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갭(GAP)은 과연 진실을 말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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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갭(GAP)이라는 의류브랜드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값싸고 품질 좋은 옷으로 미국 최대의 의류 소매체인이 된 기업이죠. 1969년 창업한 이 회사가 최근 4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로고를 바꾸겠다는 계획을 밝혔습니다. 여러 아이디어를 인터넷에 미리 공개하고 소비자 의견도 들었죠. 그러자 소비자들이 이를 반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새 로고 디자인이 형편없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제 눈에는 그 정도로 형편없지는 않았지만 갭을 사랑하는 소비자들에게는 변화가 ‘퇴보’처럼 보였던 모양입니다. 결국 갭은 로고 수정 계획을 철회합니다.

왼쪽이 새 로고, 오른쪽이 옛 로고입니다.

 

  그런데 이 얘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최근 미국에서 소셜네트워킹서비스(SNS) 관련 사업을 하고 있는 한 벤처기업가가 저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에게 “갭이 왜 천재인지, 그리고 내가 왜 갭을 싫어하는지 설명하겠다”는 제목의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주요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갭의 로고 변경을 둘러싼 모든 논란은 소셜미디어를 이용해 잘 조율된 입소문 마케팅일 뿐이란 주장입니다.

 

  과정을 단순화하자면 이렇습니다.

 

  갭: “(소셜미디어를 통해) 새 로고를 만들 거에요.”

  소비자: “헉, 왜요?”(페이스북 ‘좋아하기’, 트위터의 ‘RT’ 등을 마구 눌러댑니다.)

  갭: “(답은 하지 않고 소셜미디어에 이미지를 공개하면서) 여기 새 로고가 있습니다.”

  소비자: “헉, 이게 뭐야. 후졌잖아!”(이들은 열성적으로 로고 변경에 항의하는 의견을 트위터와 페이스북에 퍼뜨립니다. 곧이어 '갭 로고 변경 중단 운동'이 시작되고, ‘갭 로고’는 트위터의 ‘실시간 이슈(Trending Topic)’ 등에 올라갑니다. gap.com 사이트로는 로고를 보기 위해 찾아온 더 많은 방문자들이 넘쳐납니다.)

  갭: “이런, 이렇게 의견이 많으시다니. 그렇다면 페이스북에서 우리 친구가 돼 주세요. 새 로고를 만들기 위해 여러분의 아이디어를 듣겠습니다.”

  소비자: “허걱, ㅠㅠ, 절대불가….”(이들은 이제 페이스북에 열심히 새 로고를 올리고 블로그에 갭 로고 이야기를 퍼뜨리며, ‘갭 로고 디자인 사이트’ 등을 열성적으로 개발해 남들에게 퍼뜨립니다.)

  갭: “어머나 세상에. 저희는 여러분이 우리의 옛 로고를 이렇게 사랑하시는지 미처 몰랐어요. 갭에 대한 여러분의 애정에 감사드리고, 그 보답으로 우리는 옛 로고를 그냥 유지하기로 했답니다. 우리는 고객을 사랑하니까요.”

  소비자: “만세! 우리가 갭의 잘못된 판단을 염려해 지적하자 드디어 갭이 그 결정을 번복했어요! 소비자의 힘이 기업을 바꿨어요! 소비자의 승리에요!”

 

  세상에.

 

  이게 갭의 잘 고안된 마케팅이었다고 생각해보죠. 디자인 회사에 ‘로고를 바꿔달라’며 새 로고의 시안 몇 가지를 의뢰하고, 이를 인터넷에 올리는 것, 그게 갭이 사용한 모든 비용입니다. 얼마 안 들죠. 소비자들은 이 과정에서 자신들이 얼마나 갭을 사랑했는지 깨달아야만 합니다.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갭의 40년 역사를 돌아보게 되고, 자신들이 갭의 옷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과장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덤으로 갭의 홈페이지와 페이스북에 방문해 이 회사가 요즘 만들고 있는 잘 빠진 새 옷도 수없이 보게 되죠.

 

  갭이 과연 이 ‘로고 소동’을 의도적으로 고안한 것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갭은 충분히 이 소동을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변화에 저항하니까요. 아이폰과 아이팟도 세상에 나오기 전에는 실패할 것으로 예상됐습니다. 그게 소비자의 보수적인 속성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새 로고를 너무 좋아해 ‘입소문’이 나지 않는다고 해도 갭은 손해 볼 게 없습니다. 반응이 좋다면 로고를 바꾸면 그만이니까요. 어차피 갭이 이런 마케팅을 고의로 벌였다면 그건 40년이나 된 늙은 브랜드에 새로운 신선함을 불어넣기 위한 이유에서였을 겁니다. 로고를 바꾸든, 전통을 되돌아보든 목적은 달성되는 거죠.

 

  최근 국내 기업들도 블로거에게 ‘후원금’을 주고 좋은 입소문을 내달라고 뒤에서 부추긴다거나 다양한 ‘소셜미디어 마케팅’이란 명목으로 다단계 판매와 비슷한 방식으로 제품 홍보를 권유합니다. 우리가 미처 알아채지 못한 새 목적을 달성한 기업의 마케터들이 뒤에서 웃음을 짓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대우증권이 구정물을 1000원 받고 팔면서 거둔 마케팅 효과를 생각해 보세요. 이들이 구정물을 하루에 100병씩 판다고 해도(12시간 판매라고 하니까 실제로는 50병도 못 팔겠지만) 매일 들이는 후원금은 단돈 90만 원에 불과합니다. 소셜미디어의 시대에 기업들은 무한히 똑똑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그들의 진화에 발맞춰 똑똑해지고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