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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벨헤드와 넷헤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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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tube http://www.youtube.com/watch?v=-73cDPqlYeA] NHN이 이런 동영상을 만들고 있긴 하지만 NHN을 만든 이해진이나 김범수 같은 사람들이 정부 정책에 아이디어를 보탠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생각해 보면 '창조경제'를 한다는 이 정부의 첫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가 김종훈 전 미국 벨연구소 사장이었던 것도 의미심장했다. 결국 초대 장관이 된 최문기 장관은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에서 전자식 전화교환기(TDX)를 개발했던 통신전문가다. 정보통신기술(ICT) 분야를 담당하는 미래부 2차관은 고시를 보고 체신부에 들어가 한국통신에서 근무하다 KT 부사장이 됐던 윤종록 차관이고, 박근혜 대통령이 후보 시절 ICT 자문 역할을 부탁했던 윤창번 새누리당 방송통신추진단장 또한 하나로텔레콤 출신이다. 사실 ICT라는 표현도 통신업계에서나 쓰는 용어다. 컴퓨터와 인터넷, 소프트웨어 분야 등 기술 분야를 총칭할 때엔 정보기술(IT)이란 표현이 더 널리 쓰인다. 아니면 그냥 기술이라고 하든지.

어쨌든 박근혜 대통령과 미래부는 창조경제를 ‘과학기술과 ICT를 기반으로 창의적인 사업을 벌이는 창업경제’라고 정의했다. 구체적인 모델로 이스라엘과 미국 실리콘밸리도 꼽았다. 창조경제라는 게 현실화되면 한국에서도 구글이나 페이스북 같은 미국의 거대 인터넷 기업이 생기리란 생각 아니었을까. 구글, 페이스북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이스라엘의 보안전문회사 체크포인트나 ‘ICQ 메신저’를 만들어 AOL에 매각한 미라빌리스 같은 작지만 강한 기업이 생길 수 있다는 기대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 기대는 가능성이 있는 기대일까? 실리콘밸리와 이스라엘의 ‘실리콘와디’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벤처기업가, 인터넷·소프트웨어 전문가가 미래부에서는 쉽게 보이지 않는다.

굳이 미래부만 얘기할 게 아니다. 한국에서 IT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대개 통신 전문가다. 특히 IT에 관해 한 목소리 높이는 사람들 가운데 정책을 만들고 실행하는 관(官)의 영역에서 이런 현상이 극심하다. 예를 들어 국회의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소속 의원을 보자. 24명 가운데 IT 관련 경력자는 새누리당 권은희 의원이 유일하다. 그런데 권 의원도 KT 출신이다. 지난 대선을 앞뒀을 당시에는 새누리당 진영 의원과 민주통합당 변재일 의원이 만든 '국회 ICT 전문가 포럼'이란 단체도 있었다. 이 모임을 발의한 변재일 의원은 옛 정보통신부 차관 출신이다. 물론 권 의원, 변 의원 같은 분들은 그나마 국회의 IT 리터러시를 높이고 있는 중요한 사람들일 테다. 하지만 왜 그들은 하나같이 통신 전문가일까.

이는 초고속인터넷과 이동통신 통신망을 세계에서 가장 빨리 보급하면서 ‘IT 강국’을 만들어보려고 했던 한국의 발전과 관련이 깊다. IT 산업도 산업이니까 철강회사나 조선소를 설치하던 것처럼 터를 닦고 통신망을 깔아두면 좋은 제품이 나오리라 생각했던 셈이다. 틀린 얘기는 아닌데, 문제는 이 분야의 발전속도가 5개년, 10개년 계획을 세울 만큼 느긋하지 않다는 데 있었다. 통신망을 까는 건 최소 2년은 보고 해야 하는 일인데, 인터넷 업계에서는 2년이면 1000만 명이 넘게 쓰는 서비스를 만든 성공적인 회사가 탄생했다가 그 회사가 언제 성공했느냐는 듯 쫄딱 망해버릴 수도 있는 시간이다.

한국도 1990년대 후반 이른바 ‘닷컴버블’이 생긴 뒤 NHN과 다음, 넥슨, 엔씨소프트, 카카오 등 이 분야의 훌륭한 기업들이 여럿 등장했다. 하지만 통신 전문가들은 여전히 이들을 '덜 중요한 분야'로 취급한다. 가끔은 아이 취급한다는 생각까지 든다. 일부러 그런다는 느낌도 받게 된다. 예를 들어 ‘카카오톡’은 무료 음성통화와 문자메시지를 만들면서 통신사의 수익 기반을 뒤흔들고 있는데 통신 전문가들이 이런 기업 창업자들을 인정하면 기존의 산업 구조도 요동치기 때문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한국보다 IT 산업의 역사가 긴 미국에서도 이런 식의 통신 전문가와 인터넷·소프트웨어 전문가들의 대립이 심했다. 미국 IT 업계에서는 이 대립구도를 가리켜 ‘벨헤드 대 넷헤드’라고 불렀다. 벨은 전화기를 발명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에서 나온 말이고, 넷은 인터넷의 넷에서 나왔다. 그러니까 벨연구소 출신인 김종훈 전 미래부 장관후보 같은 기업인은 대표적인 벨헤드고, 구글의 창업자 래리 페이지나 세르게이 브린 같은 사람들은 대표적인 넷헤드다. 벨헤드는 안정적으로 운영되는 통신서비스와 통신 기반기술 등 잘 통제된 안정적인 기술 개발을 강조하지만 넷헤드는 수평적으로 연결된 인터넷이 만드는 때로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급격한 기술 발전에 매혹당한다.

이들은 사고 방식이 전혀 다르다. 전에 MWC에 다녀와서 썼던 글에서도 얘기했는데 통신사와 인터넷 기업들은 똑같은 사실을 완전히 다르게 해석한다. 예를 들어 카카오톡과 바이버가 서로 통신할 수 없는 건 인터넷 기업에겐 아무 것도 아니다. 이건 차별화다. 그런데 통신사에겐 서로 통신할 수 없는 앱은 실패다. 상호호환에 실패한 바보같은 통신수단이다. 이런 대립은 옳고 그르다고 설명할 수가 없다. 그냥 다른 것이다. 둘 다 각자의 의미와 논리가 있다.

따라서 벨헤드와 넷헤드는 미국에서도 사사건건 부딪혔다.(세계 각국에서 부딪힌다.) 하지만 최근에는 넷헤드들의 목소리가 점점 강해지는 추세다. 지금은 인터넷의 시대니까.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설치한 대통령 직속 과학기술자문위원회(PCAST)의 구성을 보면 위원 19명 가운데 IT 관련 인사가 네 명이다. PCAST는 생물학부터 의학, 에너지, 천체물리학과 IT 등 다양한 분야를 망라한다. 그런데 이 넓은 분야 가운데 IT 전문가가 넷이나 들어간 것도 대단하지만 그 네 명 가운데 벨헤드가 한 명도 없다는 사실도 놀랍다. 게다가 부위원장인 윌리엄 프레스 오스틴 텍사스주립대 컴퓨터과학과 교수를 제외한 나머지 3명은 전현직 기업인이다. 에릭 슈미트 구글 회장과 크레이그 먼디 마이크로소프트 수석자문역(전 최고연구전략책임자), 썬마이크로시스템즈 출신의 벤처투자자인 마크 고렌버그 허머윈블라드 총괄이사가 그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하는 자문이란 당연히 인터넷에 기반한 새로운 부가가치를 만들고, 소프트웨어의 발전을 도모하며, 좋은 벤처기업 생태계를 만들라는 자문일 수밖에 없다. 이들이 그런 방식으로 진짜 성공을 거뒀기 때문이다.

사실 통신이라는 인프라와 소프트웨어 및 인터넷 서비스라는 응용 제품은 IT 산업 전체의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두 날개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국에선 이 균형이 한쪽으로 지나치게 쏠려왔던 게 문제였다. 이는 지난 대선 때 IT 기업인들이 대거 안철수 전 후보를 지지했던 데에서도 드러난다. 넷헤드의 입장을 반영하는 정치인이 턱없이 부족했던 게 이런 쏠림 현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대선 과정에서 모든 후보와 진영이 IT를 통한 경제발전을 내세우는데, 이 가운데 소프트웨어와 인터넷이 왜 중요한지 이해하고 설명하는 사람은 안철수 후보 혼자였다. 내 주위에는 정치적인 견해 때문에 안 후보를 지지하는 게 아니라, 이런 기본적인 이해도의 차이 때문에 안 후보를 지지한다는 사람이 굉장히 많았다.

김상헌 NHN 대표는 인터넷기업협회장 자격으로 최근 돌아가는 일들을 다양하게 들려줬다. 우선 중요한 일은 "존재를 인정받는 것"이라고 했다. 지금 넥슨이나 NHN 같은 회사는 시가총액에서 KT보다도 큰 회사다. 하지만 과연 그만한 대접을 한국 산업계에서 받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천만의 말씀이다. 온갖 규제의 대상일 뿐이다. 사실 소비자 개개인에게 주는 영향은 이런 기업이 KT 못잖은데 말이다.

문제는 넷헤드들에게도 있다. 인터넷 기업 창업자들이나 주요 인물들은 여전히 공적인 활동에 소극적이다. 자유로운 삶을 좋아하는 건 좋지만 그 자유를 만들어 준 사회에 봉사하는 건 일종의 의무다. 에릭 슈미트가 PCAST에 참여하는 건 그렇게 정부의 활동을 돕는 게 사회적 책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와중에 업계의 이익을 대변하겠다는 생각도 없지는 않겠지만. 한국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보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