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등 기업의 1등 따라잡기 전략
by 김상훈
제 기사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이런 겁니다. 최근 LG전자에서 HD LCD라는 기술을 사용한 새 휴대전화 '뉴초콜릿폰'을 판매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습니다. 삼성이나 노키아가 AMOLED라는 새로운 기술로 '보는 휴대전화 시대'가 열렸다며 대대적으로 광고를 해대니 속도 쓰렸겠지요. 하지만 사실 HD LCD라는 건 전혀 새로운 기술이 아닙니다. 그냥 기존 LCD에 이러저런 손을 좀 더 댔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에서는 '햅틱아몰레드와의 경쟁 제품'이란 식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습니다. 이런 사례도 있습니다. 필립스는 백열전구를 개량해서 팔고 있는데, 기존 백열전구보다 전기도 적게 먹고 수명도 깁니다. LED가 새로운 혁신을 이끌 거라 모두 떠들고 있지만, 조용히 옛 기술을 개량해 시장을 일정 부분 차지한 셈이죠. LG텔레콤의 리비전A(요즘 OZ라는 이름으로 열심히 광고해대는)도 이런 식의 기술입니다. KT나 SK텔레콤의 WCDMA 기술보다 한 단계 낮은 수준의 기술인데도, 신규투자비가 훨씬 적게 들어서 가격이 훨씬 싼 덕분에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습니다.
궁금했던 건 이런 겁니다. 이 기술들과 경쟁하는 AMOLED나 LED, WCDMA 등은 처음 나올 땐 모두 '꿈의 기술'이란 화려한 간판을 내걸고 나왔던 기술이었습니다. 하바드대 경영대학원의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교수가 얘기했던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의 사례처럼 보였던 것이죠. 파괴적 혁신이란 기존의 기업들이 계속 자기가 잘 하는 분야를 개선해 나가는 존속적 혁신(sustaining innovation)에 반대되는 크리스텐슨 교수가 만든 표현입니다. 아무리 기업들이 자기가 잘하는 걸 더 잘하려고 개선을 해봐야, 어느 순간 시장의 판도를 바꾸는 새로운 혁신이 생기는데, 1위 기업은 이 파괴적 혁신을 눈뜨고 보면서도 따르지 않아 실패하게 된다는 거죠.
필립스의 개량형 백열등 '할로게나 에너지세이버'
그래서 교수님께 여쭤봤습니다. 파괴적 혁신을 이룬 제품은 존속적 혁신을 추구하는 기업들의 제품을 뛰어넘는 경쟁력을 가질 것으로 보이는데, 제 기사에 소개한 사례들을 보면 과연 그럴까 싶다는 얘기였습니다. LG전자나 필립스같은 강력한 경쟁자(삼성전자나 GE, 오스람 등)를 가진 기업들의 경우에는, 선두기업을 따라잡기 위해 파괴적 혁신을 추진하는 것보다는 지금처럼 자신들이 잘 해왔던 기술을 개량하는 '존속적 혁신' 전략을 짜는 게 합리적인 선택 아니겠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교수님 말씀은 "그 적용이 단순히 AMOLED, LED조명, WCDMA는 파괴적 혁신이고 HD LCD, 백열등, 리비전 A는 존속적 혁신(sustaining innovation)이라는 이분법적인 적용은 아닐 것"이라는 답변을 주셨습니다. 일반적으로 많이 착각하는 경우가 '파괴(disruption)'라는 게 무슨 엄밀한 정의인 것처럼 보는 거란 얘기였죠. 파괴란 상대적인 개념이라고 합니다. 기존의 틀을 일정 부문 바꾸는 새로운 기술이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오느냐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또 파괴적 혁신은 기술이 새로울 때만 사용되는 게 아니라, 전체 비즈니스 모델이 어떻게 바뀌는지도 함께 살펴야만 한다는 충고도 하셨습니다.
파괴적 혁신이란 높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하이엔드 제품에서 생긴다고 흔히 오해하지만, 사실은 오히려 기술적으로 단순하면서 낮은 가격과 높은 사용자 만족을 주는 로엔드 제품에서 발견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겁니다. 그러니 제가 예로 들었던 LED, AMOLED, WCDMA 등을 무조건 파괴적 혁신으로 보는 건 오류에 해당됩니다. 그렇다고 파괴적 혁신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죠. 아직 비즈니스 모델이나 시장 환경이 어떻게 바뀔지 우리는 지켜보고 있는 중이니까요.
크리스텐슨에 따르면 혁신은 자원(resource)으로서의 기술 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비즈니스 모델, 즉 고객에게 제공되는 가치(value)와 사업 과정(process)을 포함합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이런 겁니다. 시장에서 1위를 하고 있는 기업들은 자신들의 기존 사업이 너무 잘 되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의 성공에 도취돼 오류에 빠집니다. 계속 하던 걸 더 잘하고자 하는 것이죠. 이럴 때 기업은 핵심역량을 강화한다며 존속적 혁신만을 추구할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이렇게 발전하는 기술의 경우 고객층 다수의 수요를 넘어선 너무나 다양하고 선도적인 기술적인 시도가 일어납니다. 소비자와 괴리된 '오버슈팅'된 기술이 등장하는 것이죠.
LG전자 '뉴초콜릿폰'
반면 1위 기업에 도전하는 기업들은 기존 기술을 혁신적으로 발전시켜서 고객들에게 전혀 새로운 가치를 줍니다. OZ의 저렴한 통신요금이나, 필립스 백열전구의 전기는 적게 먹지만 백열등의 노랗고 익숙한 불빛은 살려주는 감흥 등이 그런 것이죠. 또 시장을 선도하는 기업의 기술이나 전략이 '나홀로 전략'에 그치면 이것은 파괴적 혁신에 이르지 못합니다. AMOLED나 LED가 그런 전략이라는 얘긴 아닙니다. 이 기술들을 평가하기엔 아직 너무 이릅니다. 대신 소니 VTR의 베타 방식 실패 사례를 들 수 있겠네요. 표준을 정하는 데 실패한 소니는 훨씬 우월한 기술을 만들어두고도 VHS에 밀리고 말죠. 최근에는 블루레이디스크로도 비슷한 전철을 밟게 되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베타 시절과는 달리, 소니는 이번에 다른 기업들에게 블루레이 규격을 전파해 '우군'을 만드는 데에는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사람들은 비디오를 동그란 원판을 기계에 넣어 보는대신 네트워크로 다운로드받아서 보기 시작했기 때문이죠.
교수님의 조언 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문장을 마지막으로 그대로 적어봅니다. '비소비와의 경쟁', 이걸 나중에 블루오션이란 표현을 통해 새로 브랜드화하신 분들도 계셨죠. ^^
"기업들은 현재 시장에 나타나지 않고 있는 잠재 고객의 수요를 파악하는 전략을 수립하여야 합니다. 새로운 시장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는 시장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크리스텐슨 교수는 비소비와의 경쟁(competing with non-consumption)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기업들이 경쟁사와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모습을 보는 것도 흥미진진하지만, '비소비와의 경쟁'을 통해 새로운 성공을 만들어가는 기업을 볼 때면 짜릿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런 기업들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