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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보다 아이폰이 더 무서웠던 SK텔레콤과 삼성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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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새 22만4000원을 날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돈을 잃어버렸다는 얘긴 아니지만, 적어도 그런 기분을 느낀 사람들입니다. 지난달 말 판매를 시작했던 삼성전자의 최신 휴대전화 ‘옴니아2’를 산 1만8000여 명의 얘기입니다. 'T옴니아2'라고 불리는 이 휴대전화는 삼성전자의 최신 스마트폰입니다. 곧 KT와 LG텔레콤에서도 나올 예정이지만, 일단은 SK텔레콤에서만 팔리고 있습니다. 컴퓨터처럼 인터넷과 문서작성도 할 수 있고, TV 수신과 각종 소프트웨어 설치도 가능한데다 최고급 CPU에 화질 좋기로 유명한 아몰레드(AMOLED) 디스플레이까지 갖춰서 가격이 96만8000원으로 비쌉니다. 하지만 매월 기본요금을 비싸게 내면 SK텔레콤으로부터 각종 보조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40~50만 원 정도면 살 수 있었습니다. 어차피 스마트폰을 사는 이유가 어디서든 무선인터넷을 하고자 하는 생각도 하나의 이유였던지라 소비자들은 기꺼이 지갑을 열었습니다. 이 기계는 그 정도 가치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상황은 KT가 애플의 베스트셀러 스마트폰 ‘아이폰’을 들여오면서 달라졌습니다. 아이폰도 T옴니아2처럼 값은 90만 원 대에 이르지만 KT의 보조금을 받으면 20~30만 원이면 살 수 있었으니까요. 그러자 SK텔레콤은 '맞불'을 놓습니다. 한 대 당 22만8000 원씩 지급하던 옴니아2에 대한 보조금을 40만8000원으로 확 늘린 것이죠. 삼성전자도 가세했습니다. 옴니아2의 출고 가격을 4만4000원씩 낮췄습니다. 소비자들은 며칠만 참았어도 22만 원 이상 아낄 수 있었던 터라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너무 빨리, 너무 많이 값을 내린 겁니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제품 가격이란 제품의 원가에 이윤을 더한 단순한 숫자가 아닙니다. 소비자가 기꺼이 돈을 지불하겠다는 마음, 경쟁자와의 적절한 경쟁, 제품의 원가 등이 시시각각 변하는 시장 환경에 맞물려 가격을 결정합니다. 삼성전자도, SK텔레콤도 이런 걸 모를 리 없는 훌륭한 기업들입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1만8000명의 소비자가 자신들의 제품에 대해 갖고있는 '마음'은 그다지 중요한 고려 요소가 아니었습니다. 제품을 가장 먼저 구입했던 충성도 높은 소비자의 마음을 아프게 하면서도 바라봐야만 했던 것, 그건 경쟁사인 KT와 애플의 움직임이었습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애플도 2007년 ‘아이폰’ 첫 모델을 내놓으면서 비슷한 문제를 겪었습니다. 애플은 7월에 첫 아이폰을 599달러(약 68만 원)에 선보였는데, 두 달 뒤인 9월에 똑같은 제품의 가격을 399달러로 낮췄습니다. 그러자 두 달 전 아이폰을 샀던 소비자들이 분노했죠. 자신이 산 제품 가치가 떨어졌다는 겁니다. 너무 빨리, 너무 많이 내린 게 문제였습니다. 대응은 좀 달랐습니다. CEO 스티브 잡스가 직접 소비자들에게 사과했고, 애플 제품을 살 때 현금처럼 쓸 수 있는 100달러 쿠폰을 이들 모두에게 나눠줬습니다. 이후 애플은 가격전략을 신중하게 가져갔습니다. 신제품을 발표한 뒤에야 기존 제품 가격을 낮춘 것이죠.

 

SK텔레콤에선 비슷한 일을 할 계획이 없습니다. 회사 측의 공식 입장을 묻자 “경쟁사의 보조금 규모가 너무 커서 우리도 급히 맞대응할 수밖에 없었다”며 “안타깝지만 미리 제품을 구입한 고객에 대한 환불 등은 고려하지 않고 있다”더군요. 저는 SK텔레콤의 이런 대응이 부도덕하다거나 불법적이라 생각하진 않습니다. 자신의 제품에 가격을 매기는 건 자본주의 기업의 고유 권한입니다. 그리고 이 권한을 잘못 휘두르면 기업은 망해버리기도 합니다. 이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정책이 무리했다는 사실을요. 그럼에도 이들이 가격정책에 무리수를 뒀던 이유는 시장을 지키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가격결정이 중요한 이유는 이윤을 보장해 주는 게 가격이기 때문입니다. 가격이 원가보다 높으면 기업은 이익을 내고, 그렇지 않으면 손해를 봅니다. 그리고 가격을 원가보다 높게 설정할 수 있는 능력은 '독점'에서 나옵니다. 자본주의 국가의 상법은 독점을 규제하지 않습니다. 전에 NHN의 경우에서도 잠깐 얘기했지만, 자본주의 국가에서 규제하는 건 한 분야의 독점적 지위를 다른 분야에서 휘둘러 건전한 경쟁을 저해하는 경우 뿐입니다. 사실 독점이 없다면 모든 비누의 가격은 똑같아야 하고, 모든 휴대전화의 가격도 똑같아야 합니다. 하지만 비누는 향기가 다르고, 품질이 다르며, 비누를 만드는 기업의 이미지가 다릅니다. 비누가 이럴진대 휴대전화처럼 복잡한 기계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제품의 내구성이 다르고, 소프트웨어를 디자인하는 철학이 다르며, 디자인이 다르고, 사용자 환경(UI)이 다르고, AS망이 다르고.... 무지무지 다른 게 많습니다. 기업들은 이런 여러 요소를 다른 기업과 차별화해 자신들의 제품에 독점적인 능력을 주고자 합니다. 경쟁사 제품보다 더 많은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죠.

 

이런 독점적 능력을 무엇이 가져다줬을까요? SK텔레콤과 삼성전자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시장지배력'이 바로 그런 독점적 능력의 근원입니다. 이들은 각각 국내 휴대전화 가입자와 휴대전화 단말기 시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합니다. SK텔레콤이 50%대 초반, 삼성전자가 56% 정도를 차지하죠. 게다가 이통시장은 국내 3사가 나눠가졌고, 휴대전화 단말기 시장은 삼성전자와 LG전자, 팬택 3사가 95% 이상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높은 시장점유율이 바로 국내 업체들에게 가격을 맘대로 정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결정적인 경쟁력입니다.

 

하지만 아이폰이 인기를 끌게 된다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아이폰은 시장지배력으로 독점적 능력을 갖춘 게 아니라, 제품의 품질과 앱스토어라는 서비스로 독점적 능력을 갖췄기 때문이죠. 품질을 앞세운 제품이 시장점유율을 잠식해 올 경우, 삼성전자와 SK텔레콤은 비슷한 품질을 만들어낸다 가정하더라도 손해입니다. 전보다 애플과 KT가 차지하는 만큼의 시장점유율이 줄어들고, 이는 곧 가격을 결정할 수 있는 힘도 그만큼 줄어든다는 의미이기 때문이죠. 따라서 이런 무리수를 둘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이들이 계속 경쟁력을 갖고 국내 시장을 좌우할 수 있는 방법은 단 두가지입니다. 첫째는 아이폰보다 더 품질과 서비스가 좋은 제품을 만들어 소비자들이 아이폰을 선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고, 둘째는 한국 시장에서 아이폰이 의미있는 시장점유율을 갖지 못하도록 초기에 기를 죽여서 '틈새'에 가둬놓는 것입니다. 뭐가 더 '신속하게' 할 수 있는 일일까요? 답은 뻔합니다.

 

미국에선 AT&T-애플의 공세에 밀려 수세적 위치에 놓여있던 버라이즌-모토로라가 '드로이드'라는 새 스마트폰으로 바람몰이에 나섰습니다. 버라이즌은 3G 통신망이 AT&T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자랑을 하면서 품질 경쟁을 벌입니다. 정공을 펼치는 셈이지요. 겉보기엔 멋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이렇게 정공으로 경쟁하는 동안 AT&T는 계속 아이폰 덕을 봤고, 애플은 스마트폰 시장을 휩쓸어 버렸습니다. 버라이즌은 뜨끔했고, 모토로라는 조금 더 심해서 휴대전화 사업부문 매각까지 고려해야 했습니다. 정공으로 제대로 맞붙기까지 2년이 걸렸습니다. 엄청난 손해의 시간이었죠. 이런 걸 다 알고 있을 SK텔레콤과 삼성전자입니다. 그러니, 이들의 결정에 대해 저같은 제3자가 뭐라 할 수 없다는 것이죠.

 

하지만, 하지만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경쟁자보다 소비자를 먼저 생각하는 기업'이었다면 어땠을까요? 제가 왜 그런 무리한 가격전략을 세웠을까 고민하는 대신, 이들이 왜 이렇게 무리하면서까지 소비자를 생각하고 있을까 감탄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소비자인 여러분께서는 어떤 삼성전자, 어떤 SK텔레콤이 더 좋으십니까? 결국 문제는 참 단순한 겁니다. 다만 행하는 게 어려운 것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