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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스타를 필요없게 만드는 디지털 커피 로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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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생각하는 게 모두 다르겠지만, 나는 스타벅스를 참 좋아한다. 스타벅스는 매뉴얼이 정말 꼼꼼해서 원두를 개봉하고 사용할 수 있는 시간, 브루잉을 하고나서 그 커피를 판매할 수 있는 시간 등을 철저하게 통제한다. 또 본사에서 일괄 로스팅하는 원두만을 사용하게 한다. 한 곳에서 블렌딩해서 세계 전역이 같은 맛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 방식이다. 즉, 한국에서 먹어도 시애틀 맛이 난다. 개별 매장의 다양성을 최소화하는 셈이다. 직원이 어벙벙해도 커피는 맛있는 곳, 개성은 없지만 돈 값은 하고, 언제나 실망할 걱정도 거의 없는 커피를 만들어 파는 곳이 바로 스타벅스다. 파리나 뉴욕에서라면 굳이 스타벅스에 갈 이유가 없겠지만, 커피 맛이 의심스러운 가게가 즐비한 지역에서라면 스타벅스를 만나는 건 행운이다. 그러니까 스타벅스는 최고의 커피를 포기하는 대신 상급의 커피를 적절한 가격에 전 세계에 보급한 셈이다. 바꿔 말하면 스타벅스는 장인정신과 숙련된 기술을 매뉴얼과 엄격한 과정관리로 대체했다.

스타벅스 앞에서 동네 커피숍은 맥을 못 춘다. 훌륭한 커피 기술을 갖고 있다고 해도 브랜드에 밀린다. 심지어 맛을 일정하게 통제하는 것도 쉽지 않다. 게다가 맛을 제대로 통제하려면 값을 스타벅스보다 올려야 한다. 시간을 커피에 더 투자하거나 커피를 볶고 내리는 핵심 과정을 제외한 일을 담당할 직원을 더 채용해야 하니까.

그렇다면 생각을 조금 바꿔서 최고의 커피를 만드는 대신, 훌륭한 커피를 커피에 관한 지식이 부족한 사람도 만들 수 있게 해주면 어떨까? 스트롱홀드라는 회사가 만드는 에스트리니타는 이런 커피를 만들어 주는 기계다.(이 회사 한국 회사다) 기본적인 커피 로스팅 프로필이 기계에 들어있어서 생두만 잘 넣어주고 버튼만 누르면 충분히 훌륭한 품질의 커피가 만들어져 나오기 때문이다. 기계도 제대로 설계한 것 같다. 요즘 직접 로스팅을 하면서 느끼는 건데, 로스팅의 품질을 결정하는 요소는 (물론 끝없이 다양하지만) 크게 봐서 두 가지다. 열량과 냉각. 얼마나 제대로 된 열을 균일하게 가하느냐가 로스팅의 풍미를 결정하고 (이 시간을 조절하면서 신맛과 쓴맛을 제어하는 게 로스팅의 재미다) 얼마나 빨리 제대로 식히느냐가 이렇게 완성된 향을 원두에 제대로 가둬주는 마지막 마무리다. 이 기계는 이 과정을 제대로 이뤄낸다. 6분만에 전기로 열을 가해 2차 팝핑까지 이끌어낸다는데, (솔직히 전기로 이 열량을 내려면 전기를 얼마나 써야 할까. 전기먹는 하마처럼 보이긴 한다.) 이걸 세라믹 코팅된 드럼으로 균일하게 가열한다. 열량에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는 얘기다. 그리고 냉각 속도. 다 볶아진 원두가 2분여 만에 상온으로 돌아온다. 이 모든 게 버튼만으로 전자동 처리. 내가 보기엔 신세계다.

대 당 가격이 천만 원부터 시작이라니까 어차피 집에서 쓸 물건은 아니지만, 사용 장소가 가게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즉, 동네 커피집이 스타벅스보다 훨씬 맛있는 커피를 만들 수 있는데, 그걸 스타벅스의 반값으로 만들 수 있다는 얘기다. 생두를 로스팅한 뒤 서비스할 때까지의 시간이 극단적으로 짧아질 수 있어서 커피가 늘 신선하게 되고, 그것만으로도 맛은 스타벅스보다 나아질 수밖에 없다. 또 전자동으로 대부분의 공정이 끝나니 직원을 늘릴 필요도 없다. 스타벅스는 브랜드와 마케팅, 과정 관리로 경쟁 우위를 얻었지만 이 때문에 원가 구조에 문제가 있다. 많이 팔려야 이익이 생기는 구조라서 목 좋은 비싼 땅에 자리를 잡아야 하고, 테이블을 차지하는 손님들을 내쫓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이래서 스타벅스가 인기를 끌기도 했으니) 원두는 미국에서 볶아서 가져오기 때문에 신선함은 떨어지고, 종업원은 창의적인 행동 대신 비효율적이더라도 무조건 매뉴얼을 따른다. 매뉴얼의 장점도 있지만, 두평짜리 커피 스탠드에서 4000원짜리 스타벅스 커피보다 맛있는 2000원짜리 신선한 테이크아웃 커피를 하루에 200잔씩 한두 명이 판다면 스타벅스가 과연 이런 가게를 이길 수 있을까?

홈페이지 설명을 꼼꼼하게 살펴 보니 더 재미있는 비즈니스 모델도 보인다. 이 기계는 그저 스타벅스보다 나은 정도의 커피를 만드는 수준이 아니다. 바리스타들이 직접 열량과 공기 유입량, 로스팅 시간 등을 조절해서 자기만의 커피 로스팅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이런 조절 내용을 저장해서 프로필로 만들면 이를 디지털 정보 상태로 스트롱홀드 서버로 보낼 수 있다. 동네의 바리스타가 우연히 찾아낸 최적의 맛을 균일하게 매일 반복해서 만들 수 있는 건 물론이다. 많은 아마추어 바리스타가 맛있는 커피 맛을 찾아낸 뒤에도 이를 계속 균일하게 유지하지 못해 곤란을 겪는 걸 생각하면 꽤 큰 장점이다. 뿐만 아니라 이런 맛을 디지털 정보로 바꾼 뒤 전 세계 바리스타들과 공유할 수 있는 셈이다. 아마도 미래에는 이런 프로필을 판매하는 시장도 열리지 않을까? 생각해 보면 이런 시장이 열린다면 베니스 노천카페의 바리스타가 만든 훌륭한 커피 맛을 서울에서 인터넷으로 내려 받아 영등포에서 그대로 재현해 줄 수도 있다는 얘기다.

물론 손으로 직접 로스팅을 하는 최고의 장인을 기계 따위가 어떻게 이기겠느냐만, 어차피 많은 사람들에겐 그런 바리스타가 내려준 커피를 마실 기회란 없게 마련. 난 명품을 만드는 최고의 장인도 좋지만, 그들의 명품에 버금가는 뛰어난 수준의 제품을 대중에게 값싸게 선사하는 사람들이 백배는 더 좋다. 그게 자본주의의 유일한 장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