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preting Compiler

제국의 역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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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만 해도 ARM이란 회사를 얘기하려면 한참을 설명해야 했습니다. 프로세서의 핵심인 코어를 설계하는 팹리스 반도체업체라고 얘기하면 한마디 한마디의 용어설명을 따로 붙여야만 했으니까요. 그런데 이제는 꽤 많은 사람들이 ARM이라는 이름을 얘기하면 "어디서 들어봤다"고 말합니다. 스마트폰 대부분에 ARM 코어가 쓰이기 시작하면서부터죠. 애플이 만든 프로세서인 A4, A5에도 ARM 코어가 쓰이고 삼성전자가 만든 엑시노스 같은 프로세서에도 ARM 코어가 쓰입니다. 퀄컴은 아예 '스냅드래곤'이라는 브랜드까지 만들어서 ARM 코어의 칩셋을 만들어 스마트폰 제조사에게 판매하고 있습니다. 최근 새롭게 모바일 프로세서 시장의 강자로 주목받고 있는 엔비디아도 테그라라는 칩셋에 ARM 코어를 사용합니다. 잘 알려지지도 않았던 ARM이 주목을 끄는 동안 한편에서는 과거의 세계 1위 반도체 업체가 '한 물 간 거인' 취급을 받고 있었습니다. 바로 인텔이었죠. 데스크톱과 노트북 시장에서 인텔은 말 그대로 경쟁자가 없는 세계 최고 업체였는데, 스마트폰과 태블릿PC가 뜨면서 외면받습니다. 이유는 하나였습니다. 인텔의 프로세서가 '전기 먹는 하마'였거든요.

ARM의 특징은 전력 소비가 적다는 겁니다. 대신 프로세서의 처리능력이 다소 떨어지죠. 인텔은 처리능력으로 봤을 땐 능력이 탁월합니다. 그런데 들고 다니면서 쓰기에는 전기를 너무 많이 씁니다. 스마트폰과 태블릿이 대중화되지 않았을 때에는 ARM이 주목을 받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 때는 전자기기는 모두 전원에 연결해 썼으니 프로세서의 능력이 모든 걸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젠 다릅니다. 굳이 컴퓨터에 맞먹는 처리능력까지는 아니더라도 배터리가 오래가는 게 중요합니다. 전력을 적게 쓰는 ARM이 의미가 있죠. 이 때문에 반도체 전쟁의 전선이 이동했다는 얘기까지 나왔습니다. 이젠 누구도 AMD와 인텔의 경쟁 같은 얘기는 하지 않습니다. 대신 최근의 판세를 ARM 연합군과 인텔 제국의 전쟁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2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인텔이 그동안 많이 갈고 닦은 모양입니다. 이 스마트폰이 바로 인텔이 최근 만들어 제조사들에게 공개한 시험용 스마트폰입니다. 구글의 안드로이드 진저브레드 버전을 사용했는데 중요한 건 그 안에 들어간 핵심 프로세서가 인텔이 만든 '메드필드'(Medfield)라는 점입니다. 테크놀로지 리뷰가 직접 사용해 보면서 느낌을 적었습니다. 두께를 최근 판매되고 있는 인기 스마트폰과 비교한 결과 전혀 두껍지 않고, 배터리도 빨리 소모된다는 느낌이 없으며, 웹브라우징과 그래픽 처리 능력은 아주 뛰어나다는 게 결론입니다. 인텔 쪽 설명은 웹브라우징과 카메라 영상 처리를 위한 별도 회로를 설계해 넣었다는 겁니다. 게다가 안드로이드 앱 처리를 위해 특화된 회로도 만들었다니 진저브레드에서 잘 작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인텔은 메드필드를 사용한 허니콤 태블릿도 만들었고, 시제품을 제조업체들에게 보여주면서 메드필드 사용을 권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동안 인텔은 시스템온칩(System on a Chip; SoC) 기술이 부족해 ARM만큼 소비 전력을 줄이지 못하는 것으로 얘기돼 왔습니다. ARM은 하나의 칩 위에 모든 회로를 다 쑤셔넣어서 시스템 하나를 칩 하나로 만들어내기 때문에 구조가 단순해 소비전력이 적게 듭니다. 반면 인텔은 각각의 기능을 별개의 칩에 넣어 이를 하나의 기판 위에 칩셋 형태로 만들어냈는데 이 개별 칩 사이의 교류에서 전력 소모가 발생했다더군요. 그런데 메드필드에서 SoC 기술을 어느 정도 완성한 모양입니다. 인텔이 드디어 소비전력을 잡았다고 공헌하니까요. 여러 다른 변수가 존재하니 이것만으로 평가하기는 힘들지만 인텔 쪽 주장에 따르면 자신들이 만든 프로토타입 스마트폰이 시장에서 인기있는 다른 ARM 기반 스마트폰들과 비교했을 때 배터리를 더 오래 사용하도록 도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SoC입니다. 얼마나 많은 기능을 하나의 칩 위에서 구현하느냐. 이 문제 때문에 최근 퀄컴은 스냅드래곤 안에 온갖 기능을 추가하기 시작했습니다. SoC 설계 기술에서는 퀄컴이 인텔보다 훨씬 앞서 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삼성전자나 애플, 엔비디아도 비슷한 방식으로 SoC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까지는 메드필드보다 ARM 기반 프로세서가 약간 우세합니다. 그런데 인텔은 여전히 자신감을 보입니다. 메드필드는 지금 32나노미터 공정을 통해 생산하는데 ARM 쪽에서는 40~45나노미터 공정이 가장 최신 공정이기 때문이라는 거죠. 나노미터 단위 크기가 작아질수록 더 최신 공정이고, 원가도 절감되며, 소형화하면서 성능을 높일 수 있기 때문에 인텔의 이런 자신감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물론 ARM 연합군도 낸녀이면 30나노미터대 공정을 도입할 계획입니다. 하지만 인텔은 이미 2013년 22나노미터 공정으로 넘어갈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반도체는 첨단 기술의 경연장이기도 하지만, 상당 부분 막대한 자금 동원력을 바탕으로 한 과감한 투자 경쟁이기도 합니다. 삼성전자가 한 번 메모리반도체의 주도권을 쥐고 난 뒤 경쟁사들이 쉽게 삼성전자를 따라오지 못하는 것도 삼성이 투자를 앞서서 대규모로 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최근 2년은 ARM의 시대였지만, 모릅니다. 제국의 역습은 이미 시작된 건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