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애플스토어

2000년 10월, 론 존슨은 멋진 애플스토어를 완성한다. 한쪽에는 노트북이, 다른 쪽에는 데스크톱이 있는 깔끔한 스토어였다. 장소는 멋진 원형이었고, 애플 특유의 미니멀리즘이 어김없이 발휘돼 있었다.

스티브 잡스가 존슨과 함께 세부 디자인을 모두 살폈고, 수많은 임원들이 자신의 의견을 반영시켰다. 그날은 첫 스토어 오픈을 준비하기 위해 직원들을 모아놓고 스토어에서 평가회의를 열던 날이었다. 잡스와 함께 차를 몰고 가던 존슨이 말했다.

“아무래도 전부 잘못된 것 같아요. 매장을 처음부터 다시 구성해야겠어요.”

잡스는 불같이 화를 냈다. 리테일 사업의 로드맵 전체에 영향을 줄 무책임한 소리였다. 그 뒤로 잡스는 차에서 내릴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첫 애플스토어가 될 장소에 도착했을 때, 잡스는 이렇게 말했다. “론이 우리 매장의 설계가 전부 잘못됐다고 합니다. 그 말이 맞아요. 이제 전 갈테니 모두 론이 말하는대로 따라주세요.”

존슨은 제품별 동선이 고객을 위한 것이 아닌 제품을 과시하기 위한 동선이라고 생각했다. 한 쪽은 음악이, 다른 쪽은 영화가 컨셉인 식으로 고객의 사용 패턴에 따라 동선을 구상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잡스는 그날 존슨에게 이렇게 말한다. “픽사에서 배운 건, 제작하는 거의 모든 영화마다 뭔가 적절치 못한 것이 나온다는 점이었어요. 그럴 때마다 픽사 사람들은 제대로 바로잡겠다며 제대로 될 때까지 수정했죠. 영화개봉 일자에 지배당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갖고, 얼마나 노력할 수 있느냐에만 집중했어요.”


브렌트 슐렌더의 ‘비커밍 스티브 잡스’는 흔히 알려진 스티브 잡스의 얘기는 그 뒷 얘기를 들려주고, 한편으로는 흔히 알려지지 않은 얘기들을 모아서 정리한 독특한 스티브 잡스 이야기다. 월터 아이작슨의 전기가 워낙 성공한 탓에 가려졌지만, 흔한 얘기들이 다시 반복되는 아이작슨의 전기와는 전혀 다른 재미가 있다. 무엇보다, 넥스트와 픽사 시절의 잡스에 주목한다. 사실 이 접근이 보다 맞는 접근인 것이, 스티브 잡스는 성격 파탄자인 젊은 잡스와 신격화된 말년의 잡스로만 소비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격 파탄자가 어느날 갑자기 화려하게 복귀해 거대하고 복잡한 시가총액 세계1위 기업을 운영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비커밍’은 계속해서 그 사이에 주목한다. 어떻게 어린 철부지 천재가 성숙한 경영자가 되는지에 대한 과정을 따라가다보면 말 그대로 스티브 잡스가 어떻게 스티브 잡스가 되는지(becoming) 깨닫게 된다.

2017년에 번역본이 나온 책인데, 이제서야 읽게 됐다. 스티브 잡스가 죽은지 10년이라고 여기저기 나오지 않았다면 올해도 그냥 넘겼을 텐데, 그랬으면 후회했을 듯. 그만큼 페이지마다 줄 긋고 싶은 부분들이 많았던 책이다. 그나저나 벌써 10년이라니, 세상에나. 세월 빠르다.

왜 리더인가

마음 가짐이 중요하다는 얘기는 너무 많이 들어서 식상하다. 심지어 간절히 바라면 온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다는 좋은 얘기도, 우리는 특정 맥락 때문에 이제 그냥 웃기는 미신 같은 표현으로 여기고 넘어가곤 한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도 되는 걸까.

교세라의 창업자인 이나모리 가즈오의 왜 리더인가는 뻔한 소리 같은 ‘마음가짐’에 대한 책이다. 아마 10년 전 읽었다면 그냥 넘겨버렸을 얘기에, 이젠 자꾸 눈이 간다. 그리고 마음이 간다.

책 초반에 나오는 말인데, 출판사가 일부러 그래픽으로 강조까지 해 놓았다. 이 얘기는 책 전체에서 여러번 변주되지만, 가장 와 닿았던 부분은 일본항공(JAL) 재건 스토리. 이나모리 회장은 2010년 파산 직전의 일본항공 재건을 위해 일본항공 회장으로 취임한다. 경영 일선에서 은퇴하고도 한참 지난 77세 때의 일이었다. 당시 일본항공의 부채는 21조 원, 적자는 연간 5000억 원, 이나모리에게 주어진 재건의 데드라인은 단 3년이었다.

파산하는 회사를 되살리기 위한 방법은 언제나 동일하다. 뼈를 깎는 구조조정과, 분위기를 되돌릴 수 있는 혁신. 하지만 많은 회사들이 이 간단한 일을 못 해 도산한다. 말과 실행은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교세라 시절부터 함께 일한 임원들과 경영진을 구성한 뒤 일본항공 간부들을 모아놓고 한 달간 ‘집중 리더 교육’을 시행할 계획을 세웠다. 내가 가장 먼저 실행한 것은 구성원들에게 이른바 ‘필로소피’를 전하는 일이었다. ‘열심히 일에만 몰두한다’,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는다’, ‘항상 겸허하고 솔직한 마음을 지닌다’ 등 상식적인 교훈을 토대로 한 가치관 말이다.

“여러분이 유치하다고 생각하고 당연하다고 여기는 이 가르침들을 여러분은 이미 머리로는 잘 알고 있을지 몰라도, 몸으로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을 뿐더러 실천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 점이 바로 회사를 파산으로 몰고 간 원흉입니다.”

그래서 구조조정은 미리 짜인 계획에 맞춰 단호하게 진행하는 한편, 이나모리 회장은 턴어라운드를 위한 혁신의 발판을 마음가짐에서 찾는다. 그가 진행했던 이 리더 교육은 곧 일반 직원 교육으로 확대됐고, 이나모리는 조직 개편을 통해 현장에서 고객을 대면하던 현장직을 대규모로 중용했다. 고객에게 마음을 내보일 현장직이 가장 중요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리고 본인 스스로 직접 현장의 기장과 승무원을 쫓아다니면서 코칭을 시작했다. 기내방송을 스크립트 대신 자신들이 자유롭게 정해서 하라고 권하는 것 같은 일 말이다.

그리고 1년 뒤,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일본항공은 이전의 관료적인 항공사가 아닌 전혀 다른 기업으로 거듭난다. 인근이 물에 잠겨 공항 건물로 주민들이 피난오자 일본항공 공항직원들은 식료품과 담요를 앞서 제공했고, 급작스런 지진으로 기내에 갇힌 승객들을 돌보던 승무원들은 기내에서 밥을 지어 주먹밥을 만들어 나눠줬으며, 적십자 구조대를 수송하던 기장은 구조대를 격려하는 자신만의 방송을 내보냈고, 승무원들은 구조대원들의 짐에 살짝 위로와 응원의 메모를 써서 넣어두곤 했다. 모두 매출과는 상관 없는 일이었지만, 일본항공은 2011년 턴어라운드에 성공했고, 2년 반 만에 퇴출되었던 증시에 재상장하게 된다. 이나모리 회장이 ‘마음의 개혁’이었다고 얘기하는 일본항공의 기적이었다.

이나모리 회장의 어머니도 참 독특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동네 친구들과 싸우고 돌아오면, 자초지종을 물은 뒤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네가 옳다고 생각한다면 한 번 더 가서 이길 때까지 싸우고 오너라.” 언뜻 생각하면, 지지 말라는 승부욕에 대한 얘기처럼 받아들일 수도 있었겠지만, 이나모리 회장은 이 얘기를 다른 뜻으로 받아들인다. 리더라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할 때 ‘싸우는 결정’을 뒤로 미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리더는 결단을 미뤄선 안 된다. 일단 지금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경영자로서 판단하기에 옳은 일이라고 확신한다면 언제든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

여러번 이 책의 이야기들을 떠올리게 될 것 같다. 김광현 선배가 선물해 주신 책이었는데, 선배는 늘 본인이 읽어서 좋았던 책을 주위에 선물하신다고 한다. 마음은 그렇게 전달된다.

Back Burning

“자나깨나 산불조심”

귀 따갑게 들어왔던 산불 예방 표어들. 선진국에서는 이미 수십년째 이어진 자연보호 활동이자, 환경보호 활동이고, 일종의 신앙과도 같은 믿음이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Vox의 유튜브에서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됐다. 수십년 간 우리가 노력해 온 산불 예방 노력이 최근의 어마어마한 산불의 원인일지 모른다는 지적이었다.

작년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의 대화재가 기억난다. 인근에 사는 지인들이 하루종일 오렌지색으로 변해 버린 하늘 사진을 찍어 보내줬고, 서울의 미세먼지는 비교도 안 될 수준의 미세먼지 탓에 외출도 자제해야 했던 시기였다. 그 땐 다들 지구 온난화만 얘기했지만, (온난화가 이유가 아니라는 건 아니지만) Vox의 이 리포트는 다른 시각에서 문제를 바라본다. 캘리포니아 산불은 원래 때가 되면 일어나는데, 인간이 이 산불을 참지 못하고, 수십년간 너무 잘 예방한 것이 문제라는 얘기다.

종종 작은 산불이 일어날 때면 가장 먼저 불타 사라지는 것은 바닥에 떨어진 죽은 가지와 마른 잎 등이다. 이후 작은 풀들이 타들어가고, 덜 건강해서 수분을 덜 머금은 작고 약한 나무들이 차례로 불에 타버린다. 그리고나면 숲에는 굵고 강한 나무만이 살아남는다. 이 나무들은 상처를 덜 잎은 위쪽의 잎새를 더 많이 틔우고, 더 높은 곳에서 태양을 받으며, 그 아래에 비와 직사광선을 피할 수 있는 그늘을 드리워 새로운 생태계가 자리잡게 한다. 양분을 담은 흙이 드러나고, 잡목와 잡초가 사라져 새 생명이 활동할 공간도 넓어진다.

그런데 인간이 산불이 조금이라도 나면 물을 끼얹어 ‘예방’하기 시작하자 이런 순환이 멈췄다. 타서 없어졌어야 할 죽은 나무와 마른 잎은 수십년을 쌓여 땔감을 모아놓은 화약고 역할을 하게 됐다. 이미 타 죽었어야 할 약한 나무들도 쓸데없이 살아남아 강한 나무가 더 높고 크게 자라는 것을 방해해 숲 전체를 약하게 만들었고, 바닥에 쌓인 낙엽과 마른가지들은 새 싹이 자라는 것을 방해했으며, 쓸데없이 무성한 숲은 새 생명이 활동할 공간을 빼앗는다.

이런 이유로 산불이 점점 더 커지고, 격렬해지자, 캘리포니아 못잖게 재앙적인 화재 피해로 유명한 호주에서는 작년에 새로운 법안을 통과시켰다. Back Burning, 다른 말로는 ‘계획된 산불’을 일으키도록 하는 법안이다. 사실 원주민들이 수백년 전부터 해당 지역에서 해오던 일이었다. 미리 불을 조금 내서 산불이 너무 커지지 않게 통제하는 방식이다. 문제는 19세기 중반 백인들이 식민통치를 시작하면서 이런 인위적인 산불을 금지하면서부터였다. 호주는 최근에 와서야 스스로의 잘못을 깨달은 셈이다.

작은 불을 내야 더 큰 불이 나지 않는다. 썩어가는 죽은 가지, 약해서 살아남기 힘든 잡목들이 작은 산불을 통해 걸러져야 숲 전체가 타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지구를 멸망시킬 듯 거대하고 위협적인 산불이 온 대륙을 덮을 때까지 그 위험을 깨닫지 못한다. 어디 비단 산불 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