치챈 것 같다는 고민에 빠지셨습니다. 저도 뭔가 사서 아들 몰래 잘 숨겨놨습니다. 그런데, 사진 속 문구에 눈이 갑니다. “순수 국내 기술로 기획, 개발한 변신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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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조선일보에는 손오공 창업자 최신규 회장이 ‘직접’ ‘3년 간’이나 개발에 매달렸다는 터닝메카드 이야기도 나왔습니다. 인터뷰를 보면 최 회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최 회장은 “언제까지 외국에만 의존할 수 없다고 보고 한국 정서에 맞는 캐릭터 완구를 만들어 성공시키자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터닝메카드의 오프닝 주제가가 나올 때 보면 재미있는 점이 눈에 들어 옵니다. 처음 나오는 타이틀은 기획 초이락컨텐츠팩토리입니다. 지난 손오공 관련글에서도 설명했지만, 이 회사는 최 회장의 아내와 아들이 소유한 비상장 비공개 가족 기업입니다. 기업공개된 상장사 손오공은 이 초이락컨텐츠팩토리가 기획한 애니메이션을 사들여 완구로 만들고 판매합니다. 이것 자체가 큰 문제는 아닙니다. 애니메이션이 뛰어나다면 그게 대주주 개인 회사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아니죠.

스크린샷 2015-10-26 오후 3.01.36스크린샷 2015-10-26 오후 3.01.54각본두번째로 나오는 이름은 구성작가입니다. 영어로 Atsushi라고 써있죠. 마에카와 아츠시, 일본의 애니메이션 각본가입니다. 동일인물이 맞는 건가 궁금했는데, 일본어 위키피디아에도 Atsushi라는 명의로 한국의 터닝메카드 구성에 참여했다고 나와 있네요. 한국 정서에 맞는 캐릭터 완구를 일본 작가에게? 그것도 평소에는 일본어로 前川淳라고 이름을 쓰는 작가의 이름을 굳이 영문으로 적어서 내보냅니다. 왜 일본어 이름을 그대로 못 써주는지 의아할 뿐입니다. ‘한국 정서에 맞는 캐릭터 완구’를 만드는 일에 일본인이 참여한 게 문제라고 생각한 걸까요? 심지어 각본가들도 한글도 일본어도 아닌 영어 표기로 엔딩 크레딧에 잠시 스쳐지나갑니다. 음…

마에카와 아츠시는 또한 국내에 슈팅 바쿠간이라고 소개된 만화 爆丸バトルブローラーズ의 제작자이기도 합니다. 완구 제조와 동시에 기획돼 만들어진 이 만화는 재미있게도, 카드와 바쿠간이 만나면 자석의 힘으로 변신하는 만화입니다. 카드와 자동차가 만나는 터닝메카드와 똑같은 설정이죠. 또 주인공 어린이들이 각각의 캐릭터와 친숙해지는 구성도 똑같습니다. 개별 스토리는 다르다고 할 수 있겠지만, 전체의 틀은 슈팅 바쿠간과 터닝메카드가 상당히 유사합니다.

조선일보 인터뷰를 조금 더 읽으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개발 과정은 쉽지 않았다. 수년간 히트작이 없었고 회사는 2013~ 2014년 연속 적자를 내면서 자금난에 시달렸다. 지인에게 돈을 빌려서 겨우 직원들 월급을 주고 완구 재료를 조달하기도 했다. 그는 “주말이나 명절에도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밤새워 캐릭터를 개발하고 실험을 진행했다”며 “이게 안 되면 모두 끝난다는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이해가 잘 안 갑니다. 인터뷰는 ‘손오공의 최신규 회장’ 얘기인데, 이 개발 과정은 손오공의 개발과정 같지가 않습니다. 상장사인 손오공이라면, 연속적자를 내긴 했습니다. 하지만 손오공은 터닝메카드를 개발하지 않았어요. 개발은 초이락이 했고 손오공은 유통회사에 불과합니다. 개발사인 초이락 얘기라면 “수년간 히트작”은 없었겠지만, 앞선 글에서 설명했듯 “카봇 제작”을 담당했습니다. 터닝메카드 수준은 아니었어도 아주 인기있던 완구였죠. 심지어 “가족들과 밤새워 캐릭터를 개발”했다는데, 그 가족이 마에카와 아츠시 씨인 건가요?

무엇보다 손오공은 초이락과 지분관계가 없습니다. 초이락이 돈을 아무리 벌든, 그건 최 회장 가족들의 주머니로 들어갈 뿐 손오공의 수익과는 별 관계가 없다는 것이죠. 더 큰 문제는 두 회사 사이의 지분관계가 없기 때문에 양사의 거래가 어떤 식으로 일어나는지 공개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손오공의 소액주주들은 이런 문제 때문에 주총에서 초이락과의 거래내역을 밝히라고 했다지만, 단체행동에 실패한 것인지 통과되지는 못한 모양입니다. 현재 손오공의 지분 구성을 보면 최 회장이 약 17%, 소액주주들이 83%의 지분을 갖고 있지만 흩어져 있는 소액주주들의 지분으로는 뭘 어떻게 하기가 쉽지 않겠죠.

그냥 일본의 인기 애니메이션을 만든 탁월한 기획자를 영입해서 글로벌 상품을 기획했다고 말하면 안 되는 걸까요. 손오공은 손오공이고, 초이락은 초이락이라고 얘기하면 안 되는 걸까요.

다행히 아들은 크리스마스에 터닝메카드를 사달라고 조르지는 않고 있습니다. 아빠가 선물을 받은 느낌이네요.

아직도 중국에게 따라잡힐 걱정을 하는 바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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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해도 너무 간단했다. 11월 11일 어마어마한 세일을 할테니, 한 번 사보라고 끊임없이 알림과 광고와 DM이 날아왔다. 그래서 제품을 몇 개 골라뒀다. 오후 5시에 알림이 왔다. 지금 세일 시작이라고. 접속해서 장바구니 결제를 눌렀다. 조금 버벅이더라. “접속자가 많아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식으로. 2초 쯤 버벅였나, 그리고 결제가 끝났다. 딱 1분 걸렸다. 1분이 안 걸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러자, 모든 제품 결제 완료 이메일과 한국 카드사의 결제 인증 문자메시지가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 알리바바의 해외판인 알리익스프레스. 동시에 몇 명이 접속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세일시작” 알림을 울려놓고는 적어도 수십만명은 몰려들었을 것 같은 이 순간 결제를 그냥 스윽 처리하는 게 알리바바의 기술이다.

물론 중국의 경쟁력은 가격이다. 그런데 그게, 정말로 싸더라. 워낙 싼 게 이날은 더 쌌다. 11월 11일, 미국의 블랙프라이데이 같은 걸 우습게 만드는 중국의 ‘광군절'(光棍節)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난 예전부터 갖고 있던 캐논 카메라 렌즈를 지금 쓰는 소니 카메라 바디에 연결해서 쓰고 싶었는데 몇년전만 해도 이런 ‘마운트 어댑터’ 가격이 수십만원이었다. 그런데 알리익스프레스에서는 10만 원 이하에 팔더라. 짝퉁이면 어때, 어차피 렌즈와 센서 사이 거리만 확보해주는 기계인데…라는 생각이었지만, 10만원을 턱 지르지는 않았다. 그러다 이번에 할인 메일이 날아왔다. 27달러. 60% 세일을 했다. 그러다보니 견물생심. 와이프가 무선이어폰 사달라고 했는데… 한 번 알아봤다. 12달러 짜리를 10달러에 할인… 에이, 사는 김에 맨날 잃어버리고 끊어지고 망가지는 아이폰 케이블도 사볼까… 10개에 만원… 이 모든 게 배송료 무료다. 꾸준히 장바구니에 이런 걸 담아두도록 한달 가까이 치밀히 마케팅을 벌이고, 큐레이션관을 만들고, 개인화 추천을 하는 게 알리바바다. 그렇게 해서 전 세계로 물건을 판다. 총액이 일정금액을 넘을 때마다 10달러, 20달러씩 추가 할인 쿠폰도 마구 뿌린다. 그런데 그 엄청난 주문 폭주를 실시간으로 처리하면서도 시스템이 아무런 오류도 일으키질 않는다. 이 정도라면, 앞으로는 식음료를 제외한 모든 걸 알리바바에서 사고 싶을 정도다.

중국의 기술에 한국이 따라잡힐 거라고, 우리가 추격을 피할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고, 아직도 ‘전문가’들이 엄숙하게 선언하고 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무슨 서비스를 어떻게 쓰든 이미 중국이 한 수 위다. 지마켓보다 알리익스프레스가 훨씬 편하고, 멜론보다 시아미가 더 낫다. 왜 화웨이나 샤오미 제품보다 값을 두배를 주고서 삼성과 LG 스마트폰을 사야 하는지 정말 모르겠고, 한국 기업들은 만들지도 않는 스마트 전등과 스마트 체중계들이 우리 집을 벌써 꽉 채워가고 있다. 그런데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한다. 이봐요, 버스 떠났어요. 그렇게 얘기하는 게 아니라, “죽어라고 쫓아가야 따라잡을 수 있다”고 얘기해야 한다고요. 예전에 우리가 미국 일본 쫓아가려고 기를 썼듯, 벌써 저만치 앞서가는 중국을 따라잡을 때가 왔어요.

난 심지어 요샌 무슨 말인지도 몰라서 가사도 이해할 수 없는 중국 대중음악마저 전반적인 케이팝보다 좋더라. 내가 중국 사대주의인지도 모르겠지만, xiami.com 같은 사이트에서 그냥 틀어주는 인기 음악을 들어보다가 melon.com이 틀어주는 인기 음악을 들어보면 알 수 있다. 한국 음악들이 평균적인 기교는 나을지 몰라도, 음악의 다양성으로 보자면 중국과 한국은 이미 비교가 되질 않는다. 그러니까 멜론은 85점에서 90점짜리 범생이들만 모인 파티같고, 시아미는 30점부터 100점짜리까지 모여 있는 건 물론, 빵점 받고도 MIT에서 모셔가는 천재들이 함께 어울리는 곳 같다. 우리가 90점짜리가 더 많다고 아무리 우겨봤자, 답은 뻔하다. 보통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디 가서 놀아야 더 재미있다고 느낄는지.

중국은 일당독재 사회주의 국가다. 한국은 다당제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이고. 그런데 왜 다양성과 창의성에서 중국인들이 우리보다 더 나아 보이는 걸까.

일과 삶의 균형

일에서 성공하려면 밤낮없이 일만 생각하는 일 중독자가 돼야 할까요? 일과 삶의 균형을 갖춰야 진정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것 아닐까요? 도대체 얼마나 일하는 것이 성공을 위한 길인지 궁금해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경영의 신’ 취급을 받는 GE의 CEO 잭 웰치는 망설이지 않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과 삶의 균형(Work-Life Balance)이란 말은 없어요. 오직 일 또는 삶 사이의 선택(Work-Life Choice)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에 따라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지지요.”

아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잭 웰치는 매년 20-70-10 규칙이라는 성과평가 방식을 통해 하위 10% 직원을 잘라내고, 성과를 못 내는 자회사를 문 닫아버리길 꺼리지 않던 무자비한 최고경영자였으니 할 수 있는 소리였을지도 모릅니다.

다른 기업들은 당연히 다른 얘기를 합니다. GE 못잖게 미국이 자랑하는 또 하나의 ‘100년 기업’으로 IBM이 있습니다. 이 회사는 직원들을 위해 무엇이든 해주려고 듭니다. 엄마 직원을 위한 멋진 탁아소는 기본이고, 자녀의 명문대 진학을 돕는 ‘입학상담사’를 회사가 고용해 주기도 하죠. 회사에 나오지 않고 재택근무를 할 수 있는 건 기본이고, 아이의 하교 시간에 맞춰 부모가 퇴근 시간을 자율적으로 설정할 수도 있습니다. 이 회사에서는 “직원이 가족에 대한 잔걱정에 신경쓰다 일에 대한 집중력을 잃는 게 회사에겐 더 큰 문제”라고 얘길 하죠.

IBM의 직원 탁아소

세상에 ‘올바른 방식’이란 건 쉽게 찾기 힘든 파랑새와 마찬가지입니다. 각자 자신의 처지에 따른 선택이 있는 법이고, 어쩌면 우리 옆에 있거나 혹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일과 삶의 균형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잘 살기 위해 일하지만 때때로 일이 너무 좋은 사람들은 그 일을 하기 위해 살아가기도 합니다.

과연 이 두 방법 가운데 어느 하나만이 정답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걸까요? 성공한 기업 대부분은 초기에 직원들이 하루 16시간 씩 일하면서 일주일에 100시간도 일했다고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주말을 포함해 잠 자는 시간을 빼놓고 모든 시간을 일에 쏟는 이같은 방식을 누구나 따라갈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그러니 과연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는 걸까요?

최근의 경향은 단연 일과 삶의 균형에 손을 들어 주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일과 삶의 균형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근로자를 착취하는 전근대적인 기업 문화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으니까요. 특히나 최근 성공한 IT 기업들은 ‘꿈의 직장’ 수준이라는 근무 조건을 갖추려고 경쟁적으로 노력하면서 이런 경향에 불을 붙였습니다. 구글은 공짜 점심을 제공하고 회사 안에 수영장을 갖춰 놓고 있으며, 페이스북은 직원들의 빨래를 대신해주고 애완동물과 함께 출퇴근해도 된다고 하죠. 이런 상황에서 일과 삶의 균형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기업은 이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좋은 인재를 잡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늘어났지요. 이제는 더이상 어떤 기업도 잭 웰치처럼 일과 삶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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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안에 있는 인공으로 물이 흐르는 수영 트레드밀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됐을까요? 천만에요. 문제는 여전했습니다. 여전히 아이를 키우는 여성들은 일터에서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남성 직원들의 행복도가 올라간 것도 아닙니다. 회사는 탁아소를 제공하고, 재택근무 제도도 도입했는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요.

지난해 영국의 글로벌 컨설팅업체 에른스트앤영은 대규모 설문조사를 실시했습니다. 기업들이 제공하는 일과 삶의 균형 프로그램에 대한 만족도를 물어본 것이죠. 그 결과 많은 회사들이 일과 삶의 균형을 잡기 위한 재택근무와 탄력근무, 탁아소 운영 등의 제도를 운영하고 있었지만 정작 직원들이 이런 제도에 대해 만족한다는 대답은 겨우 절반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이 조사팀은 “일과 삶의 균형이란 단순한 신화에 불과하다”는 도발적인 결론을 냅니다. 이 표현 자체가 직원들의 욕구를 만족시켜주지도 못하고 삶을 개선하지도 못한다는 내용이었죠. 이 조사는 많은 ‘일 중독자’들의 지지도 얻었습니다. 사실 일 중독이라는 표현 자체가 편견에 가득찬 표현이라는 얘기였죠. 일 중독이란 일을 하는 게 너무 좋아서 생활을 돌보지 않고 점점 일에만 빠져 들어 건강도 해치고 바람직한 가정생활이나 사교 활동마저 포기하는 경우를 뜻합니다. 하지만 정작 일 중독으로 불리는 사람들을 한 번 떠올려 보세요. 마약 중독이나 알콜 중독과도 비슷한 이런 극단적인 경우에 빠진 사람들은 극히 드뭅니다.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라도 이들은 건강 관리에 더 노력하고, 재충전을 해서 더 일하기 위해서 가정에서의 행복도 소중하게 여깁니다. 이런 반론에 따라 조사팀이 내린 결론은 일과 삶의 균형이 아니라 ‘일과 삶의 통합’이었습니다.

일과 삶의 균형이란 말은 그 표현 자체가 ‘일은 나쁜 것’이고 ‘삶은 좋은 것’이란 전제를 깔고 있다는 반성을 한 것이죠. 이 표현에는 일은 하면 할수록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것이라는 편견도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소명의식을 느끼는 보람찬 일을 통해 인생의 만족도를 높입니다. 일이 잘 되면 행복해지니까요. 그렇다면 일은 생각처럼 나쁜 것이 아니라 삶에 좋은 것이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단순히 일을 하는 시간을 늘이고 줄려서 삶이 행복해질까요? 조사팀의 연구에 따르면 근무 시간이나 회사에서 일과 삶의 균형을 지원하는 제도가 있느냐 없느냐의 유무가 개인의 행복감에 주는 영향은 사람에 따라 10%대에서 70%대까지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즉 제도는 행복과 별 관계가 없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맡은 일에 대한 만족감이 행복도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그렇다면 맡은 일에 대한 만족감은 어떻게 늘어날까요? 물론 직업 선택과 직장에서의 역할 등이 가장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그런데 이는 회사가 직원들을 위해 쉽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직원 개개인이 평생에 걸쳐 노력하면서 찾아가야 할 문제이기도 합니다. 반면 상대적으로 쉬운 방법도 있었습니다. 바로 리더들이 사생활과 가정 생활에 대한 얘기를 공적인 자리에서 발언하는 것입니다. 아이 얘기, 가족 얘기, 취미 얘기 등을 CEO와 임원들이 직장에서 거리낌없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얘기를 회사에서 하는 사람들은 프로페셔널하지 않다고 여기는 분위기만 해결되어도 업무의 만족도가 높아지는 뚜렷한 상관관계가 발견됐기 때문이죠.

실제로 페이스북의 최고운영책임자(COO) 셰릴 샌드버그는 엄마로서의 삶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세계에서 가장 바쁜 기업의 최고 임원으로 살아가는 법을 들려주고 보여주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녀는 오후 5시면 무조건 퇴근해서 아이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합니다. 물론 그렇게 아이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아이가 잠이 들면 다시 업무에 복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삶이 힘들어도 보람있다는 얘기를 회사에서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거리낌없이 하죠. 구글의 초기 멤버였고 지금은 야후의 최고경영자(CEO)인 마리사 메이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구글의 초창기 시절 근무할 땐 일주일에 100시간씩 일했다고 하지만, 지금 CEO가 된 메이어는 야후의 직원들에게 일과 삶의 균형을 찾으라고 강조합니다. 심지어 회사의 CEO로서 멋진 옷을 차려 입고 패션잡지의 표지모델로 등장하기도 했죠.

보그 표지모델이 된 마리사 메이어
보그 표지모델이 된 마리사 메이어

무엇보다 이렇게 성공한 여성들이 보여주는 가장 큰 특징은 가정과 사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공적인 자리에서 하는 것 또한 프로페셔널의 삶이라는 메시지를 직원과 사회에게 던진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엄마로서의 삶, 자녀들의 성장, 가족 안에서의 행복 같은 개인적인 삶을 공적인 자리에서 드러내는데 거리낌이 없습니다.(심지어 회사에서 엉엉 운 얘기 같은 것도 드러내놓고 합니다.) 이 부분이 사실 오늘날 글로벌 기업의 가장 큰 변화이기도 합니다.

성공한 여성들은 이제 더 이상 가정 이야기를 감추지 않습니다. 우리 팀장의 아이가 학교 축구 팀에서 주전 선수가 된 일은 국회에서 기업 법인세법 개정안이 통과된 일 만큼이나 중요한 일로 받아들여집니다. 즉, 이제 기업의 잘 나가는 직원들도 사생활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실 일과 삶의 통합이란 여기서부터 시작입니다. 개인의 삶이 직장에서의 삶 만큼 중요하다는 데 대한 모두의 동의 말입니다.

20회 부산국제영화제

처음 본 영화는 이웃집 토토로.

영화의 전당 야외극장에서 영화를 본 건 부산영화제에 몇 차례 다녀봤음에도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소리가 윙윙 울리는 게 좀 이상하긴 해도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특히 아들이 좀 떠들어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 환경이었다는 것도 좋았고. 무엇보다 난 이웃집 토토로를 이번에 처음 본 것이라서.

영화의 상황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엄마는 아프고, 아빠는 혼자서 딸 둘을 기르느라 시골의 낡은 집으로 이사간다. 당연히 고생이 눈앞에 펼쳐진 상황. 하지만 어린 딸들은 씩씩하고, 마을 사람들은 인심이 좋으며, 심지어 마을의 신들까지 이 가족을 도와준다. 그래서 아름다운 동심의 세계라거나 일본의 시골 풍경 같은 것들이 관객들에게 어필할지 모르겠는데, 적어도 내게는 그 부모들의 모습만 눈에 들어왔다. 불안한 상황이니까. 아내는 장기 입원중이고, 아직 어린 두 딸은 언니가 동생을 엄마처럼 키우며 스스로 자라나야 한다. 아빠는 누군가 돈을 벌어와야 하는 상황에 놓인 상태고.

영화가 참 좋았던 건 이 위기 상황 전체에서 모두들 그냥 웃고 넘어간다는 점이었다. 한없이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생활 태도다. 생각해보면 미야자키 하야오의 다른 영화들 중에 눈물과 분노가 없었던 영화가 있었던가 싶다. 조금 슬프고 외로운 부분이 있을지는 몰라도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어려운 상황을 웃음으로 넘긴다. 첫 영화였는데 온 가족이 함께 봤고, 그래서 더 좋았다.

두번째 본 영화는 El Compañante, 부산 상영명은 컴패니언.

쿠바 영화였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요소가 다 들어간 영화라서 골랐는데, 역시나 좋았다. 우선 소재가 권투다. 권투 영화가 재미없는 건 미션임파서블이 재미없을 가능성에 맞먹는다. 재미없으면 재앙이고, 대부분 평타 이상은 친다. 그리고 버디무비다. 남자들만의 우정이라는 것이 원래 유치하지만 남자들이 볼 땐 재미있는 법이다. 그리고 당연히 쿠바 영화니까 음악이 좋다. 선입견이 아니라 정말이다. 음악 나쁜 쿠바 영화는 미장센이 소비에트 체제선전 영화처럼 형편없는 프랑스 영화같이 존재하기 힘든 영화다.

주인공 중 한명인 오라시오는 흑인 복서. 금메달리스트지만 올림픽에는 못 나갔다. 80 모스크바 올림픽 땐 어렸고, 84 LA올림픽은 미국에서 열린 게임이라 못 나갔다. 쿠바는 공산국가다. 88 서울올림픽을 노리지만 영화 당시만 해도 극중 인물들이 “우리 동맹국은 북한이야. 남한은 미국 편이고. 한국은 아직 전쟁중이야”라며 참가가 안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다. 그 땐 당연한 일이었다. 또 한 명의 주인공 다니엘은 쿠바 당 간부를 아버지로 둔 백인이다. 전공을 쌓으려고 콩고 내전에 참전했다가 콩고 여인과 사랑에 빠졌고, 에이즈에 감염된다.

쿠바는 당시 에이즈 감염자를 격리시설에 가두고 국가가 감시했다. 전염을 막기 위해. 환자는 죄수가 아니니까 가끔 가족을 만날 수는 있었는데, 이 때 감시자 역할의 동반자, 꼼파냔테를 동행시킨다. 다니엘이 환자고, 다니엘의 동반자가 오라시오다. 쿠바 아마추어 권투 챔피언이 에이즈 환자 동반자가 된 건 챔피언이 돼야 한다는 부담감에 오라시오가 약물에 손을 대 일년간 출전정지를 당했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국가와 아버지에게 충성했는데도 보균자가 됐다는 이유만으로 콩고 여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을 빼앗기고(형이 양녀로 들였다) 병원에 갇힌다. 오라시오는 쿠바의 명예를 드높여 메달을 따려다 중압감에 한 번 실수했다가 역시 병원에 갇힌다.

둘 다 이 감옥 아닌 감옥을 탈출해야 한다. 과정이 매력적이고, 결말도 매력적이다. 해피엔딩도 아니지만 비극도 아니다. 둘 다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그 과정은 더이상 국가를 위한 것이 아니고, 상대를 위한 희생도 아니다. 이들은 그냥 스스로를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

세번째 영화는 인투더포레스트. 캐나다 영화다. 숲속으로, 라고 번역해도 좋았을 것을.

이 영화는 어쩐지 국내 개봉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흥행은 안 되겠지만.) 가까운 미래의 어느날 캐나다나 미국 북서부 지역으로 추정되는 북미대륙 서해안 침엽수림 지대 작은 마을에 전기 공급이 중단된다. 그 전까지는 아주 멋지다. 교사인 아버지는 딸들에게 “고대의 기술로 공부해 봐. 책이라는 게 있잖아”라며 노인처럼 말할 정도로, 컴퓨터를 이용한 삶이 일상화 돼 있고, 집안의 모든 가전제품은 음성으로 작동한다. 아이폰의 시리처럼 “잘 못 알아들었어요”라는 소리도 하는 법이 없는 똑똑한 세상이다.

그런데 전기가 끊어지니 모든 게 엉망이다. 사람들은 자체 발전기를 돌리려고 기름을 사들이기 시작하지만 머잖아 기름 공급도 끊어지고 유통망도 무너져 마을 전체가 고립된다. 라디오 방송도 중단되어 바깥 소식도 알 수 없게 되고, 어제의 친절한 이웃들은 오늘의 잠재적 강도로 변해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몇 달. 딸 둘만 남은 삶이 이어지고, 비축한 식량이 바닥나고, 관리를 하지 못해 낡은 목조가옥은 썩어가기 시작한다. 세상의 남자들을 만나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 되고, 문명의 도움은 받을 수 없는 상황…

아무리 봐도 정말 똑똑한 배우라는 생각이 드는 엘렌 페이지가 제작 및 주연을 맡았고, 여성과 환경이라는 주제의식도 강렬하다못해 지독할 정도다. 너무 커다란 생각들이 들게 만드는 영화라서 오히려 몇 마디로 말을 옮기기가 그렇다. 국내 개봉하면 꼭 보라고 강추하고 싶은 영화.

네번째 영화는 아옌데, 나의 할아버지. 칠레 영화다.

보는 내내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유족이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면 어떤 느낌일까 싶은 생각도 들었고. 영화감독이 바로 살바도르 아옌데 칠레 대통령의 손녀다.

가족의 입장에서 찍은 다큐멘터리인 덕분에 독재자 피노체트에 대한 분노라거나, 정치적인 메시지 같은 건 그다지 많지 않다. 물론 민주적 선거로 집권한 세계 첫 사회주의자 대통령이 독재자의 쿠데타에 밀려 대통령궁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던 순간을 지켜본 가족들의 기억을 되짚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완전히 비정치적일 수도 없다. 그저 입장이 가족의 입장이라는 것 뿐.

그리고 가족이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얘기들도 많다.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위대한 대통령으로 신격화 되는 아옌데가 사실은 아내를 계속 가슴앓게 만들었던 소문난 바람둥이였다는 가족들의 증언이라거나, 아옌데의 가족이란 이유만으로 해외를 전전하다 결국 외롭게 우울증으로 자살하고 말아야 했던 이모(아옌데의 딸) 이야기 같은 건 사실 후대에 전해질리도, 기록될 이유도 없는 뒤켠의 역사다. 영웅의 주위에서 실패한 사람들은 성공했으면 부와 권력을 누렸으리라는 이유만으로 실패에 대한 위로조차 받지 못하게 마련이니까.

영화의 끝에 나온다. 아옌데(Allende)라는 말의 뜻은 ‘저 곳, 그 너머'(más allá de)라고.

다섯번째 영화는 우리 승리하리라. 일본 영화다.

오키나와의 미군 기지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헤노코 기지 이전을 반대하는 주민들 이야기다. 당연하게도 제주도 강정에 건설중인 해군기지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영화가 끝난 뒤에는 미카미 치에 감독이 나와 영화와 관련된 질문을 받아주기도 했다. 난 개인적으로는 해군기지 같은 군사시설은 국가적 필요에 따라 지정학적 요충지에 건설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지만, 이 영화 덕분에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보게 됐다.

간단히 줄여서 말하자면, 이 영화는 옳고 그름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물론 멸종위기종인 듀공을 지키자거나, 산호초가 파괴된다는 얘기가 나온다. 하지만 일본의 국가안보를 지키는 군사시설을 건설하자는 주장도 틀린 건 아니다. 문제는 오키나와라는 위치다. 오키나와는 류큐(琉球)라는 독립국가였다. 17세기 초에 일본 가고시마의 사쓰마번이 침략하면서 일본이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고, 19세기 후반에 아예 합병하고 류큐의 역사를 지워버린다. 이후 약 150년 정도가 흘렀다. 그 사이 일본은 전쟁을 벌였고, 태평양 전쟁 때에도 그 군사 목적의 지정학적 가치 때문에 오키나와는 참혹한 전쟁터가 된다. 전후에도 미군이 들어섰고, 일본에 ‘반환’된 것은 1972년의 일이다. 그러니까 이 섬 사람들의 운명 따위에는 누구도 관심이 없었다. 점령군들이 늘 완장을 바꿔차고 들어왔을 뿐. 다큐멘터리는 이 부분을 얘기한다.

제주도라면 어떨까. 강정에 해군기지를 세우는 것은 지정학적으로 올바른 판단이겠지만, 제주도 사람들의 느낌은 어떨까. 제주도 사람들에겐 본토의 ‘대한민국’ 사람들이 마음대로 군사시설을 세우는 것이 무리가 없는 일일까?

결국 지금도 오키나와 새 미군기지는 착착 건설중이다. 주민들은 찬성과 반대파로 갈렸지만, 다큐멘터리는 그것이 그냥 극심한 대립만은 아니란 걸 보여준다. “듀공을 잡아먹자!”라고 유머러스하게 외치면서 기지이전 보상금까지 받은 한 어민은 올해 마을 신년회 때 직접 잡은 생선들로 근사한 생선회도 마련해 이전반대 운동을 하는 주민들과 함께 즐긴다. 주민들은 압도적인 표차로 기지이전에 반대하고 백지화하겠다는 현지사도 직접 뽑았다. 그래도, 중앙정부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 일은 과연 어디까지 갈까.

마지막 영화는 마지막날 아침에 봤던 붕붕! 달려라 개구장이 레이븐.

솔직히, 영화는 재미없었다. 레이서가 되고 싶어했던 까마귀 레이븐이 동네에서 사고를 친 뒤 사고수습을 위해 레이싱 대회에 나가 천신만고 끝에 우승한다는 어린이 애니메이션. 심지어 아들도 재미없어 했다. 부산 유치원 어린이들이 단체관람을 왔던데, 이 친구들도 그다지 재미있는 기색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재미있었는데, 유지태 덕분이었다. 유지태는 이날 극장에 직접 나와서 이 영화의 자막을 직접 읽어줬다. 유치원 어린이들이 주로 보는 영화였던 탓에 자막만으로는 의미 전달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에 읽어준다고 했을 땐 무슨 소리인가 했는데, 정말로 자막을 보면서,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들의 움직임과 의성어까지 참고하면서 자연스럽게 읽더라. 아이 아빠가 되어서인지 아들에게 읽어주는 것처럼 정성스럽게. 게다가 연습도 꽤 한 것 같았다. 너무 잘 읽어서 영화보다 유지태의 목소리 연기 감상이 더 재미있을 정도였다.

나라면 80분 동안 아들에게 영화 자막을 읽어줄 수 있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나도 봄날은 간다를 시작으로 이 배우한테 빠졌는데, 나이가 든 유지태의 모습은 그대로 더욱 멋지다. 나보다 한 살 많던데, 존경스럽다.

근황공지

너무 오래 놀게 놓아둔 것 같네요.

리부팅해볼 생각입니다. 특별히 달라지는 건 없고, 몇 달 씩 업데이트 없이 놓아두는 것보다는 함량과 밀도가 떨어지더라도(그렇다고 그전에 좋았던 것도 아니지만…) 아무 글이나 올려 볼게요. 얼마전 다녀온 부산국제영화제 얘기 같은 거라도…

빵 굽는 타자기

새 맥북은 조금 특별해 보였다. 루머가 나왔을 때부터. 작아지고, 강력해지고, 아름다워진다는 루머가 도는데 사실은 그것보다 그저 “와, 저건 정말 끝내주는 워드프로세서다”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글을 쓰게 해주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면서 무지 가볍고, 인터넷도 되고 영화도 볼 수 있으며 회사 일도 처리할 수 있는 기계. 그리고 오늘 나온 맥북이 딱 그랬다.

새 맥북의 12인치라는 스크린 사이즈는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기존의 11인치 맥북에어(화면비 16:9)와 13인치 맥북에어(화면비 16:10)의 ‘절충’이나 ‘중간’이 아니다. 11인치 맥북에어에 가까운 폭에 13인치에 가까운 높이를 가져서 12인치가 된 것에 더 가깝다.(새 맥북도 화면비가 16:10이다.) 즉 세로로 더 많은 정보를 보여주면서 화면 해상도도 레티나급으로 높인 11인치 맥북에어다. 11인치 맥북에어는 작은 화면에도 불구하고 그 가벼움 때문에 여전히 수요가 있던 노트북이었지만, 난 싫었다. 원고라도 쓰고 있으면 한 화면에 표시되는 문단 수가 확실히 적었고, 가로로 길어서 영화 같은 동영상을 보는데 최적화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읽고 쓰는데 있어서는 아주 불편했다. 게다가 한번 격자 없는 레티나 모니터에 적응하면 낮은 해상도의 스크린은 더이상 보기가 싫어진다. 이런 사람들에게 11인치 맥북에어는 영 엉망이었다. 반면 새 맥북은 16:10 비율을 제대로 갖췄다. 그리고 더 가벼워졌다. 게다가 또렷한 화면까지 덤으로 제공한다.

사진으로 비교하면 알 수 있지만, 맥북과 13″맥북에어는 세로로 더 많은 정보를 보여주는 반면 11″맥북에어는 위아래가 많이 잘린다.

그리고 새 맥북의 또 다른 특징은 풀사이즈 키보드의 크기를 거의 그대로 지켰다는 점이다. 스트로크시 신호를 입력받는 방식도 개선했다는데 이점은 실제 제품을 손으로 두드려봐야 알 것 같다. 또한 개별 키보드마다 LED를 붙여서 키캡 조명을 개선했다는데, 달리 말하면 더 어둡게 키보드의 밝기를 설정하더라도 키 하나하나를 더 쉽게 알아볼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프로세서는 강력하지 않다. 이미지나 동영상 프로세싱 혹은 최신 게임에 모자란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작가나 저널리스트라면? 키보드가 뛰어나고, 들고다니기 가벼우며, 모니터도 끝내주는 워드프로세서가 아주 만족스럽기 마련이다.

새 맥북이 형편없는 프로세서에 멋진 케이스를 붙여서 나온 값비싼 장난감이라며 폄하하는 시선이 많다는 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애플이 인기를 끌었던 이유가 투박한 케이스에 가격대 성능비가 뛰어난 부품들을 구겨넣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난 꽤 오래 써왔던 서브노트북인 2011년형 13인치 맥북에어를 슬슬 새 모델로 교체할 때가 오지 않았나 생각하는 중이고, 4GB 메모리에 겨우 128GB의 SSD 저장공간을 가진 이 모델도 사실 딱히 성능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진 않는다. 그래서 다음에 이 모델을 바꿀 땐 별 고민없이 새 맥북을 택하게 될 것 같다. 8GB 메모리와 256GB 저장공간을 가진 새 맥북은 부족했던 부분만 딱 채워넣은 듯 싶으니까.글을 쓰는 사람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노트북 같다. 특히 책상머리에 앉기보다 집밖으로 나가길 좋아하는 야전형 작가들이나 기자들, 외근이 잦은 마케터들이라면 더더욱. 한국의 광고모델(혹은 나레이터)로는 자전거를 타는 소설가 김훈 같은 사람이 어울리지 않으려나.

그래서 새 맥북은 ‘빵 굽는 타자기’ 같다. 세상에는 이것저것 컴퓨터의 기능을 대충 갖추고 있는 아주 괜찮은 워드프로세서를 사려는 사람들도 있게 마련이니까.

p.s. USB-C타입 포트가 달랑 하나 있는 구성에 대한 불만이 많던데, 난 전혀 불만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원 어댑터와 여러 기계를 연결할 확장 어댑터 및 USB 케이블을 주렁주렁 들고 다니면 무게 차이가 뭐가 나느냐”라고 얘기하는데, 이상한 생각 같다. USB 케이블이 전원 케이블이 됐다는 건 이제 맥북을 들고다니면서 전원 어댑터를 아예 놓고 다녀도 된다는 얘기 아닐까. 아이패드를 들고 다니면서 전원 어댑터를 들고 다니지 않는 것처럼, USB 전원이 있는 곳이면 이제 컴퓨터도 충전 가능하다. 게다가 영화를 연속해서 10시간 볼 수 있는 노트북을 들고 다니면서 과연 충전할 필요가 있을까? 배터리가 아이패드 수준인데? 충전을 해야만 할 정도로 노트북을 헤비하게 써야 할 장소라면 이미 케이블이 있는 집이나 사무실이 아닐까? 걱정 및 억측과는 달리, 난 애플이 처음으로 전원 어댑터를 들고 다니지 않아도 되는 노트북 혹은 아이패드 같은 노트북을 만들어 낸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게 우리가 노트북에 기대했던 것 아닌가? 자유롭게 들고 다니는 컴퓨터라는 개념 말이다. 아이패드에 “추가 디스플레이 연결이 안 되니 후졌다”거나 “아이패드로 아이폰 충전을 할 수 없어 말짱 꽝”이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이상한 소리냐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