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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DIY, 불편한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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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가장 값나가는 물건이 무엇인가요. TV? 냉장고? 제겐 책입니다. 책의 정신적 가치를 돈으로 환산할 수 없어서? 그런 고상한 이유가 아닙니다. 실제로 가장 비싼 게 책입니다. 전세 사는 분들은 다들 느끼시겠지만 이사를 다닐 때면 ‘책 많은 집’은 이삿짐센터에서 웃돈을 요구합니다. 책 때문에 10만~20만 원씩 더 내고 이사를 할 때면 억울한 생각도 듭니다. 게다가 서울시내 아파트의 평당 전셋값이 1000만 원에 가까운데 서가는 침대에 이어 가장 많은 공간을 차지하기도 합니다. 평당 전셋값을 임대료로 환산하면... 책 참 비쌉니다. 그래서 지난 주말 책을 없애기로 결심했습니다. 레코드판과 CD, 사진 앨범은 MP3파일과 디지털카메라가 나오면서 모두 디지털로 변환해 DVD와 하드디스크에 저장해놓았습니다. 책이라고 그러지 못할 이유는 뭘까요. 종이책이 주는 매력이 있기는 하지만 전자책은 쉽게 내용을 ‘검색’해 볼 수 있고, 특정 부분을 복사해 다른 글에 옮겨 적기도 쉽습니다. 종이책은 주지 못하는 장점입니다. 감수성을 포기하고 실리를 택하는 거죠. 그러다보면 앞으로 나오는 전자책은 현재의 여러 문제점도 개선할 거라 생각합니다.

전자책을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쉬웠습니다. 우선 양면 스캐너를 하나 샀습니다. 그리고 제본된 책의 표지를 뜯어내고, 본드로 접착한 부분을 썰어내 책을 낱장으로 분리한 뒤 스캐너에 통과시켰습니다. 제일 먼저 스캐너를 통과한 책은 중국 검색업체 바이두를 다룬 ‘바이두 이야기’라는 책입니다. 약 450쪽의 두꺼운 책이지만 10분 만에 책 한 권이 PDF 문서로 바뀌었습니다. 그 다음엔 PDF 문서작성 소프트웨어인 어도비의 ‘어크로뱃’을 이용해 스캔된 글자를 검색 가능한 전자문서로 바꿨습니다. 어크로뱃에는 '클리어스캔'이라는 광학인식(OCR) 옵션이 있습니다. 비트맵 글자를 벡터 이미지로 바꿔주는 기술인데, 확대/축소에도 글자가 선명해집니다. 읽기도 당연히 편합니다. 다만 스캔은 금세 되지만 클리어스캔 OCR을 하는데 1시간이 넘게 걸리더군요. 450페이지를 일일이 변환하다보니 제 컴퓨터도 고생입니다. 이렇게 주말 동안 세 권의 종이책을 전자책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정도면 한 달에 30∼40권은 거뜬할 것 같습니다. 곧 책꽂이가 부족해 쌓아놓은 싸구려 공간박스는 내다 버릴 계획입니다.

DIY(Do It Yourself) 전자책을 만들기 위해 제가 산 스캐너는 일본 후지쓰에서 만든 ‘스캔스냅’이란 제품입니다. 2년 전 이 제품이 처음 나왔을 때의 가격은 약 3만5000엔이었다는데 지금은 약 4만 엔에 팔리고 있습니다. 수입되면서 국내 판매가는 약 70만 원에 이릅니다. 모든 전자제품은 시간이 지나면 값이 떨어지지만 이 스캐너는 직접 전자책을 만들려는 사람들이 늘면서 거꾸로 값이 올랐습니다. 씁쓸합니다. 전자책이 가장 많이 팔리는 시장인 미국에선 개인이 공들여 스캐너를 사서 전자책을 만들지 않아도 이미 수많은 전자책이 나와 있기 때문에 스캐너 값이 해마다 뛰는 현상 같은 건 생기지 않습니다.

스캐너가 70만 원, 그리고 책을 깨끗하게 잘라 낱장으로 분해하는 재단기가 15만 원 정도입니다. 최근 나오는 전자책 가격은 대개 권 당 6000원 쯤이니 약 140권의 전자책 값을 전자책 만드는 데 필요한 기기를 장만하는데 쓴 셈입니다. 제 서가의 책 가운데 140권을 줄일 수 있고 제가 그 시간과 수고를 아낄 수 있다면 저는 책을 낱장으로 찢어 버리는 대신 마을 도서관 같은 곳에 기증하고 전자책을 사겠습니다. 책을 자르고 OCR 작업을 하고, PDF 파일을 편집하는데 드는 시간을 권 당 1시간으로 잡으면 140시간의 노동력이 들어가는 셈이니까요. 하지만 한국에서 그런 선택은 불가능합니다.

저도 책을 출판해 본 저자입니다. 물론 저는 컴퓨터의 워드프로세서로 책을 씁니다. 요즘 손으로 원고지에 원고를 쓰는 작가는 거의 없습니다. 당연히 출판사는 전자문서 형태로 최종 원고를 받게 됩니다. 출판사는 이 원고를 약간만 손보면 전자책으로 출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전자책은 나오지 않습니다. 출판사에게 변화의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 와중에 제가 만든 것과 같은 ‘사설 전자책’은 끊임없이 늘어납니다. 이런 식의 PDF 파일은 다른 모든 디지털 파일과 마찬가지로 복제가 쉽습니다. 한번 불법 유통되기 시작하면 피해도 걷잡을 수 없을 겁니다. 제가 출판사라면 종이책 시장의 축소를 걱정하면서 시간을 끄는 것보다는 이런 사설 전자책의 확대를 막기 위해 공격적으로 전자책 시장을 빠르게 키울 겁니다. 하지만 현실은 반대입니다.

*오늘(6일)자 동아일보에 실었던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