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족의 음악
by 김상훈
애플이 최근 있었던 신제품 발표회를 마치자, 세상은 온통 애플워치 얘기와 새로 판매에 들어가는 아이폰6 얘기, 한국에선 쓸 수 없을 것 같다는 애플페이 얘기로 가득하다. 하지만 사실 난 애플의 지난 발표회 때 U2의 음악에 감탄했다. 애플이 모든 아이튠즈 유저에게 U2의 미공개 새 앨범을 무료로 배포하다니! 만세! 공짜다!
하지만 사실 만세라고 할 만한 것은 아니었고, 세상에는 자신의 취향에 기업이 개입하는 걸 죽도록 싫어하는 사람들이 퍽이나 많았다. 그래서 애플은 역공을 당한다. "애플, 내 폰에다 네 맘대로 아무 음악이나 집어넣지 말란 말야!"
그래서 부랴부랴 애플은 공짜로 받은 U2 앨범을 완전히 삭제할 수 있는 도구를 만들어 배포했다. 어쨌든 해프닝에도 불구하고 이 과정은 음악 산업에 있어서는 정말 또 하나의 기념비가 될만한 과정이었다. 이제 음악을 듣고 돈을 지불하는 과정이 완전히 변했다는 걸 애플이 거대한 스케일로 증명했기 때문이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시대를 살아가는 소비자는 이제 공짜로 음악을 듣고, 돈은 음악 재생기를 만들어 파는 제조사가 내게 됐다. 마치 중세의 음유시인들이 맘만 동하면 거리와 선술집에서도 노래를 불러제끼지만, 생활비는 영주나 귀족들에게 받아 챙기던 것과 비슷한 방식이다. 물론 돈을 내는 영주들은 자기 맘에 안 드는 노래가 나오면 이 뮤지션들의 목을 베거나 손가락을 자르거나 혀를 뽑았다. 그렇다면 질문이 있다. 우리 시대의 뮤지션도 애플의 말을, 아니, 후원을 하는 기업의 맘을 거스르면 시장에서 퇴출되는가? 요즘 가장 핫한 음악 기술인 스트리밍 음악 서비스, 그것도 광고로 돈을 버는 스트리밍 서비스는 모두 이렇게 후원자가 뮤지션의 생계를 돕는 방식인데?
최근에 비긴 어게인이란 영화를 봤다. 난 영화를 좋아하고, 뉴욕을 좋아하고, 음악도 좋아하고, 아이폰도 좋아하는데, 이 영화는 뉴욕을 배경으로 뮤지션들이 등장해 아이폰으로 음악을 나눠듣는 음악 영화였다. 당연히 보러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한 이 영화는 뮤지션과 음악 산업에 대한 얘기다. 함께 순수하게 음악이 좋아서 자신들이 듣고 싶은 음악, 진짜 좋아하는 음악을 만들던 뮤지션들 이야기. 그레타(키라 나이틀리)와 데이브(애덤 르바인), 스티브(제임스 코든)는 영국에서 함께 밴드를 하던 친구들인데 스티브는 뉴욕으로 건너와 길에서 버스킹을 하면서 이스트빌리지 골방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고, 연인인 그레타와 데이브는 데이브가 영화음악을 맡았다 대박을 내면서 뉴욕으로 건너와 소호의 멋진 로프트에서 함께 살기 시작한다. 그러다 잘 나가는 데이브가 그레타를 차고 다른 여자를 만나는 사이, 그레타는 알콜중독인 왕년의 유명 프로듀서 댄(마크 러팔로)을 만나 한눈에 재능을 인정받고 음반 제작에 들어간다...
(이하 스포일러 군데군데)
스토리는 뻔하다. 그런데 디테일은 뻔하지 않다. 이 영화는 계속해서 "우리가 지금 뭘 하는 거지?"라는 질문을 던진다. 프로듀서의 입장에서, 갓 성공한 뮤지션의 입장에서, 세상의 시선 따위 의식하지 않는 인디 뮤지션의 입장에서, 시스템을 지켜가는 성공한 뮤지션과 이 수익구조 먹이사슬 정상에 있는 음반사의 입장에서.
뮤지션들을 괴롭히는 건 온갖 가짜들이다. 할 말도 없는데, 엄마가 시켜서 음악 학원을 다니면서 춤과 노래를 배운 뒤 '아이돌'로 키워지는 거지같은 가짜 뮤지션들. 심지어 영국에서 차근차근 성장해 온 데이브마저도 성공하게 된 건 음악이 아니라, 이 음악이 실린 영화가 히트를 친 덕분이었으며, 가수로 성공하기 위해서도 마치 수행이라도 떠났다 온 사람처럼 긴 수염을 기르고 '길 위에서'(On the Road)라는 철학적인 척 하는 제목을 단 앨범을 내야 했다. 좋은 음악이 아니라 '사람들이 좋다고 생각할 법한 음악'을 만들기 위해 살아가는 뮤지션 말이다. 진짜 음악을 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음악을 하기 위해 가짜들의 세계에 적응해야 하는 뮤지션. 한국이라고 이게 과연 다를까. 신해철과 윤상이 예능 프로그램에 나오지 않으면 음악으로 기억되기 어려운 세상이란 건 세계 어디를 가든 마찬가지다.
그레타는 데이브의 대척점이다. 예쁘고, 재능도 있는데, 음반사가 만들어 놓은 '성공의 길'에 올라갈 마음이 없다. 그래서 알콜중독 프로듀서가 술까지 끊어가며 온 힘을 다해 저예산의 한계를 넘어 자신의 뛰어난 재능과 쌓아온 인맥으로 위대한 앨범을 만들어주는데, 이 앨범을 온라인에 올려 헐값에 팔아버린다. "녹음도 우리가 했고, 세션맨도 우리가 찾았고, 작곡도 우리가 했고, 마케팅도 바이럴로 할 건데 왜 10달러의 앨범 가격 가운데 1달러만 우리가 받고 9달러는 음반사가 챙기나요?" 그레타는 이 말을 음반사에게 쏘아붙이고는 전통적인 음반 계약 대신 1달러에 앨범 전체를 온라인으로 팔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레타는 진짜 뮤지션처럼 보이고, 진짜 음악을 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진짜가 되는 길은 가짜로 성공하기보다 훨씬 더 어렵고 힘들다. 물론 영화는 "진짜로 살아가는 과정이란 게 그렇게 괴로운 건 아냐, 오히려 껍질만 남은 성공보다 더 즐거울지도 몰라"라고 계속 얘기하지만.
이런 시대에서 데이브는 위기의 음악 산업을 상징한다. 상품성 있는 이들을 후원하고 이들로 이윤을 남겨야하는 '귀족'에게 기댄 뮤지션 말이다. 그레타는 반대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비용을 더 줄이고 대중에게 더 기대면서 귀족에게서 독립하려고 한다. 그레타의 사운드 엔지니어링은 정식 스튜디오 대신 친구 스티브가 맥북 한 대로 해결했고, 세션은 진짜 거리 뮤지션(그레타의 백밴드는 동네 발레학원 반주자와 클래식이 지긋지긋한 틴에이저 현악주자들이다)들이 맡았다.
어떤 쪽이 맞는 걸까, 답은 모른다. 애플이 U2의 신보를 통째로 사들여 대중들에게 무료로 뿌리고는 핸드폰을 팔아 번 돈으로 U2에게 대가를 정산하는 시대는 매력적인 듯 보이지만, 애플은 무명의 잠재력 있는 밴드에게 이런 선의를 베풀지 않는다. 수십년 검증된 U2 정도나 이런 대접을 받을 뿐. 물론 애플은 아이튠즈 매치 같은 서비스로 매년 수많은 소비자들이 뮤지션을 후원하도록 간접적으로 돕는다.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들도 소비자로부터 적은 돈을 받는 대신 뮤지션에게 지급할 돈을 음악 산업의 이해관계 바깥에 있는 기업에게서 받는다. 또 다른 극단에 자리잡고 있는 그레타의 처지는 결과적으로는 음악의 가격 인하와 연결될 것이다. 모든 곡이 0.99달러였던 아이튠즈 모델이 0.79달러에서 1.19달러로 (그나마) 다변화된 것도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곧 인디 뮤지션의 음악이 더 싼 값에 거래되고, 음반사가 아닌 개인 뮤지션이 플랫폼과 계약하는 일도 흔하게 벌어지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1달러에 앨범 전체"라는 그레타와 댄의 가격 정책은 의외로 의미심장하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귀족들만의 취미였던 음악이 우리 같은 모든 평범한 사람의 예술로 바뀌게 된 건 결국 기술 발전 덕분이었다. 따라서 기술이 음악가를 괴롭히고 음악을 듣는 팬들에게 손해를 끼칠 거라는 음울한 예상은 하고 싶지 않다. 대신, 비긴 어게인의 거리 녹음 같은, 포크와 인디 음악의 새로운 부흥이 예고된 건 아닐까? 전자음 대신 진짜 악기로 사운드를 채우고, 즉흥성과 영감에 기반을 둔 대중음악이 다시 거대한 장르가 될 수 있다는 믿음 같은 것 말이다.
p.s. 아 참, 비긴 어게인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알콜중독 프로듀서, 댄의 성(姓)은 '멀리건'(Mulligan)이다. 맞다, 그 멀리건. 골프에서 첫 티샷을 잘못 치면 주어지는 벌타없는 두번째 샷. 인생에는 언제나 실수가 있게 마련이고, 그렇다해도 우리에겐 언제나 다시 시작할(begin again) 권리가 있다. 음악 산업 또한 아무리 개판이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인생을 사랑하는 것처럼 음악도 사랑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