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 써도 덜 쓴다 (5) 신용 사회에서 신뢰 사회로
by 김상훈
크레딧 카드는 세상을 바꿨다. 지갑의 두께를 줄였고, 미래의 소득을 현재에 소비할 수 있게 했으며, 부채를 안고 살아가는 삶을 가능하게 했다. 사람들은 자성을 띈 검은 띠를 두른 플라스틱 카드 한 장 만으로 자신의 소득이 갑자기 늘어나는 상황을 겪었으며, 그들 가운데 일부는 갑자기 늘어난 소득이 결국은 신기루였다는 사실을 모른 채 눈 앞에 나타난 듯한 오아시스를 향해 달려가다 파산하기도 했다. 이 얇은 플라스틱과 함께 새로운 산업이 출현했다. 전표를 수거하는 업체부터, 전표를 전자정보로 바꿔 카드사로 전달해 주는 업체, 이런 거래를 실시간으로 이뤄지도록 도와주는 업체 등이 등장한 건 물론이다. 더 중요한 건 카드를 발급해도 되는지를 따지는 회사의 출현이었다. '신용평가회사'라는 이름의 이런 기업들이 하는 일은 단순하다. 카드를 마구 쓰라고 재촉하고 닥달하고 광고로 세뇌시키고 상품으로 유혹하는 금융회사에게 "사실 네가 카드를 쓰라고 했던 저 사람은 나중에 돈을 갚지 않을 사람이야"라고 미리 얘기해주는 것이었다. 이 일을 위해 신용평가사들은 사람에게 '신용도'를 부여했다. 은행에서 대출을 받은 뒤 제 때 갚지 않은 경력이 있다면 마이너스, 공과금을 제 때 내지 않는 사람이라면 마이너스, 벌금과 과태료를 내지 않는다면 마이너스였다. 플러스도 쉬웠다. 돈을 제 때 갚고, 성실하게 정부에 낼 돈을 낸다면 플러스를 받는다. 아 참, 중요한 게 한가지 더 있다. 빚을 지면 플러스다. 빚을 갚지 않으면 마이너스지만, 아예 빚을 내본 적도 없는 사람보다는 빚을 낸 뒤 잘 갚는 사람의 신용도가 더 높다. 어차피 신용평가회사가 하는 일은 카드를 많이 쓸 사람을 골라주는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현대 사회에서 신용은 돈이 됐다. 참, 한 가지 알아둘 일이 있다. 신용도가 높다는 건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뜻과는 거리가 멀다. 위노나 라이더가 백화점에서 절도 행각을 벌이는 건 돈이 없어서일까? 헐리우드 탑스타였던 그녀는 쇼핑 중독자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부자다. 지갑에 돈이 있는 상태에서도 절도를 벌였다고 보도될 정도였으니 그녀의 신용도는 높았을 것이다. 하지만 상점 주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위노나 라이더가 한 켤레에 300만 원 씩 하는 이탈리아 장인의 수제 구두 앞을 서성이고 있다면? 그녀는 신용도는 높을지 몰라도 신뢰도는 낮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믿을 수가 없으니까. 신용과 신뢰는 비슷한 말 같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완전히 다른 말이 됐다. 새로운 시대가 두 단어 사이의 거리를 벌려놓은 것이다.
공유경제의 시대는 이렇게 케케묵어 보이던 신뢰를 재산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여러분이 에어비앤비를 통해 집을 내놓은 주인이라고 가정해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자, 예를 들어 오늘 밤 손님을 받아야 한다. 두 명의 예비 손님이 있는데 방이 하나밖에 없어서 이 가운데 한 명만 받을 계획이라고 가정해본다. 남자 A는 에어비앤비를 오늘 난생 처음으로 이용하는데다 나이는 19살에 키가 190cm고 몸무게가 120kg이라고 한다. 살펴보니 페이스북 친구도 없다. 대신 그는 신용카드 회사가 소득수준 상위 0.1%의 고객에게만 발급한다는 플래티넘 카드로 결제를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남자 B가 있다. 토니 소프라노 역의 제임스 갠돌피니처럼 생겼다. 나이는 40 전후. 팔뚝이 허벅지만 하다. 담배도 태우지만 집 안에서는 절대로 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결제는 현금으로 하겠다고 한다. 대신 그는 페이스북을 한다. 친구들이 많다. 에어비앤비도 이전에 세 차례 이용했고, 집주인들이 "유머가 뛰어난 좋은 손님"이라고 평가했다. 페이스북 친구들의 얘기를 종합해보니 B는 전직 권투선수고, 주말마다 양로원에 나가 봉사활동을 하며, 교회 주일학교의 유아반 교사이기도 하다. A의 신용도는 최고고, B의 신용도는 최악이다. 하지만 나라면 B를 손님으로 받겠다. B가 손님으로서 A보다 훨씬 믿을 만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제 재산은 더 이상 신용이 아니라 신뢰다.
2011년 7월 말, EJ라는 ID를 쓰는 한 여성이 에어비앤비에 집을 내놨다. 일주일 동안 출장을 가면서 임대료를 벌어 보자는 생각에서였다. 출장에서 돌아오니 난리가 났다. 손님이라 생각했던 사람은 도둑으로 돌변했다. 가구와 집기를 모두 부수고, 구석구석 집안을 뒤진 뒤 숨겨둔 보석까지 꺼내 갔다. 컴퓨터와 백업용 하드디스크까지 모두 들고 나간 탓에 십수 년을 모아온 일기와 사진까지 사라졌다. 에어비앤비는 이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2008년 창사 이래 첫 대형 위기를 맞았다. 손님의 얼굴도 보지 않은 채 열쇠를 맡겼던 EJ의 부주의란 의견도 있었다. 사실 그녀는 손님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하지만 에어비앤비는 "근본적으로 대부분의 사람은 선하고 믿을 만하다"는 전제에서 시작된 사업 모델이다. 전제가 틀렸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서비스 자체의 신뢰도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에어비앤비는 이때부터 서비스의 신뢰도를 높이는 방법을 궁리했다. 방법은 하나였다. 신뢰를 평가할 수 있고, 투명하게 드러날 수 있도록 해야했다. 마치 신용평가회사가 카드사에게 사람들의 신뢰등급을 보여주는 것처럼. 그래서 이 회사는 8월 초 브라이언 체스키 최고경영자(CEO)가 재발 방지를 약속한 뒤 보름 동안 모두 40개에 이르는 예방 조치를 내놨다. 샌프란시스코 본사 직원 70여 명이 보름 동안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회사에서 먹고 자며 새 기능을 만들어냈다. 회사가 실수를 했으니 대책을 마련하는 건 놀라운 게 아니었다. 놀라운 건 이 조치에 따라 이어진 에어비앤비 사용자들의 반응이었다.
이들은 회사가 마련한 게시판에 신뢰 회복을 위한 다양한 제안을 했다. 회사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 아이디어는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 올라오고 있다. 그리고 사용자들은 직접 이런 아이디어에 대해 투표를 벌인다. 투숙객을 거절하면 해당 집주인의 집이 검색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리던 문제가 이렇게 해결됐다. 사실 EJ는 손님을 까다롭게 고를 수가 없었다. 손님을 몇 차례 거절하면 검색 순위에서 뒤로 밀리기 때문이다. 에어비앤비의 집주인들은 "내 집은 내 집"이라며 "원치 않는 손님을 받지 않아도 어떤 불이익도 없게 해달라"고 말했다. 회사는 이 문제부터 먼저 해결했다.
그동안 대기업은 악덕 소비자에게 선의의 소비자보다 더 많은 보상을 했다. 통신사는 장기 이용 고객보다 신규 가입자를 우대했다. 그들이 당장 돈을 벌어주니까. 그러다보니 통신사를 옮겨다니는 '메뚜기' 소비자들이 생겼다. 이들에게 신규 가입자 혜택을 주는 돈은 가만히 충성스럽게 서비스를 사용하는 통신사의 알짜 고객들이 부담했다. 백화점에서는 조용히 쇼핑하는 고객은 그냥 돌려보내도 매장 앞에서 소리치며 항의하는 고객은 뒤로 따로 부른 뒤 상품권을 안겨줬다. 그래야 다른 손님들이 눈살을 찌푸리지 않으니까.
이건 '브랜드'라는 게 기업만의 자산이기 때문이었다. 브랜드는 곧 기업의 평판이다. 하지만 공유경제 모델에선 다르다. 소비자도 자신의 평판을 관리해야 한다. 기존 경제시스템에선 신용카드를 만들 수 있는 금융신용이 소비자가 관리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브랜드였다. 좀 우습지만 그게 사실이었다. 카드사는 소비자를 인격체로 보지 않는다. 신용등급과 소득수준에 따른 숫자의 현실 재현물로 볼 뿐이다. 하지만 공유경제 시스템에선 같은 서비스를 이용하는 공동체 내부에서의 평판이 가장 중요하다. 사람은 다시 사람이 됐다.
평판은 공유경제 모델에서 때론 돈처럼 쓰이는 재산이 된다. 신용도가 높은 사람이 은행에서 돈을 빌릴 때 금리 할인을 받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에어비앤비와 비슷한 숙박 알선 서비스인 '카우치서핑'은 에어비앤비와는 달리 숙소 이용료를 받지 않는다. 그 대신 외국인 여행자에게 잠자리를 내주고 이들과 '좋은 추억'을 얻기 위해 집을 빌려준다. 특징은 집주인이 손님을 까다롭게 고른다는 것이다. 카우치서핑 서비스를 잘 이용하려면 평소 이 서비스 내에서 좋은 평판을 쌓아야 한다. 집주인들의 좋은 평가가 쌓이면 다음 집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된다. 공짜 숙소를 제공하는 집주인이 원하는 건 낯선 곳의 이방인과 나누는 훌륭한 문화경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서비스를 처음 이용하는 사람은 몇 가지 독특한 질문을 받는다. 예를 들어 "존 레넌을 좋아하시나요"나 "앤디 워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같은 질문이다. 이는 마치 대학생들이 룸메이트를 고르는 방식과 비슷하다. 당연히 이런 거래에서는 평판이 곧 재산이 된다. 쿨하고 멋지다는 평판을 얻는다면 싼 값에 좋은 숙소를 얻게 되니까.
하지만 처음 창업하는 서비스들이 하루아침에 이런 식의 신뢰를 쌓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또 공유경제 모델은 최근 1, 2년 새 급속하게 생겨나고 있는 새로운 사업모델이다. 대부분의 공유경제 비즈니스가 신뢰도를 보여줄 수 있는 시스템을 갖고 있지 못하고, 사용자 사이의 평판 조회가 이뤄지기엔 이용 이력이 지나치게 부족한 상태다. 이런 약점을 해결해준 것이 페이스북으로 대표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였다. 실리콘밸리에서 생겨난 대부분의 공유경제 모델은 '공개인증(Open Authentication)'이란 방식을 쓴다. 이를 이용하면 페이스북 계정에 로그인하는 것만으로도 별도의 개인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해당 서비스에 로그인하게 해준다. 페이스북이 이런 서비스에 가입하는 사람의 신원을 보증해주는 셈이다.

단지 페이스북 회원임을 보증해주는 게 아니다. 공개인증을 거침과 동시에 해당 서비스에서는 신규 가입자의 기존 친구관계가 어떤지, 평소 어떤 활동을 해왔던 사람인지를 다른 가입자에게 보여줄 수 있게 된다. 페이스북이 쌓아놓은 사회적 관계망과 신뢰를 자신들의 서비스에 빌려오는 셈이다. 페이스북이 '소셜그래프'라고 부르는 기능이다. 보건 스미스 페이스북 사업개발담당 부사장은 이에 대해 "페이스북은 단순히 소셜웹에 그치는 게 아니고 다른 서비스를 위한 딥 소셜 플랫폼(deep social platform)이 되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파트너의 성공을 위해 파트너의 서비스에 소셜을 더해줄 뿐이라는 얘기다. 그는 "페이스북 규모의 회사 가운데 자체 사업이 아닌 파트너의 사업이 잘 되도록 하기 위해 모든 걸 거는 회사를 본 적이 있느냐"고도 말했다.
페이스북이 공유경제 비즈니스에 소셜을 더했고, 소셜은 신뢰를 가져왔다. 그리고 이 신뢰가 모든 것의 시작이 됐다. 에밀리는 "페이스북이 없었다면 에어비앤비도 창업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페이스북에 따르면 페이스북 가입자 8억 명 가운데 약 5억 명이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이상 페이스북을 이용한 외부 서비스를 이용한다. 에어비앤비와 릴레이라이즈 같은 공유경제 서비스가 이런 대표적인 서비스다. 그리고 페이스북 가입자들은 평균 130명의 친구를 갖고 있다. 이 정보가 공유되기 때문에 공유경제 모델이 작동한다. 페이스북 플랫폼프로덕트팀 매니저인 칼 소그린 씨는 패스트컴퍼니와의 인터뷰에서 "에어비앤비 같은 사업모델에서는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선한 의도야말로 가장 큰 인센티브를 얻는 길"이라며 "한 번 나쁜 평판을 남기면 인터넷의 특성상 앞으로 비슷한 다른 모든 서비스에서 믿을 수 없는 사람으로 검색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아직까지 '신뢰의 인프라'라는 측면에서 페이스북을 능가하는 서비스는 없다. 페이스북이 '유행이 지나면 쇠락할 것'이라는 수년 동안 계속된 비판적인 시선에도 불구하고 성장세를 멈추지 않은채 계속해서 성공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생각해보면 페이스북 스스로가 다른 공유경제 비즈니스들과 마찬가지로 가장 중요한 재산인 자신의 플랫폼을 원하는 모두와 공유해 왔다. 그리고 그 서비스를 독점적으로 소유하겠다는 생각을 초기부터 버렸던 덕분에 큰 성공을 거뒀다. 그렇게 페이스북은 21세기의 신용평가회사, 아니, 그 이상이 됐다. 그것도 엄청나게 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