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린 눈은 얼어붙었지만, 마음은 따뜻하게 녹았습니다.
by 김상훈
아침에 폭설이 내렸습니다. 저와 아내는 구두를 신고 나가다가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다시 집으로 돌아와 운동화로 신발을 갈아 신고 다시 나갔고, 주차장의 차 위에는 눈이 소복이 쌓인 채 차들이 그대로 주차돼 있었습니다. 눈은 아무리 쓸어도 금세 다시 쌓였고, 교통은 보나마나 지옥일 것 같았습니다. 버스도 제대로 못 다닌다고 라디오에서 경고방송이 나오고, 지하철은 아수라장일 듯 싶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습니다. 평소 제 출근길 지하철 2호선은 늘 북새통입니다. 먼저 타려는 사람, 환승역에서 갈아타려는 사람, 그리고 하차하려는 승객들이 다 내리기 전 먼저 들어오려는 사람들이 뒤엉켜 아수라장을 만듭니다. 그 틈바구니를 뚫고 무가지를 주워가겠다며 길을 비키라는 듯 막무가내로 돌진하는 몇몇 폐지 수거에 목숨거신 분들도 계시고, 안방에서 전화하듯 큰 소리로 통화하시는 분들도 꼭 계시게 마련입니다.
오늘은 조금 달랐습니다. 사람은 평소에도 많은 지하철인데, 오늘은 더 많았습니다. 꽉꽉 들어찬 승객들을 더욱 밀쳐가며 타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지하철이 승강장에 도착하면서 문이 열리려 할 때 저는 "어휴, 쟤는 왜 이 칸에 꼭 오르려는거야"라는 짜증섞인 표정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도착한 지하철 차창에는 하얗게 김이 서려 있었고, 도착한 차량의 문이 열리자 도저히 한 사람 탈 공간도 나오지 않을 것 같았던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그런데 그때였습니다. 스르르륵 하더니 서너명이 탈 공간이 생기는 겁니다. 예. 승객 분들이 딱 3분의1걸음씩 뒤로 물러서준 결과였습니다. 다들 힘들고, 다들 고생하고 있으니, 어서 여기 타세요. 다 알아요. 내가 그렇듯이 당신도 이미 지각이라는 걸. 그런 마음이 느껴졌습니다.
오늘은 조금 달랐습니다. 누구도 큰 소리를 내지 않았습니다. 불가능하기도 했겠지만, 당연히 무가지를 주워가는 분들도 안 계셨습니다. 환승역에선 일단 모두들 우루루 내렸다가 다시 탔습니다. 평소보다 질서정연하고, 평소보다 붐비면서도 이상하게도, 평소보다 더욱 쾌적한 출근길이었습니다.
조금 전 NHN에서 보도자료를 냈습니다. 미투데이 덕에 실시간 정보를 주고받은 사람들이 폭설 때 조금 더 편해졌다는 얘기입니다. 썩 중요한 기사 내용 같지는 않아서 무심코 넘기려 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구절이 눈에 띄었습니다. "NHN김상헌 대표는 오늘은 지각처리없도록 조치했으니 안심들 하시고 조심조심 출근하십시오 라는 글을 포스팅 함으로써, NHN 직원들에게 안전한 출근길이 되도록 권하는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는 구절이었습니다. 작은 배려입니다. CEO가 사원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작은 배려는 이들이 모두 지각을 한 뒤에 지각조치를 면해주는 게 아닙니다. 걱정하면서 종종걸음을 걸을 사원들에게 편안한 마음을 갖도록 미리 알려주는 것,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마 여러분의 직장에서도 많은 CEO들께서, 많은 경영지원부서의 담당 실무자들께서, 먼저 폭설을 뚫고 직장에 나가서 자리에 앉은 뒤에 비슷한 문자메시지를 보내셨을 겁니다. 조금 늦어도 된다, 이건 비상상황이니 이해한다, 여긴 내가 먼저 나와서 지키고 있을테니 아무 걱정말고 다치지 말고 조심해서 오시라...
지하철의 이름모를 서울 시민들과, 조금 늦게 도착한 동료들을 위해 먼저 도착해 부담을 덜어준 우리의 직장동료들을 위해, 그리고 이 작은 배려들이 따스하게 만든 폭설 몰아친 오늘 하루를 위해, 조용히 감사의 박수를 쳐 봅니다. 모두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