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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회 부산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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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본 영화는 이웃집 토토로.

영화의 전당 야외극장에서 영화를 본 건 부산영화제에 몇 차례 다녀봤음에도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소리가 윙윙 울리는 게 좀 이상하긴 해도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특히 아들이 좀 떠들어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 환경이었다는 것도 좋았고. 무엇보다 난 이웃집 토토로를 이번에 처음 본 것이라서.

영화의 상황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엄마는 아프고, 아빠는 혼자서 딸 둘을 기르느라 시골의 낡은 집으로 이사간다. 당연히 고생이 눈앞에 펼쳐진 상황. 하지만 어린 딸들은 씩씩하고, 마을 사람들은 인심이 좋으며, 심지어 마을의 신들까지 이 가족을 도와준다. 그래서 아름다운 동심의 세계라거나 일본의 시골 풍경 같은 것들이 관객들에게 어필할지 모르겠는데, 적어도 내게는 그 부모들의 모습만 눈에 들어왔다. 불안한 상황이니까. 아내는 장기 입원중이고, 아직 어린 두 딸은 언니가 동생을 엄마처럼 키우며 스스로 자라나야 한다. 아빠는 누군가 돈을 벌어와야 하는 상황에 놓인 상태고.

영화가 참 좋았던 건 이 위기 상황 전체에서 모두들 그냥 웃고 넘어간다는 점이었다. 한없이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생활 태도다. 생각해보면 미야자키 하야오의 다른 영화들 중에 눈물과 분노가 없었던 영화가 있었던가 싶다. 조금 슬프고 외로운 부분이 있을지는 몰라도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어려운 상황을 웃음으로 넘긴다. 첫 영화였는데 온 가족이 함께 봤고, 그래서 더 좋았다.

두번째 본 영화는 El Compañante, 부산 상영명은 컴패니언.

쿠바 영화였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요소가 다 들어간 영화라서 골랐는데, 역시나 좋았다. 우선 소재가 권투다. 권투 영화가 재미없는 건 미션임파서블이 재미없을 가능성에 맞먹는다. 재미없으면 재앙이고, 대부분 평타 이상은 친다. 그리고 버디무비다. 남자들만의 우정이라는 것이 원래 유치하지만 남자들이 볼 땐 재미있는 법이다. 그리고 당연히 쿠바 영화니까 음악이 좋다. 선입견이 아니라 정말이다. 음악 나쁜 쿠바 영화는 미장센이 소비에트 체제선전 영화처럼 형편없는 프랑스 영화같이 존재하기 힘든 영화다.

주인공 중 한명인 오라시오는 흑인 복서. 금메달리스트지만 올림픽에는 못 나갔다. 80 모스크바 올림픽 땐 어렸고, 84 LA올림픽은 미국에서 열린 게임이라 못 나갔다. 쿠바는 공산국가다. 88 서울올림픽을 노리지만 영화 당시만 해도 극중 인물들이 "우리 동맹국은 북한이야. 남한은 미국 편이고. 한국은 아직 전쟁중이야"라며 참가가 안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다. 그 땐 당연한 일이었다. 또 한 명의 주인공 다니엘은 쿠바 당 간부를 아버지로 둔 백인이다. 전공을 쌓으려고 콩고 내전에 참전했다가 콩고 여인과 사랑에 빠졌고, 에이즈에 감염된다.

쿠바는 당시 에이즈 감염자를 격리시설에 가두고 국가가 감시했다. 전염을 막기 위해. 환자는 죄수가 아니니까 가끔 가족을 만날 수는 있었는데, 이 때 감시자 역할의 동반자, 꼼파냔테를 동행시킨다. 다니엘이 환자고, 다니엘의 동반자가 오라시오다. 쿠바 아마추어 권투 챔피언이 에이즈 환자 동반자가 된 건 챔피언이 돼야 한다는 부담감에 오라시오가 약물에 손을 대 일년간 출전정지를 당했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국가와 아버지에게 충성했는데도 보균자가 됐다는 이유만으로 콩고 여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을 빼앗기고(형이 양녀로 들였다) 병원에 갇힌다. 오라시오는 쿠바의 명예를 드높여 메달을 따려다 중압감에 한 번 실수했다가 역시 병원에 갇힌다.

둘 다 이 감옥 아닌 감옥을 탈출해야 한다. 과정이 매력적이고, 결말도 매력적이다. 해피엔딩도 아니지만 비극도 아니다. 둘 다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그 과정은 더이상 국가를 위한 것이 아니고, 상대를 위한 희생도 아니다. 이들은 그냥 스스로를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

세번째 영화는 인투더포레스트. 캐나다 영화다. 숲속으로, 라고 번역해도 좋았을 것을.

이 영화는 어쩐지 국내 개봉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흥행은 안 되겠지만.) 가까운 미래의 어느날 캐나다나 미국 북서부 지역으로 추정되는 북미대륙 서해안 침엽수림 지대 작은 마을에 전기 공급이 중단된다. 그 전까지는 아주 멋지다. 교사인 아버지는 딸들에게 "고대의 기술로 공부해 봐. 책이라는 게 있잖아"라며 노인처럼 말할 정도로, 컴퓨터를 이용한 삶이 일상화 돼 있고, 집안의 모든 가전제품은 음성으로 작동한다. 아이폰의 시리처럼 "잘 못 알아들었어요"라는 소리도 하는 법이 없는 똑똑한 세상이다.

그런데 전기가 끊어지니 모든 게 엉망이다. 사람들은 자체 발전기를 돌리려고 기름을 사들이기 시작하지만 머잖아 기름 공급도 끊어지고 유통망도 무너져 마을 전체가 고립된다. 라디오 방송도 중단되어 바깥 소식도 알 수 없게 되고, 어제의 친절한 이웃들은 오늘의 잠재적 강도로 변해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몇 달. 딸 둘만 남은 삶이 이어지고, 비축한 식량이 바닥나고, 관리를 하지 못해 낡은 목조가옥은 썩어가기 시작한다. 세상의 남자들을 만나는 것 자체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 되고, 문명의 도움은 받을 수 없는 상황...

아무리 봐도 정말 똑똑한 배우라는 생각이 드는 엘렌 페이지가 제작 및 주연을 맡았고, 여성과 환경이라는 주제의식도 강렬하다못해 지독할 정도다. 너무 커다란 생각들이 들게 만드는 영화라서 오히려 몇 마디로 말을 옮기기가 그렇다. 국내 개봉하면 꼭 보라고 강추하고 싶은 영화.

네번째 영화는 아옌데, 나의 할아버지. 칠레 영화다.

보는 내내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유족이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면 어떤 느낌일까 싶은 생각도 들었고. 영화감독이 바로 살바도르 아옌데 칠레 대통령의 손녀다.

가족의 입장에서 찍은 다큐멘터리인 덕분에 독재자 피노체트에 대한 분노라거나, 정치적인 메시지 같은 건 그다지 많지 않다. 물론 민주적 선거로 집권한 세계 첫 사회주의자 대통령이 독재자의 쿠데타에 밀려 대통령궁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던 순간을 지켜본 가족들의 기억을 되짚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완전히 비정치적일 수도 없다. 그저 입장이 가족의 입장이라는 것 뿐.

그리고 가족이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얘기들도 많다.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위대한 대통령으로 신격화 되는 아옌데가 사실은 아내를 계속 가슴앓게 만들었던 소문난 바람둥이였다는 가족들의 증언이라거나, 아옌데의 가족이란 이유만으로 해외를 전전하다 결국 외롭게 우울증으로 자살하고 말아야 했던 이모(아옌데의 딸) 이야기 같은 건 사실 후대에 전해질리도, 기록될 이유도 없는 뒤켠의 역사다. 영웅의 주위에서 실패한 사람들은 성공했으면 부와 권력을 누렸으리라는 이유만으로 실패에 대한 위로조차 받지 못하게 마련이니까.

영화의 끝에 나온다. 아옌데(Allende)라는 말의 뜻은 '저 곳, 그 너머'(más allá de)라고.

다섯번째 영화는 우리 승리하리라. 일본 영화다.

오키나와의 미군 기지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헤노코 기지 이전을 반대하는 주민들 이야기다. 당연하게도 제주도 강정에 건설중인 해군기지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영화가 끝난 뒤에는 미카미 치에 감독이 나와 영화와 관련된 질문을 받아주기도 했다. 난 개인적으로는 해군기지 같은 군사시설은 국가적 필요에 따라 지정학적 요충지에 건설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지만, 이 영화 덕분에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 보게 됐다.

간단히 줄여서 말하자면, 이 영화는 옳고 그름에 대한 영화가 아니다. 물론 멸종위기종인 듀공을 지키자거나, 산호초가 파괴된다는 얘기가 나온다. 하지만 일본의 국가안보를 지키는 군사시설을 건설하자는 주장도 틀린 건 아니다. 문제는 오키나와라는 위치다. 오키나와는 류큐(琉球)라는 독립국가였다. 17세기 초에 일본 가고시마의 사쓰마번이 침략하면서 일본이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고, 19세기 후반에 아예 합병하고 류큐의 역사를 지워버린다. 이후 약 150년 정도가 흘렀다. 그 사이 일본은 전쟁을 벌였고, 태평양 전쟁 때에도 그 군사 목적의 지정학적 가치 때문에 오키나와는 참혹한 전쟁터가 된다. 전후에도 미군이 들어섰고, 일본에 '반환'된 것은 1972년의 일이다. 그러니까 이 섬 사람들의 운명 따위에는 누구도 관심이 없었다. 점령군들이 늘 완장을 바꿔차고 들어왔을 뿐. 다큐멘터리는 이 부분을 얘기한다.

제주도라면 어떨까. 강정에 해군기지를 세우는 것은 지정학적으로 올바른 판단이겠지만, 제주도 사람들의 느낌은 어떨까. 제주도 사람들에겐 본토의 '대한민국' 사람들이 마음대로 군사시설을 세우는 것이 무리가 없는 일일까?

결국 지금도 오키나와 새 미군기지는 착착 건설중이다. 주민들은 찬성과 반대파로 갈렸지만, 다큐멘터리는 그것이 그냥 극심한 대립만은 아니란 걸 보여준다. "듀공을 잡아먹자!"라고 유머러스하게 외치면서 기지이전 보상금까지 받은 한 어민은 올해 마을 신년회 때 직접 잡은 생선들로 근사한 생선회도 마련해 이전반대 운동을 하는 주민들과 함께 즐긴다. 주민들은 압도적인 표차로 기지이전에 반대하고 백지화하겠다는 현지사도 직접 뽑았다. 그래도, 중앙정부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 일은 과연 어디까지 갈까.

마지막 영화는 마지막날 아침에 봤던 붕붕! 달려라 개구장이 레이븐.

솔직히, 영화는 재미없었다. 레이서가 되고 싶어했던 까마귀 레이븐이 동네에서 사고를 친 뒤 사고수습을 위해 레이싱 대회에 나가 천신만고 끝에 우승한다는 어린이 애니메이션. 심지어 아들도 재미없어 했다. 부산 유치원 어린이들이 단체관람을 왔던데, 이 친구들도 그다지 재미있는 기색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재미있었는데, 유지태 덕분이었다. 유지태는 이날 극장에 직접 나와서 이 영화의 자막을 직접 읽어줬다. 유치원 어린이들이 주로 보는 영화였던 탓에 자막만으로는 의미 전달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에 읽어준다고 했을 땐 무슨 소리인가 했는데, 정말로 자막을 보면서,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들의 움직임과 의성어까지 참고하면서 자연스럽게 읽더라. 아이 아빠가 되어서인지 아들에게 읽어주는 것처럼 정성스럽게. 게다가 연습도 꽤 한 것 같았다. 너무 잘 읽어서 영화보다 유지태의 목소리 연기 감상이 더 재미있을 정도였다.

나라면 80분 동안 아들에게 영화 자막을 읽어줄 수 있었을까?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나도 봄날은 간다를 시작으로 이 배우한테 빠졌는데, 나이가 든 유지태의 모습은 그대로 더욱 멋지다. 나보다 한 살 많던데, 존경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