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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삶의 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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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에서 성공하려면 밤낮없이 일만 생각하는 일 중독자가 돼야 할까요? 일과 삶의 균형을 갖춰야 진정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것 아닐까요? 도대체 얼마나 일하는 것이 성공을 위한 길인지 궁금해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경영의 신’ 취급을 받는 GE의 CEO 잭 웰치는 망설이지 않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과 삶의 균형(Work-Life Balance)이란 말은 없어요. 오직 일 또는 삶 사이의 선택(Work-Life Choice)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에 따라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지지요.”

아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잭 웰치는 매년 20-70-10 규칙이라는 성과평가 방식을 통해 하위 10% 직원을 잘라내고, 성과를 못 내는 자회사를 문 닫아버리길 꺼리지 않던 무자비한 최고경영자였으니 할 수 있는 소리였을지도 모릅니다.

다른 기업들은 당연히 다른 얘기를 합니다. GE 못잖게 미국이 자랑하는 또 하나의 ‘100년 기업’으로 IBM이 있습니다. 이 회사는 직원들을 위해 무엇이든 해주려고 듭니다. 엄마 직원을 위한 멋진 탁아소는 기본이고, 자녀의 명문대 진학을 돕는 ‘입학상담사’를 회사가 고용해 주기도 하죠. 회사에 나오지 않고 재택근무를 할 수 있는 건 기본이고, 아이의 하교 시간에 맞춰 부모가 퇴근 시간을 자율적으로 설정할 수도 있습니다. 이 회사에서는 “직원이 가족에 대한 잔걱정에 신경쓰다 일에 대한 집중력을 잃는 게 회사에겐 더 큰 문제”라고 얘길 하죠.

IBM의 직원 탁아소

세상에 ‘올바른 방식’이란 건 쉽게 찾기 힘든 파랑새와 마찬가지입니다. 각자 자신의 처지에 따른 선택이 있는 법이고, 어쩌면 우리 옆에 있거나 혹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일과 삶의 균형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잘 살기 위해 일하지만 때때로 일이 너무 좋은 사람들은 그 일을 하기 위해 살아가기도 합니다.

과연 이 두 방법 가운데 어느 하나만이 정답이라고 얘기할 수 있는 걸까요? 성공한 기업 대부분은 초기에 직원들이 하루 16시간 씩 일하면서 일주일에 100시간도 일했다고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주말을 포함해 잠 자는 시간을 빼놓고 모든 시간을 일에 쏟는 이같은 방식을 누구나 따라갈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그러니 과연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하는 걸까요?

최근의 경향은 단연 일과 삶의 균형에 손을 들어 주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일과 삶의 균형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근로자를 착취하는 전근대적인 기업 문화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으니까요. 특히나 최근 성공한 IT 기업들은 ‘꿈의 직장’ 수준이라는 근무 조건을 갖추려고 경쟁적으로 노력하면서 이런 경향에 불을 붙였습니다. 구글은 공짜 점심을 제공하고 회사 안에 수영장을 갖춰 놓고 있으며, 페이스북은 직원들의 빨래를 대신해주고 애완동물과 함께 출퇴근해도 된다고 하죠. 이런 상황에서 일과 삶의 균형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기업은 이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좋은 인재를 잡기 위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이런 경향은 더욱 늘어났지요. 이제는 더이상 어떤 기업도 잭 웰치처럼 일과 삶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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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안에 있는 인공으로 물이 흐르는 수영 트레드밀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됐을까요? 천만에요. 문제는 여전했습니다. 여전히 아이를 키우는 여성들은 일터에서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남성 직원들의 행복도가 올라간 것도 아닙니다. 회사는 탁아소를 제공하고, 재택근무 제도도 도입했는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요.

지난해 영국의 글로벌 컨설팅업체 에른스트앤영은 대규모 설문조사를 실시했습니다. 기업들이 제공하는 일과 삶의 균형 프로그램에 대한 만족도를 물어본 것이죠. 그 결과 많은 회사들이 일과 삶의 균형을 잡기 위한 재택근무와 탄력근무, 탁아소 운영 등의 제도를 운영하고 있었지만 정작 직원들이 이런 제도에 대해 만족한다는 대답은 겨우 절반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이 조사팀은 “일과 삶의 균형이란 단순한 신화에 불과하다”는 도발적인 결론을 냅니다. 이 표현 자체가 직원들의 욕구를 만족시켜주지도 못하고 삶을 개선하지도 못한다는 내용이었죠. 이 조사는 많은 ‘일 중독자’들의 지지도 얻었습니다. 사실 일 중독이라는 표현 자체가 편견에 가득찬 표현이라는 얘기였죠. 일 중독이란 일을 하는 게 너무 좋아서 생활을 돌보지 않고 점점 일에만 빠져 들어 건강도 해치고 바람직한 가정생활이나 사교 활동마저 포기하는 경우를 뜻합니다. 하지만 정작 일 중독으로 불리는 사람들을 한 번 떠올려 보세요. 마약 중독이나 알콜 중독과도 비슷한 이런 극단적인 경우에 빠진 사람들은 극히 드뭅니다.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라도 이들은 건강 관리에 더 노력하고, 재충전을 해서 더 일하기 위해서 가정에서의 행복도 소중하게 여깁니다. 이런 반론에 따라 조사팀이 내린 결론은 일과 삶의 균형이 아니라 ‘일과 삶의 통합’이었습니다.

일과 삶의 균형이란 말은 그 표현 자체가 '일은 나쁜 것'이고 '삶은 좋은 것’이란 전제를 깔고 있다는 반성을 한 것이죠. 이 표현에는 일은 하면 할수록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것이라는 편견도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소명의식을 느끼는 보람찬 일을 통해 인생의 만족도를 높입니다. 일이 잘 되면 행복해지니까요. 그렇다면 일은 생각처럼 나쁜 것이 아니라 삶에 좋은 것이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단순히 일을 하는 시간을 늘이고 줄려서 삶이 행복해질까요? 조사팀의 연구에 따르면 근무 시간이나 회사에서 일과 삶의 균형을 지원하는 제도가 있느냐 없느냐의 유무가 개인의 행복감에 주는 영향은 사람에 따라 10%대에서 70%대까지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즉 제도는 행복과 별 관계가 없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맡은 일에 대한 만족감이 행복도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그렇다면 맡은 일에 대한 만족감은 어떻게 늘어날까요? 물론 직업 선택과 직장에서의 역할 등이 가장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그런데 이는 회사가 직원들을 위해 쉽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직원 개개인이 평생에 걸쳐 노력하면서 찾아가야 할 문제이기도 합니다. 반면 상대적으로 쉬운 방법도 있었습니다. 바로 리더들이 사생활과 가정 생활에 대한 얘기를 공적인 자리에서 발언하는 것입니다. 아이 얘기, 가족 얘기, 취미 얘기 등을 CEO와 임원들이 직장에서 거리낌없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얘기를 회사에서 하는 사람들은 프로페셔널하지 않다고 여기는 분위기만 해결되어도 업무의 만족도가 높아지는 뚜렷한 상관관계가 발견됐기 때문이죠.

실제로 페이스북의 최고운영책임자(COO) 셰릴 샌드버그는 엄마로서의 삶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세계에서 가장 바쁜 기업의 최고 임원으로 살아가는 법을 들려주고 보여주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녀는 오후 5시면 무조건 퇴근해서 아이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합니다. 물론 그렇게 아이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아이가 잠이 들면 다시 업무에 복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삶이 힘들어도 보람있다는 얘기를 회사에서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거리낌없이 하죠. 구글의 초기 멤버였고 지금은 야후의 최고경영자(CEO)인 마리사 메이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구글의 초창기 시절 근무할 땐 일주일에 100시간씩 일했다고 하지만, 지금 CEO가 된 메이어는 야후의 직원들에게 일과 삶의 균형을 찾으라고 강조합니다. 심지어 회사의 CEO로서 멋진 옷을 차려 입고 패션잡지의 표지모델로 등장하기도 했죠.

보그 표지모델이 된 마리사 메이어
보그 표지모델이 된 마리사 메이어

무엇보다 이렇게 성공한 여성들이 보여주는 가장 큰 특징은 가정과 사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공적인 자리에서 하는 것 또한 프로페셔널의 삶이라는 메시지를 직원과 사회에게 던진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엄마로서의 삶, 자녀들의 성장, 가족 안에서의 행복 같은 개인적인 삶을 공적인 자리에서 드러내는데 거리낌이 없습니다.(심지어 회사에서 엉엉 운 얘기 같은 것도 드러내놓고 합니다.) 이 부분이 사실 오늘날 글로벌 기업의 가장 큰 변화이기도 합니다.

성공한 여성들은 이제 더 이상 가정 이야기를 감추지 않습니다. 우리 팀장의 아이가 학교 축구 팀에서 주전 선수가 된 일은 국회에서 기업 법인세법 개정안이 통과된 일 만큼이나 중요한 일로 받아들여집니다. 즉, 이제 기업의 잘 나가는 직원들도 사생활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사실 일과 삶의 통합이란 여기서부터 시작입니다. 개인의 삶이 직장에서의 삶 만큼 중요하다는 데 대한 모두의 동의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