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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다르다지만 때론 도덕교과서가 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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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 관련 책을 펼치면 꼭 도덕교과서 같습니다. 상대방을 먼저 배려해라, 거짓말하지마라, 내가 원하는 걸 먼저 밝혀라... 그래서 전 이런 당연한 소리는 필요없다는 생각에 협상 관련 책도 잘 안 읽고 협상을 하곤 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했던 협상 업무 가운데 가장 큰 건은 국내 모 인터넷기업과 했던 협상이었습니다. 터프한 협상 파트너였죠. 계약서 초안을 들이밀며 "이게 다른 곳들이 다 받아들인 계약서니 당신들도 받아들이라"고 요구했습니다. 감정이 상한 저는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버텼고, 협상이 마무리될 때까지 약 10개월을 실랑이를 벌였습니다. 작은 협상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열 달 씩 끌 협상도 아니었죠. 그리고 협상이 마무리되자 저와 상대방 양쪽 실무자들은 서로에 대해 감정이 상할 대로 상했습니다. 상대방에 대한 신뢰도 잃었고, 다음 협상은 저들과는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협상에서 많은 걸 얻어낸 것도, 상대가 저보다 많은 걸 얻어낸 것도 아니었습니다.

도덕교과서같은 협상책을 다시 읽게 된 건 지난 두 주 동안 주말마다 대학원 수업을 청강하면서였습니다. 제 커리큘럼에는 빠졌던 협상 과목이 올해 새로 생겼다며 학교 측이 청강을 해보라 권해줬죠. 교수님은 청강생도 시뮬레이션에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시뮬레이션을 진행하고, 수업을 들으며, 협상 관련 책들을 읽게 됐는데 마치 뒷통수를 망치로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첫 시뮬레이션은 석유가격 협상이었습니다. A와 B는 적대국인데 C국에 석유를 경쟁적으로 파는 나라입니다. C국은 매월 초 A와 B로부터 석유 가격을 받아보고는 싼 쪽에서 석유를 삽니다. 예를 들어 배럴 당 30달러에 판다면 A와 B는 모두 최고 가격에 파는 겁니다. C는 30달러까지는 지불할 용의가 있습니다. A와 B에서 못 사면 먼 곳에서 석유를 사야 하는데 그러면 운송료 등을 따져서 30달러 이상 줘야 할테니까요. 우리는 양쪽으로 니뉘어 A와 B를 각각 맡았습니다. 처음 제 협상 목표는 상대방과의 담합이었습니다. 함께 30달러에 팔면 양 쪽 다 이익인 게 틀림없기 때문이지요. 문제는 상대방이 담합을 깨고 우리보다 낮은 가격에 팔면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많은 석유를 팔아 더 높은 이익을 내게 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제약 조건도 있었습니다. A와 B는 서로 적대국이라 일상적인 외교 관계가 없어 담합이 힘듭니다. 결국 최종적으로 제가 속한 팀은 가격경쟁에 돌입했습니다. 어차피 '신사협정'이란 깨질 수밖에 없다며 상대를 극도로 불신한 것이죠. 속임수도 난무했습니다. 저도, 상대방도, '포커페이스'로 다음번에 써낼 가격을 상대방에게 속여서 알려줬습니다. 그 결과 우리 조는 최악의 이윤을 냈습니다. 1등을 했던 팀은 한쪽이 가격 경쟁에 돌입할 때 꿋꿋이 30달러를 유지하는 파트너가 있던 팀이었습니다. "우리를 믿어라, 우리는 30달러 가격을 지킨다"는 시그널을 상대에게 보내 윈-윈하는 관계를 만들었던 거죠.

두번째 시뮬레이션은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는 각자 오페라극장과 한물간 나이든 오페라 배우의 역할을 맡아 협상에 들어갔습니다. 극장은 지금 주연 배우가 갑자기 부상으로 공백이 생겨 한물간 배우지만 '주연 경험이 있는' 이 나이든 배우를 캐스팅해야만 하는 다급한 상황이었습니다. 제 역할은 이 극장의 스카우트 담당 직원이었죠. 극장은 개런티로 이 한물 간 배우에게 4만5000달러를 줘도 좋다는 승인을 했습니다. 전 그것보다 얼마나 싸게 스카우트를 하느냐가 극장에서 제 능력을 인정받는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상대편 배우의 입장은 전혀 몰랐습니다. 그저 그녀가 한물 간 배우라 돈이 궁할 것이고, 허세를 부릴 것이며, 배짱을 튕기리라는 짐작을 했을 뿐이죠.

전 목표를 이루기 위해 그녀에게 1만 달러 개런티를 제안했습니다. 그랬더니 저쪽은 3만 달러 정도를 부르더군요. 4만5000달러보다 한참 낮은 금액이었으니 속으로 이게 왠 횡재냐 싶었습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었습니다. 그 배우가 자신을 전국 방송을 타는 TV쇼에 출연하도록 보장해 달라는 겁니다. 우리 극장의 영향력이면 될 거라면서. 제겐 그런 권한이 없었습니다. 조건을 들어줄 수 없다, 돈을 더 주겠다, 3만 달러는 비싸다... 지리한 협상이 이어졌고 최종 계약서는 3만5000달러에 조건없이 한 번 우리 극장에 단발 공연을 하고 떠나는 걸로 마무리됐습니다. 그랬더니 결국 교수님께 협상을 잘못했다고 된통 혼났습니다. 우리가 한물 간 배우에게 준 개런티가 다른 조와 비교했더니 가장 비싼 편이었기 때문이죠. 조건을 막겠다, 한번만 계약하고 부담없이 버리겠다 생각했더니 결국 돈을 많이 줘버린 겁니다.

반면 1등을 한 조는 겨우 1만5000달러를 줬습니다. 대신 이번 공연이 흥행에 성공하면 다음 주연을 뽑을 때 우선적으로 주연 자리를 검토해보겠다는 '우선협상권'과 한물 간 배우지만 공연 홍보 때 주연 배우로 제대로 홍보해주겠다는 조건을 더 달았습니다. 전국 TV쇼 같은 무리한 조건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추가 비용이 들 일도 없었습니다. 어차피 공연 홍보는 해야 하고, 공연이 성공하려면 주연 배우 홍보도 잘 돼야 하는 것이니까요. 이번 공연의 흥행이 잘 된다면 이 배우는 한물 간 배우가 아니라 화려하게 재기한 배우가 되는 셈이니 다음 주연을 뽑을 때 우선협상권을 주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상대방은 왜 이런 불리한 조건을 받아들였을까요? 제가 극장으로부터 받은 지시사항은 '돈' 그리고 무조건 저 배우를 이번 공연에 캐스팅하라는 것 단 두 가지였습니다. 저는 몰랐지만, 여배우를 대신해 협상장에 앉은 제 파트너(여배우의 에이전트)가 받은 지시사항은 "무조건 주연 자리를 따오라, 무료라도 괜찮다"는 것 하나였습니다. 한물 간 배우의 유일한 이해관계는 내가 아직 한물 간 게 아니라는 걸 세상에 증명하는 것 뿐이었던거죠. 그걸 제 입장만 생각하며 돈으로만 접근했으니 저는 돈도 잃고 신뢰도 잃은 겁니다. 제가 현실에서 벌였던 협상과 똑같은 실수였죠. 1등을 했던 조는 저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해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으나, 당신을 위해 최고의 자리를 만들어주겠다, 그게 우리도 이익이다라는 메시지를 솔직하게 전달했죠.

하바드대 협상문제연구소에서 1981년에 출간한 '협상의 교과서' 격인 '예스를 이끌어내는 협상법'에는 협상의 몇 가지 원칙 가운데 하나로 "상대방의 처지(position)를 살피지 말고 상대방의 이해관계(interests)에 집중하라"고 말합니다. 저는 전형적으로 상대방이 처한 처지만 보고 협상하는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상대를 배려해야만 협상을 통해 양쪽 모두 이익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게 궁극적으로 나의 이익에 맞게 행동하는 길입니다.

사실 협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실제 협상장에서 온갖 교활한 권모술수를 사용하려 들고, 이런 속임수로 상대를 속여 넘겨 얻게 되는 달콤한 과실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니까요. 하지만 수많은 책과 강연이 각종 트릭과 사람들이 쉽게 빠지는 심리적 결함에 대해 설명한다고 해도, 아무리 우리가 그런 트릭들에 익숙해진다고 해도, 막상 내가 그 트릭을 쓰는 순간 나와 상대방은 모두가 서로 잃기만 하는 게임에 빠져들게 마련입니다. 수업 마지막에 교수님은 딱 한 가지만 머리속에 명심하고 있으면 협상장에서 큰 실수는 하지 않을 거라 하시더군요. "나와 협상하기 위해 나오는 사람들 가운데 나보다 멍청한 사람은 없다"는 것이죠.

협상 수업이 너무 좋았다는 얘기를 하자 한 분이 협상 과목을 의무교육 과정에 집어넣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도 100% 동의합니다. 이기기 위한 기술을 모두에게 가르쳐서 결국 모두가 지게 되는 사회는 지금까지 봐 온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