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y Story
by 김상훈
전에 '똑바로 일하라'를 읽고 제가 글을 쓰는 방식을 설명해 보겠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시리즈를 써볼까 했는데, 그러기엔 제가 딱히 글을 잘 쓰는 것도 아니고 남에게 충분한 도움이 될 만큼 체계적인 방법을 가진 것도 아니더군요. 그래서 그냥 간단히 요령을 정리해볼까 합니다. 미리 말씀드렸던대로 글을 쓰는 레서피인 셈이죠. 어떤 재료를 준비하고, 어떤 요리법을 거쳐 마지막으로 어떤 꾸밈을 할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입니다. 1. 재료준비
- 무라카미 하루키는 일본 소설을 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루키의 첫 소설에 대한 일본 문단의 평가는 일종의 멸시에 가까웠죠. 영문 번역체의 이상한 문장으로 지극히 신변잡기적인 얘기나 다룬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루키가 좋아한 소설은 미국 소설이었습니다. 그것도 하드 보일드 소설.
- 신문에 기사를 쓰든, 블로그에 포스트를 올리든 저도 그렇게 해보려고 노력합니다. 국내 매체의 글이 훌륭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많은 경우 원문을 제대로 읽지 않거나 소스를 직접 접촉하지 않은 채 작성된 글이 범람하는 게 한국 언론의 현실입니다. 논문이 언급되면 해당 논문을 직접 읽고, 소스가 접촉 가능한 사람이라면 직접 접촉해 확인하려고 합니다. 파스타를 만들 때 토마토 페이스트를 쓰기보다 신선한 토마토를 직접 사용하는 원칙과 비슷하죠.
- 또 하나의 이유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낯선 형식은 새롭게 받아들여집니다. 하루키의 문장은 확실히 영어 번역체의 일본어였던 모양이지만, 일본 독자들은 그 영어 번역체의 문장에 열광했습니다. 쿨해 보였으니까요. 그리고 그걸 "일본어가 망가지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타당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이런 식으로 사용되는 일본어가 일본어의 사용 범위를 넓혀준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 무엇이 글인가. 메신저, 카톡방, 인스타그램 설명, 댓글놀이 등등. 분석되고 의미가 있어야 할 것들.
2. 손님
- 누가 우리가 쓴 글을 읽을까요? 그때그때 다릅니다. 읽는 사람을 먼저 생각해야죠. 불특정 다수? 환상입니다. 조정래의 '정글만리'가 여고생에게 무슨 재미를 주겠습니까.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을 읽는 기업 중역들은 얼마나 되겠어요. 심지어 세탁기 매뉴얼도 아내가 읽지 않더군요. 우리 집에서 저만 그 매뉴얼을 읽습니다. 세탁기는 아내가 대부분 쓰는데도! "남편에게 물어보면 되지!"라잖아요.
- 읽는 사람에 따라 쓸 수 있는 어휘의 제약이 달라지고, 쓸 수 있는 길이의 제약이 달라집니다. 우리가 어투를 쉽게 바꿀 수 있을까요? 천만에요. 블랙 유머를 잘 구사하는 사람은 계속 시니컬한 글을 쓰게 마련이고, 감동적이고 따뜻한 글을 쓰는 사람은 세탁기 매뉴얼도 감동적으로 쓰려고 들게 마련입니다. 문체는 우리의 성격과 같은 거라서 쉽게 안 바뀝니다. 대신 제약이 달라지죠. 그러니 제약을 생각해야 합니다. 음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손님이 알러지가 있으면 못 쓰는 재료가 생깁니다. 계절이 변하면 신선한 재료에 제약이 생깁니다. 단체 손님이 몰아닥쳐서 한시간 내로 식사를 마치고 돌아가겠다고 하면 조리 시간과 전체 코스 서빙 시간의 제약이 극단에 이릅니다.
3. 칼질
- 공정함은 환상입니다. 세상에 공정한 글이란 건 없습니다. 저는 오히려 제 입장을 공개합니다. 이것이 좋고, 저것이 나쁘고. 위험한 방식입니다. 항의가 넘치고 격론이 벌어지죠. 하지만 항의도 없고, 논쟁도 없는 공자말씀을 쓰려면 그냥 읽히지 않고 어딘가에 쳐박혀 있을 '학위를 위한 학위논문'이나 쓰고 있는 게 낫습니다. 위험을 짊어지고, 자신의 견해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많은 논리를 준비하는 게 훨씬 낫죠. 기사라면 조금 다를 수 있지만, 칼럼이나 블로그를 쓸 때 택하는 원칙입니다. 오이는 채를 썰면 상쾌한 맛이 나고, 둥글고 얇게 썰면 오이지를 담글 수 있으며, 썰지 않고 속을 갈라 양념을 박아넣으면 오이소박이가 됩니다. 어떤 방향으로 칼을 썰어들어가느냐가 이후의 맛을 결정합니다. 대충 토막내는 게 늘 최악입니다.
4. 양념
- 좋은 글은 잘 버린 글입니다. 늘 모든 게 아깝습니다. 길게 써 놓은 챕터를 지워야 겠다 생각될 때, 한 단락을 날려버릴 때, 애써 생각한 멋진 표현이 문맥에서 어긋날 때... 과감히 지우면 다른 모든 부분이 살아납니다. 식탁 위에 각종 허브와 조미료를 늘어놓고선 이 모든 걸 다 집어넣으면 어떤 맛이 날까요. 바질만 살짝 뿌린 피자에는 독특한 향기가 남지만, 온갖 허브를 섞어 뿌려놓은 음식에는 자극만 남게 마련이죠.
- 문장을 줄여야 합니다. 짧게. 마침표를 많이 쓰는 문장이 좋은 문장입니다. 주어와 서술어 빼고 나머지는 다 군더더기입니다. 수동태와 자기 형용이 섞여 있으면 괴롭습니다. 말을 짧게.
ex.)
- 제품을 설명하는 글을 쓰는 일이 많을 겁니다. 절대 개념을 들먹이지 마세요. 설명을 자세하고 쉽게 했다고 생각해봐야 듣는 사람은 무슨 소리인지 모릅니다. 일반적인 사례를 들고, 다른 사물에 은유하세요.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저어 오오"라고 하면 상대가 감동적으로 알아들을 텐데, "나는 상대방을 생각하는 배려심이 많은 사람이고 당신에게 그 배려를 더 쓸 수 있으니 나에게도 신경을 쓰고 애정을 기울여 주시오"라고 해봐야...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예를 들어 페이스북을 시골에 계신 부모님, 조부모님께 설명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페이스북은 소셜네트워크이고,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동영상도 보는 공간인데..."라고 하면 소셜네트워크, 인터넷, 스마트폰, 동영상을 봐? 질문이 꼬리를 물다가 개념을 잊게 됩니다. 그냥 "페이스북이란 걸 핸드폰에 깔면 제가 올리는 어머니 손자 사진을 볼 수 있으세요. 가족신문을 핸드폰으로 보는 거에요"라고 얘기하면 되잖아요?
- 지나치게 다양한 허브가 모여있는 음식보다 더 괴로운 건 화학 조미료 맛이 넘치는 음식입니다. 글쓰기에서는 식상하고 진부한 표현들이 그런 조미료에 해당할 겁니다. 하루치 경제신문 몇 페이지를 넘기며 대충 찾아본 표현들이 이런 겁니다. "OO사장의 광폭행보가 눈에 띈다", "OOO의 승부사기질은 여전했다", "OO기업은 세계 굴지의 회사로 우뚝 섰다"... 쇠고기는 보이지 않고 미원맛만 잔뜩 나는 쇠고깃국 같은 느낌입니다.
5. 구이
- 고기는 강한 불에 빠르게 구워야 부드러우면서도 맛있게 마련입니다. 기약이 없는 글을 쓴다면 모르겠지만, 마감이 있는 글은 고기 굽기와 마찬가지입니다. 부산하게 불을 펴고 고기를 올려놓고 호들갑을 떨어봐야 고기는 익지 않습니다. 불이 세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한 번에 구워야 빨리 익고 맛있게 익습니다. 마감이 있는 글쓰기는 복싱 연습과도 비슷합니다. 저는 존재하지 않는 상대방을 눈 앞에 두고 섀도우복싱을 하는 것처럼, 완성된 글을 상상하고 얼개를 짭니다. 잠깐 눈을 감고, 첫 문장을 생각한 뒤에 쓰기 시작합니다. 시작이 늦은 건 중요하지 않지만, 마감이 늦는 건 중요합니다. 처음에 섀도우복싱을 한다면 키보드 앞에 앉았을 때의 속도는 훨씬 빨라지게 마련입니다.
6. 접시에 담기
- 메인 요리가 파스타인데 그 위에 올리는 해산물이 파스타보다 많은 경우가 있나요? 메인 요리가 스테이크인데 옆에 올리는 매쉬드포테이토가 스테이크만큼 크다면 어색하게 마련입니다. 균형과 정비례는 그저 환상일 뿐입니다. 현실에 존재하는 많은 것들은 불균형하기 때문에 아름답고, 생동감이 넘칩니다. 무엇을 강조하는지도 눈에 확 띄게 마련이고요. 글쓰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계열적으로 배치해놓은 글이 있다면 일부러 뒤에 있는 문장을 앞으로 끄집어낸다거나, 중간에 놓여있던 눈길을 끄는 대화 한 마디를 맨 앞으로 내세운다면 그런 게 오히려 신선해 보이게 마련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안정적인 건 죽어있는 무생물이니까요. 살아있는 생물은 늘 위태로운 불안정 속에서 비틀대며 살아가게 마련입니다.
7. 마지막 조미료
- 이제 요리를 먹으면 되겠죠. 그냥 먹어도 맛있는 요리라면 더할 나위없이 좋겠지만 마지막 조미료를 한 번 더 칠 필요가 있습니다. 화학조미료도, 설탕도, 소금도 아닌 '이야기'입니다. 재료를 구하기 위해 새벽장에 나간 이야기, 면을 쫄깃하게 삶기 위해 소금을 넣어 물의 끓는 점을 올린 노하우... 맛깔스런 음식에 대한 설명은 식욕을 북돋아줍니다. 제게 이런 조미료는 다양한 글쓰기 채널입니다. 정성껏 쓴 신문기사를 소개하기 위해 블로그에 뒷얘기를 올리기도 하고, 때로는 신문기사보다 더 정성껏 쓴 블로그 포스트를 알리기 위해 트위터에 짧은 설명을 담은 링크를 적어올립니다. 다양한 채널이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요리의 맛을 북돋는 역할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