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빅 스몰 : 컴퓨터를 전공한 농부
by 김상훈

경민은 이곳이 한씨 가문의 한울농장이라고 했다.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이전부터 몇 대에 걸쳐 농사를 지어왔던 산. 구례 인근에서 감 농사 규모로는 열 손가락 안에 드는 큰 농장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경민에게 농사 일을 물려줄 생각은 없었다. 너무 고생스러운 일이었다.
제법 공부를 했던 경민은 수원의 아주대로 진학했고, 컴퓨터를 전공 했다. 아버지는 만족스러웠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은 호주로 떠났다. 워킹홀리데이였다. 일도 하고 돈도 벌면서 호주에서 머물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어학연수 프로그램으로도 인기가 높았다. 경민은 그저 떠나고 싶었다. 젊은 날, 많은 청춘처럼 그에게도 의미가 필요했다.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의미, 삶의 가치에 대한 고민. 호주는 그런 그에게 깨달음을 줄 것 같았다.
경민은 호주에서 처음으로 땅을 만났다. 평생 땅과 함께 살아온 집안의 아들이었는데도 그 경험은 참 독특했다. 땅이 새롭게 느껴졌다. 그리고 호주에서 나무와 벌레도 만났다. 흙 내음 섞인 바람의 향긋함도 느꼈다. 워킹홀리데이는 노동을 통해 돈을 벌면서 영어도 배울 수 있는 일석이조의 어학연수로 인기가 높았다. 하지만 이 일을 하면서 농사일의 고됨을 깨닫는 경우는 많았어도 농사를 짓고 싶어 하게 되는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농사는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경민에겐 달랐다. 그는 자연을 좋아했고 농사짓는 걸 좋아했다. 호주 농민들의 부유하지는 않지만 부족하지도 않은 행복한 삶도 동경했다. 마음이 편하고 행복에 대해 어렴풋하게 배울 것 같던 시절, 그는 지금의 아내인 지연을 만났다. 지연에겐 농사일이 경민처럼 쉽지 않았다. 농사는 거친 일이었고, 몸이 힘들어지면서 낯선 사람들과 겪는 모든 일이 스트레스가 됐다. 그때 그녀에게 경민이 다가왔다. 약간 무심한 듯, 하지만 따뜻한 배려를 담아.
한국에 돌아올 때 경민은 혼자가 아니었다. 둘도 아니었다. 지연의 뱃 속에는 경민의 첫애가 자라고 있었다. 서울에서 취직하는 대신 구례에서 농사를 짓겠다는 경민의 얘기에 아버지는 깜짝 놀랐다. 반대도 소용 없었다.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벌써 7년이 지났다. 그새 경민 부부는 딸 하나와 아들 둘을 더 낳았다. 경민은 행복하다고 했다.

“그런데 그거 알아요? 익충과 해충의 구분법. 사람들이 구분한 건데, 정말 자의적이에요.” 경민은 나를 보면서 물었다. 물론 나는 답을 몰랐다. 바보처럼 답했다. “사람한테 좋은 벌레가 익충이고, 해로우면 해충이겠죠.” “땡. 답은 초식곤충은 해충이고, 육식곤충은 익충이란 거예요. 작물을 먹으면 해충이고, 해충을 먹으면 익충이란 얘기죠.” 경민은 풀을 그냥 뒀다. 벌레가 생겼다. 대신 육식곤충도 함께 자라도록 했다. 가끔 감잎도 쏠리고, 열매를 파먹는 벌레도 나오지만 감나무가 튼튼하고 익충이 충분하면 피해는 충분히 소화할 만한 적은 수준이 된다고 했다. 그는 “완벽한 생태계가 만들어지면 문제가 없는데, 상업 작물은 사람 손을 들여야 좋은 열매를 맺기 때문에 완벽한 생태계를 만들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곳곳에 완벽을 향해 가기 위한 그의 아이디어가 놓여 있었다. 우선 벌레가 너무 많아지고 풀이 지나치게 늘어나는 걸 막기 위해 경민은 닭을 사왔다. 양계장에서 버리는 일명 ‘폐계’였다. 닭은 나이를 먹으면 하루에 낳는 알이 적어지는데 이러면 사료값이 달걀값보다 많이 들어가게 된다. 양계장은 이런 늙은 닭을 10마리에 3000원 정도에 판다. 말만 잘하면 여기에 열 마리고 스무 마리고 더 얹어주기도 한다. 먹어봐야 맛이 없고, 길러봐야 사료값만 들기 때문이다.
경민이 데려온 닭들은 과수원에서 알아서 자란다. 우리도 없고, 양계장도 없다. 야생동물의 습격에서 방어하기 위해 ‘방어용 우리’만 만들어놓고 하루 종일 닭들을 풀어 놓았다가 저녁이면 방어용 우리 속에 닭들을 몰아넣는다. 잡아서 옮기지 않아도 닭들이 알아서 몸을 피하러 들어간다고 했다. 이 닭들은 알을 낳기도 하고, 풀과 벌레도 잡아먹는다. 족제비 같은 육식동물에게 가끔 닭을 잃기도 하지만 그 또한 생태계의 일부다.

경민은 그렇게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구분이 될 리 없다. 많은 소비자들이 그냥 빛깔과 모양만 보고 농작물을 고른다. 벌레먹는 비율이 다른 농장보다 높은 경민의 한울농장에서 자란 단감과 매실은 썩 인기가 높지 않다. 경민은 소비자에게 인정받아보겠다면서 직접 자기가 농사지은 작물을 인터넷으로 판다. 페이스북을 만들어 페이스북 친구들로부터 직접 주문을 받아보기도 했고 참거래 농민장터나 헬로네이처 같이 유통단계를 줄여 마진을 높여주는 인터넷 서비스도 이용했다. 도시 사람들보다는 늦었지만 2012년 들어서는 스마트폰도 샀다. 농장에 나가서도 인터넷과 연결되기 위해서였다. 지금 직업은 농부지만 경민은 서른셋의 청년이고, 컴퓨터공학도였다.
인터넷을 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제가 원하는 가격으로 제 작물을 팔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죠. 국내 농산물 시장에서 생산자가 직접 가격을 매길 수 있는 시장이란 건 거의 없어요.” 헬로네이처 같은 회사는 경민 같은 농민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려주는 통로다. 맛 좋은 무농약 단감 대신 이런 곳에서 경민의 단감은 ‘한경민 님의 단감’으로 팔린다. 헬로네이처의 모든 농산물이 마찬가지다. ‘변덕준 님의 유기농 방울토마토’, ‘이귀남 아주머니의 17잡곡’ 등 생산자의 이름이 모든 상품에 붙는다. 농민들의 이야기와 사연은 그렇게 퍼져나간다.
경민의 페이스북에는 계속해서 새로운 농장 소식이 올라온다. 이곳에서 발견하게 되는 얘기는 우리가 알고 있던 기존의 농사와는 사뭇 다르다. 그냥 뒀으면 사료만 축냈을 늙은 닭들은 이곳에서 풀과 벌레를 먹으면서 사료를 주지 않아도 달걀을 쑥쑥 낳기 시작했다. 장마철에는 닭들이 영양실조에 걸릴 거라는 양계 전문가의 조언과 달리 경민의 닭들은 비도 잘 이겨냈다. 애초에 닭이 비만 오면 굶어 죽었다면 한국에는 닭이 자라지 못했을 테니까. '흠 하나도 없이 깨끗한 초록색 매실만 가득 매달린 나무'와 '벌레먹은 매실, 깨끗한 매실, 덜 익은 초록매실, 살짝 색이 나기 시작한 매실이 섞인 나무' 가운데 당신은 어느 나무의 매실을 따가겠느냐는 경민의 얘기도 귀에 들어온다. 공산품처럼 균질한 초록색 매실만 가득한 나무에, 우리가 과연 손을 대고 싶을까?
서른셋, 그는 네 아이의 아빠가 됐고, 사람들에게 이로운 농작물을 기르는 농부가 됐다. 인터넷 이전, 우리는 경민의 단감과 매실을 먹을 방법을 알지 못했다. 수많은 한경민이 꿈만 꾸다가 현실과 타협했다. 풀을 베어내고, 초식곤충의 씨를 말리며, 익지 않은 맛없는 열매를 따서 서울로 미리 보냈다. 이젠 다른 삶이 가능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