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ecennium
by 김상훈
2018년 9월 19일이 이 블로그의 10주년이 되던 날이었습니다.
2008년의 시작은 단순했습니다. 스티브 잡스 책을 쓰고 있던 때여서, 준비만 할 것이 아니라 준비 과정을 블로그에 따로 기록으로 남겨 두자는 생각이었죠. 여러 면에서 도움이 됐습니다. 포스트를 모아서 기본 뼈대를 삼고 그 위에서 책을 쓰니 한결 수월했죠.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고 대충 썼던 첫 책보다 훨씬 더 제대로 정리됐던 느낌이었습니다. 세번째 책도 같은 방식으로 준비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신문사를 그만두게 됐습니다. Vingle, 리디북스, 그리고 지금의 쿠팡까지.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그 10년 동안 원했던 것은 자유롭게 글을 쓰는 것이었고, 깨달은 것은 자유롭게 글을 쓴다는 것은 환상이라는 것이었죠. 언제나, 창조는 제약에서 이뤄집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다 갖춰진다거나, 완벽하게 자유로운 상황은 없습니다. 그런 상황이 생긴다면 사람들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완벽한 자유란 어떻게 보면 완벽한 제약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제약을 이겨낼 때 놀라운 일을 이루게 마련입니다. 저는 그렇게까지 제약을 이기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10년 전, 처음 이 블로그를 만들 때 가졌던 생각은 이제 꽤 많이 달라졌습니다. 예를 들어, 그 땐 10년 이내에 다음과 같은 일들이 이뤄질 것 같았습니다.
- 소셜웹은 인터넷을 통해 사람들 사이의 평판이라는 자원으로 신뢰의 네트워크를 만들게 될 것입니다.
- 모바일 인터넷은 어디서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우리를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닌 '하고 싶은 일'의 세상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 정보와 자원의 불균형은 웹을 통해 비대칭이 해소되면서 균형 상태로 변하고, 결과적으로 지역간, 계층간, 국가간 격차는 줄어들 것입니다.
10년이 지난 뒤 세상은 이렇게 변했습니다.
- 소셜웹의 가장 멋진 결정체라 부를 만한 네트워크인 페이스북은 그놈의 평판 때문에 절벽에서 추락하는 아이들을 만들어 냈고,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불신의 네트워크로 발전했습니다.
- 모바일 인터넷 덕분에 우리는 휴가지에서도 이메일을 확인하고 메시지에 답해야 하는 삶으로 접어들었으며, 해야만 하는 일의 목록은 더욱 늘어났습니다.
- 웹은 쓰레기 정보를 양산하면서 가치있는 정보를 더욱 소수의 손에 집중시켰고, 웹이 만든 기술 격차는 몇몇 기업의 매출이 대부분의 국가 GDP를 상회하는 세상을 만들어 냈습니다.
예측은 엉망으로 빗나갔습니다. 세상은 우리 모두 알다시피 그렇게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래서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점점 글이 뜸해졌습니다. 말 한 마디의 무게도 더 커졌습니다. 미안함의 부담감은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10주년 기념일이 지나버렸고, 결국 올해가 가기 전 뭐라도 남겨놓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글을 씁니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도 많습니다.
- 저는 아직도 웹은 무엇보다 사회적인 공간이며, 우리는 이 공간을 어떻게 쓰는지 배워가고 있는 중이라고 믿습니다. 페이스북의 실패는 웹의 실패가 아닙니다. 세계대전과 원자폭탄이 인류의 실패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어떻게든 번영할 것이고, 진보할 것입니다.
- 모바일 환경은 우리에게 부담을 늘렸지만 권리도 늘렸습니다. 우리는 이제 몸과 벗어난 또 하나의 두뇌를 몸 바깥에 두고 사는데 익숙합니다. '모바일=스마트폰'이 아니라, '모바일=클라우드'라고 생각한다면 우리 앞에 가능성은 이제 막 열렸을 뿐입니다.
- FANG이 어마어마하다고 얘기하지만, 아직도 세상에서는 수많은 해커들이 기존의 기득권을 분해하고 있습니다. 격차는 늘어날 수 있지만, 그 격차를 무너뜨릴 무기도 더더욱 쉽게 사람들의 손에 쥐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블로그 개점하고 1년에 글 하나도 못 쓸 법한 2018년을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저는 아직도 이 모든 일이 거대한 변화의 시작일 뿐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모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