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집트의 체 게바라
by 김상훈
사실 나는 와엘 고님을 잘 몰랐다. 이집트 혁명의 영웅이고, 구글 직원이라고 했던 것 정도밖에는. 그가 이집트에서 페이스북 페이지를 만들었고 이 페이스북 페이지는 이집트 혁명을 촉발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것 정도도 뉴스를 통해 듣기는 했다. 그가 지난달 한국에 왔고, 관심이 가서 그가 쓴 책을 읽어봤다. '레볼루션 2.0'. 고님의 나이는 나보다 어렸고, 그의 큰 딸은 내 아들보다 나이가 많았다. 한 때 고님은 이집트 정부에 의해 납치됐다가 풀려나기도 했으며 구글은 이 문제많았던 직원을 해고하는 대신 구출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구글은 '이집트를 위해 할 일이 있다'는 그의 요구를 듣자 장기 휴직도 허락했다. 좋은 회사였다. 사실 그럴만도 했다. 고님은 꼭 구글에 들어가고 싶다며 구글에 낙방을 할 때마다 몇 차례고 다시 입사지원을 했다. 이번엔 전보다 나아졌다며. 고님 스스로가 좋은 직원이었다.
와엘 고님은 여러 면에서 체 게바라를 연상시켰다. 두 사람 다 독재 정권에 맞서 싸웠고, 자신들의 주 활동 무대가 된 곳에서 일종의 국외자였으며, 혁명 이후에는 사람들의 내면 변화를 이끄는 일을 하고자 했다.
비교해 보자. 체 게바라는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의사로 살다가 자신과 별 관계도 없는 나라였던 쿠바 혁명에 뛰어든다. 와엘 고님은 이집트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을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보냈고 구글에 입사한 뒤에는 두바이에서 살았다. 게다가 아내는 미국인이었다. 체 게바라의 쿠바든, 와엘 고님의 이집트든 모두 이들의 인생과는 별 관계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물론 두 사람 다 자신들이 사랑한 나라의 일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고님은 이집트인 아니었느냐 물을지 모르겠지만 심지어 고님은 미국인과 결혼한 뒤에도 미국 시민권 신청을 하지 않았다. 그를 심문하던 이집트 경찰들조차 의아해했다.
두 사람 모두 혁명이 끝난 뒤에는 정치와 관계 없는 뒷자리로 물러섰다는 것도 비슷하다. 체 게바라는 권력에 관심이 없었다. 쿠바는 카스트로에게 맡겨두고 자신은 다른 나라로 떠났다. 그 뒤 카스트로가 쿠바에서 새로운 절대 권력이 되는 걸 보면서 혁명이 이어지려면 무엇보다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가 얘기했던 건 '새로운 인간'이었다. 교육을 통해 변화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그의 시대에는 인터넷이 없었으니, 게바라는 책을 쓰고 연설을 하며 중남미 대륙을 순회했다. 고님도 혁명이 끝난 뒤 정치 권력에 가까이 다가서지 않았다. 그 뒤 이집트에서는 혁명 이후 각종 정치 세력들이 생겨나면서 온갖 정치적 혼란을 빚게 된다. 고님 또한 민주화가 이어지려면 사람들의 의식이 발전해야 한다면서 교육을 강조했다. 그가 체 게바라와 다른 건 지금은 인터넷의 시대라는 점이다. 그는 게바라처럼 이집트를 순회하는 대신 누구나 어디서든 볼 수 있는 교육 콘텐츠를 만들어 웹에 올려두고자 했다.
그래서 고님이 학교에 간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신기하면서도 고개가 끄덕여졌다. 부자들이 다니는 사립학교 말고, 꼭 공립학교에 가보고 싶다는 고님에게 구글코리아 직원들은 이태원 초등학교를 소개해 줬다. 나도 굉장히 오랜만에 초등학교를 가봤는데, 깜짝 놀랐다. 한국 초등학교가 낯설 정도로 좋았다. 학생들은 갤럭시노트 태블릿 수십대를 들고 수업 시간에 검색과 그림그리기를 했다. 칠판은 이미 오랜 옛날에 전자칠판으로 바뀌어서 흑판에 백묵으로 글씨를 쓰다가 먼지가 날리는 일 같은 건 사라진 지 오래였다. 고님이 도대체 초등학교 예산이 얼마나 되기에 이러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도 처음으로 찾아봤다. 올해 예산안을 보니 유치원과 중학교까지 포함한 유초중등 교육예산이 40조 원이 넘었다. 세상에.

어쨌든 고님은 이집트 혁명이 정말 성공하려면 사람들이 좋은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은 좋은 교육은 세계 어디서든 받을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인터넷 덕분이었다. 지금 고님은 나바닷재단이란 걸 만들었다. 비정부기구(NGO)인데, 교육 재단이다. 동영상 강의를 만들어 인터넷으로 보게 해준다. 칸 아카데미 같은 교육 프로그램과 비슷한데, 특징은 "누구나 교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교수들의 잘 갖춰진 강의도 강의지만, 이보다는 지역에서 자신의 지식을 콘텐츠로 만들어 보급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게 목표다. 그러니까 이는 아랍어 콘텐츠를 늘리는 길이기도 하다. 나바닷재단은 이집트 전역을 돌아다니며 간이 방송 스튜디오를 세운다. 동네 화학교사가 간단한 실험실습 교육 비디오를 찍을 수도 있고, 컴퓨터 그래픽을 지원받은 물리교사가 천체물리학도 강의할 수 있다. 한국에 관심을 가진 건 이런 이유에서였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이 가장 보편적으로 퍼져있다는 나라. 그는 "값싼 태블릿 보급이 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PC보다 다루기 쉽고, 덜 망가지며, 교육 용도로 적합하기 때문이다.
사실 혁명도 그렇고, 교육 사업도 그렇고, 고님은 전형적인 인터넷 기획자이자 마케터다. MBA 출신이라서인지 모든 걸 온라인 마케팅의 틀로 바라본다. 이집트 정부에 대한 저항운동도 페이스북에서 인기 콘텐츠를 바이럴 마케팅으로 확산시키듯 확산시켰다. 예를 들어 거리에 나가 시위를 벌이는 대신 해변을 바라보고 검은 옷을 입은 채 침묵하면서 줄 지어 서있자는 얘기를 했고, 이를 사진으로 찍어 페이스북에 올리자는 운동을 제안했다. 이집트 전역은 물론이고 심지어 해외의 이집트 동포들까지 이 운동에 참여해 사진을 찍었다. 참가자들은 이를 '사일런트 스탠딩'(silent standing)이라고 이름 붙였다.

사용자 참여형 인터넷 마케팅의 전형적인 방식이었다. 이외에도 프로필 사진을 바꾸게 권한다거나, 다른 인터넷 커뮤니티와 공동 행동을 하는 등의 마케팅이 효과적으로 작동했다. 결국 마지막에는 "페이스북이 아니라 거리에서" 모든 게 이뤄졌지만 그 이전에 이집트인들의 두려움을 걷어내는 데 고님의 페이스북 페이지는 큰 역할을 했다.
고님은 이를 '세일즈 터널'에 비유했다. 잠재고객에 조심스럽게 접근한 뒤 이들을 기회 고객으로 변화시켜서 최종적으로 구매 고객으로 바꿔내는 영업 기술 말이다. 그는 반정부 운동을 열심히 하는 활동가들이 아닌 두려움 많은 이집트의 평범한 사람들을 잠재고객으로 봤다. 그리고 이들을 기회고객으로 바꾸기 위해 어렵지 않은 실천에 해당하는 프로필 사진 바꾸기에서 시작해 사일런트 스탠딩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들을 광장으로 이끌어내면서 구매를 완성한 셈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MBA와 인터넷으로 혁명을 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