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은 기업은 어떻게 큰 기업이 되는가. 어려운 변화를 이끈 휴맥스 이야기.
by 김상훈
'죽은 말에는 올라타지 말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비즈니스를 하는 많은 기업들은 이 격언과는 반대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1. 쉽게 죽은 말에 올라탑니다. 그리고나서 2. 기수를 바꾸고, 3. "우리는 계속 이런 식으로 말을 타 왔다"고 주장하며, 4. 죽은 말을 연구할 위원회를 만들고, 5. 죽은 말 승마 교육프로그램을 만듭니다. 아마 많이 보셨을 겁니다. 1. 사업이 부진합니다. 애초에 잘못된 방향으로 사업을 이끌었거나 시작하지 말았어야 할 일을 시작한 것일텐데도 사업이 부진하면 그 핵심 이유에는 눈을 감는 것이죠. 그리고는 2. 실적이 나쁜 사업부장에게 책임을 덮어씌워 그를 교체하고, 3. 사업부를 계속 유지하면서 '이 사업부는 예전부터 존재했다'고 주장합니다. 끝으로 4. 변화혁신위원회 따위를 만들어서 5. 직원들에게 변화혁신교육을 시킵니다. 하지만 해결책은 죽은 말에서 산 말로 갈아타는 것 뿐이죠.
그런 점에서 26일 있었던 휴맥스 변대규 사장의 기자간담회 얘기는 인상적이었습니다. 제목은 촌스러웠습니다. '매출 1조 원 돌파 기념'이었거든요. 하지만 죽은 말을 타는 대신 새 말에 올라탄다는 게 어떤 것인지 배운 느낌입니다. 변 사장은 창업을 꿈꾸는 다른 기업인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서 자리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신문에는 변 사장의 '늙은 경제' 얘기만 썼습니다. 그가 최근 40년 간 대기업을 제외하고 매출 1조 원이 넘는 창업 기업을 꼽아봤더니 웅진, 이랜드, NHN, 휴맥스 정도라며 이렇게 새 기업이 생기지 못하는 경제는 '늙은 경제'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와는 별도로 이날 변 사장이 들려준 휴맥스의 변화관리 얘기가 기억에 남습니다. 작은 기업이 큰 기업으로, 또는 큰 기업이 더 큰 기업으로 성장하려는 그 단계, 변화가 애타게 요구되는 단계의 이야기였죠. 많은 기업들이 여기에서 주저앉습니다. 모든 게 변하기 때문입니다. 휴맥스도 그럴 뻔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변화에 성공했죠. 그 얘기를 여기 다시 옮겨 봅니다.
우리가 그동안 몇 가지 좋은 선택을 했습니다. 지나고 보니 그랬다는 뜻이죠. 선택할 당시에 옳은 선택이라고 확신을 가진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돌이켜보니 운이 좋았다는 생각입니다. 후회되는 선택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TV산업에 진출하려고 했는데 그게 지난 5, 6년 동안 우리가 크게 고생했던 이유입니다. 당시에는 몇 가지 논리가 있었습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죠. 디지털TV 산업 경쟁에서 우리는 일본업체가 지고, 한국 업체가 일본의 자리를 빼앗거나 적어도 일본에 지지 않을 것으로 봤습니다. 그리고 일본 업체들이 탈락한 자리를 휴맥스가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한국 업체가 일본을 이긴 건 맞췄는데, 휴맥스가 그 자리를 차지하리라는 건 틀렸습니다. 그리고 실패에서 더 절실하게 배웠습니다. 기존 TV업체가 아닌 휴맥스는 경쟁자보다 앞선 혁신을 해서 기회를 잡아야 했는데, 혁신으로 성공하려면 작게 해야 했던 겁니다. 혁신적인 사업이라는 건 쉽게 성공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따라서 작게 혁신해서 변화에 맞춰 우리를 계속 바꿔나가야 했는데 혁신적인 사업을 애초에 너무 크게 시작해 버린 게 문제였습니다. 경영학 교과서에도 나오는 얘기를 무시했다가 크게 고생한 거죠.
큰 기업은 작은 기업보다 모든 면에서 앞섭니다. 브랜드가 있고, 훌륭한 인력을 많이 갖고 있으며, 자금과 유통망 등 모든 측면에서 작은 기업을 압도합니다. 작은 기업이 큰 기업보다 나은 건 단 하나입니다. '속도'죠. 빠르게 변화할 수 있는 속도가 핵심적인 경쟁력인데 휴맥스는 2003년 디지털TV 시장에 뛰어들면서 삼성전자, 소니와 경쟁을 염두에 두고 공장을 짓고, 규모를 키웠습니다. 하지만 투자 규모도, 생산 능력도 큰 기업과 정면 승부를 하기엔 어려웠습니다. 시장 상황에 맞춰 빠르게 이리저리 변화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하고 스스로 팔다리를 묶어버렸던 셈이죠. 이제 회사는 위기에 빠져갑니다. 그런데 엎친데 덮친격으로 문제는 전략만이 아니었다는 게 드러납니다.
어느날 보니 저는 같은 조직의 같은 CEO인데 같은 얘기의 의미가 달라졌습니다. 규모가 작을 땐 "품질을 바로 잡자"고 하면 직원들이 이걸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사장님 머리 아프게 왜 그러세요, 그러지 말고 저녁에 소주나 한잔 하면서 편히 얘기해요." 이랬던 거죠. 그런데 지금은 제가 "품질을 바로 잡자"고 하면 직원들이 만사를 제치고 "사장님이 품질 경영을 강조하셨으니 품질부터 잡자!" 이러는 거에요. 직원들도 달라져요. 예전엔 문제가 하나 생기면 전 부서가 달려들어서 회사의 문제가 내 책임인 것처럼 나서서 일하고 아이디어를 냈어요. 그런데 이젠 다들 내 책임이 아니라고만 하죠.
조직이 변합니다. 모두의 역할이 변합니다. 예전에는 주먹 구구로 했던 일들이 이제는 명확한 책임 소재와 역할 구분에 따라 이뤄져야 합니다. 회사가 처음 문을 열었을 때에는 업무 지시라는 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인력은 별로 없고, 할 일도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창업자 몇 명이 자신들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고, 일을 하다보면 모자란 인력을 그때그때 데려옵니다. 이게 기업이 성장하는 첫 단계죠. 초기의 휴맥스에서 변 사장이 '품질을 바로 잡자'고 했을 때의 직원들의 태도가 이런 겁니다. 모두가 함께 할 일, 그건 작은 회사를 키우는 훌륭한 자세입니다. 하지만 회사 규모가 커지면서 CEO와 모든 직원들이 매일 의사소통할 단계를 넘어선 거죠. 변화가 필요해집니다.
제법 큰 기업을 경영하기 위한 체제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았어요. 사람들에게 변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데만 1년이 걸렸죠. 그런데 그 뒤에도 변하기는 해야겠는데,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식이 사내에 생기질 않는거에요. 개발을 하는 게 우리 회사의 가장 큰 일인데, 도대체 개발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하느냐는 걸 다시 배우는데에만 1년이 걸렸습니다. 서플라이체인(공급망) 바꾸는데 4년 걸렸고, 아직도 바꾸고 있어요.
CEO인 변 사장이 직접 나서서 직원들에게 "내 판단이 잘못됐다, 우리가 몇 년을 허비했다, 다시 변하자"고 말했습니다. 이보다 더 강한 위기의식은 없습니다. 그는 조직을 다시 정비했고, 구성원 모두에게 변화의 필요를 강조했습니다. 1년을 오롯이 변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데 사용했죠. 이때부터 팀장들에게 권한이 과감하게 부여됐고, 영업실적이 개선됐습니다. 이렇게 작은 성공의 신호가 나타나자 조직에서 변화에 대한 냉소도 사라지게 됩니다. 변 사장은 아직도 4년 째 공급망 변화 프로세스를 진행 중이라고 합니다. 변화 관리란 지속되지 않으면 쓸데없기 때문입니다.
변화란 건 말은 쉽지만, 뭘 바꿀지, 어떻게 바꿀지 조직 구성원들이 모두 알아야 한다는 점에서 실행이 어렵습니다. 그러지 못하면 죽은 말에 올라타고 변화교육만 반복하는 셈이죠. 일반적으로 기업의 변화에는 다음과 같은 요소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위기의식(Urgency), 단합(Coalition), 비젼(Vision), 소통(Communication), 권한부여(Empower), 성과(Wins), 지속(Sustain)이죠. 위기의식 없이는 누구도 움직이지 않고, 모두 함께 움직이지 않으면 변화가 아니며, 비젼 없이는 올바른 방향으로 변화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또 서로 끊임없이 의사소통하지 않으면 변화의 과정이 공유되지 않고, 권한 부여 없이는 실행이 안 되죠. 또 실행을 통해 작은 성공을 거둬야 냉소가 줄어듭니다. 무엇보다 변화란 지속되어야 합니다.
창업 단계, 또는 작은 회사의 단계에서는 조직의 개인들이 스스로의 업무를 정하는 게 중요합니다. 주인의식과 책임감을 갖게 되니까요. 하지만 조직이 커지면 결국 이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에 자신이 책임을 지게 되기 때문이죠. 그러면 사람을 생각하고 업무를 나누던 과정을 바꿔야 합니다. 거꾸로 상품이나 서비스 같은 최종 결과물로부터 시작해서 사람을 나누는 거죠. 예를 들어 골판지 상자를 만들어 판매한다고 치면 여기에는 종이를 사야 하고, 기계를 관리해야 하며, 공장 운영을 해야 하고, 컨베이어벨트 앞에서 제품을 포장해야 하고, 이를 유통점에 배달하고, 판촉 활동을 해야 하는 등 다양한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걸 미분하듯 쪼개고 쪼개 1명이 담당할 수 있는 수준까지 거꾸로 나누는 거죠. 그렇게 제품부터 생각하면 '프로세스'가 나옵니다. 반면 사람이 무엇을 할지부터 생각하다보면 꼭 놓치는 일이 나오고 빈 공간을 메우기 위해 비효율이 생깁니다. 그런 점에서 변 사장의 "개발을 하는 게 우리 회사의 가장 큰 일인데, 도대체 개발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하느냐는 걸 다시 배우는데에만 1년이 걸렸다"는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익숙했던 일을 뒤집어 생각하면서 회사를 바꿔왔다는 뜻이니까요.
이 회사는 또 신사업에 도전합니다. 차량용 '인포테인먼트'(Infotainment) 시스템이라고 합니다. TV 사업에 진출한다고 했을 때 투자자들과 주변 사람들은 변 사장에게 '무모하다'는 소리를 많이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다를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들이 어떤 성과를 낼지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