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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격하는 '진격의 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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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은 일본을 대표하는 상품 중 하나라는 인식이 강하다. 그러나 실은 애니메이션은 최근 일본에서 대표적인 사양산업으로 분류된다. 한 편의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내놓기 위해서는 10만 장이 넘는 셀화를 그려야 한다. 인건비가 높은 일본에서 10만 장의 셀화를 그릴 일러스트레이터를 고용한다면, 이건 작품이 웬만큼 성공하지 않고서야 여간해서는 수지가 안 맞는 일이다. 고되기로 소문난 일러스트레이터의 길을 걷는 이들도 많이 줄었다. 편의점에서 바코드 리더기만 잡고 있어도 시간당 749엔(약 8600원)의 최저임금은 보장된다. 최근 일본 애니메이션의 일러스트레이터 업무는 한국인과 중국인들이 빠르게 일본인을 대체하고 있다. 과거 인기를 끌었던 시리즈물의 리메이크나 후속작을 제외하고는 '성인물이나 미소녀 아니면 본전도 못 건진다'는 인식이 커지며 일본 애니메이션은 한동안 대작 가뭄에 시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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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애니메이터 노동 백서 2009>에 소개 된 애니메이션 업계 전체의 2007년도 평균 연봉은 255만 엔. 민간 기업의 평균 연봉은 437만 엔이었다.

일본동영상협회가 집계한 일본의 애니메이션 제작량 추이를 보여주는 그래프. TV용 애니메이션이 1년 간 몇 분(分, minute)이나 제작되었는가를 집계했다. 2006년 13만6407분(2273시간)으로 정점을 찍은 뒤 4년 연속 줄어들며 2010년에는 9만445분(1507시간)으로 약 34% 감소했다. 2011년 소폭 회복세를 보였지만 전성기 수준과 비교하기에는 아직 큰 차이가 있다.

이런 가운데 한 신인 작가의 데뷔작이 호평을 받으며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의 불씨를 되살렸다. 신인 작가 이사야마 하지메(諫山創)는 일본 메이저 출판사인 고단샤(講談社)의 월간 만화잡지인 소년매거진을 통해 2009년 데뷔작 ‘진격의 거인’의 연재를 시작했다. 그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19세의 나이에 고단샤의 매거진 그랑프리 가작을 받았다. 이를 눈여겨본 소년매거진 편집장의 권유로 연재작을 준비했다. 아무런 실적도 없는 만화가 지망생이 가져온 아마추어 수준의 만화가 지닌 가능성을 메이저 출판사의 간부가 인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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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4월부터 일본 MBS에서 ‘진격의 거인’을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이 방영을 시작했다. 반응은 뜨겁다. 일본과 한국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진격의 거인을 패러디한 사진들이 봇물처럼 쏟아지고, 새 에피소드가 방영되는 날이면 검색어 순위 상위권에서 내려올 기색이 없다. 6월 4일까지 나온 단행본 1~10권의 누적 판매부수는 일본에서 2000만 부를 넘었다.

‘진격의 거인’의 세계관은 절망적이고 어둡다. (작가는 “스스로가 약자라는 열등감에서 이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이라고 털어놨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거인들이 나타나 인간을 잡아먹는다. 높은 벽에 둘러싸인 채, 인간이 살 수 있는 땅은 점차 좁혀져 간다. 제법 비중 있던 조연들은 어느새 거인들에게 무참히 찢어발겨진다. 팔다리를 물어뜯는 거인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린 이 만화는 사실 고어물에 가깝다. -공통의 거대한 적에 대항하는 인간들의 집결과 내부 갈등 구도는 세계정세에서 일본이 처한 상황을 은유하고 있어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는 분석도 있는 듯 하다- 이 만화 자체가 지닌 흡입력은 다소 서툰 원작의 그림체를 극복했으며 애니메이션이라는 플랫폼은 이 결점마저도 덮어냈다. 애니메이션화를 맡은 회사는 위트 스튜디오(WIT STUDIO). 오시이 마모루 감독과 함께 ‘공각기동대’ 등의 레퍼런스급 애니메이션을 배출한 프로덕션 IG의 산하 회사다. ‘진격의 거인’의 히트는 어두운 내용과는 달리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에 희망으로 떠오르고 있다. 내년 만화 원작의 작품으로는 역대 최대규모의 제작비를 투입해 실사영화로도 제작될 예정이라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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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격의 거인’ 만화 단행본은 국내에서 학산문학사가 정식 출판했다. 누적 판매량은 일본의 100분의 1인 20만 부다. 지난달 30일 13화까지 방영된 TV 애니메이션은 웹하드에서 불법 동영상 파일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국내에서는 ‘팔리는 콘텐츠를 만드는 환경’도, ‘정당한 가치를 치르고 문화를 소비하는 인식’도 자리 잡지 못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진격의 거인’이 애니메이션화를 향해 진격할 수 있었던 추진력은 적어도 둘 중 하나의 조건은 갖춘 일본의 콘텐츠 시장이 보여주는 저력일 것이다.

'진격의 거인' 애니메이션 오프닝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