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윈 랜드, 스티브 잡스. 다른 기업을 꿈꾼 사람들.

이 슬라이드가 낯익으실 겁니다. 스티브 잡스가 지난해 아이패드와 아이폰4를 발표했던 때에 이어 아이패드2 발표에서 벌써 세번째 들고 나온 슬라이드죠. “애플은 늘 기술과 인문학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이 말은 이제 마치 애플이란 기업의 철학처럼 들립니다. 그리고 잡스 자신의 철학이기도 할 겁니다. 하지만 그가 처음 떠올린 생각은 아닙니다. 이 아이디어를 잡스에게 준 사람은 에드윈 랜드입니다. 낯선 이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1991년에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랜드는 잡스의 우상이었습니다.
애플컴퓨터를 창업해서 미국에서 가장 젊은 백만장자로 명성이 높아진 스티브 잡스는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 중요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넓혀갑니다. 이 만남에는 개인적인 목적도 포함돼 있었습니다. 유명해진 김에 평소 꼭 만나보고 싶었던 사람과 만나는데 자신의 명성을 이용한 것이죠. 존경의 대상도 그 보고싶은 사람의 범주에 들어있었습니다. 그리고 잡스에게 존경의 대상이 바로 에드윈 랜드였습니다. 폴라로이드의 공동창업자, 60초 내로 인화되는 필름을 만들어 모든 사람에게 암실을 선물해 줬던 바로 그 사람.

랜드와 잡스는 1985년에 만나 긴 대화를 나눕니다. 당시 애플의 CEO였던 존 스컬리도 그 자리에 동석했고, 잡스와 랜드가 나눴던 대화를 기록으로 남깁니다. 스컬리에 따르면 랜드는 잡스에게 자신의 사업에 대해 설명하면서 “나는 늘 우리의 일이 예술과 과학의 교차로에 서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잡스는 그 표현에 굉장히 깊은 감명을 받았죠. 랜드는 또 잡스와 자신의 제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폴라로이드는 제가 발명한 게 아닙니다. 폴라로이드는 그저 그곳에 있었고, 나는 그걸 남보다 먼저 찾아내서 사람들 앞에 제시했던 거죠”라고 말합니다. 잡스도 이에 맞장구를 칩니다. “매킨토시도 제게 그랬습니다. 시장조사 같은 건 하지 않았어요. 그냥 매킨토시가 그곳에 존재했는데 누구도 보지 못했고, 제가 처음 봐서 그걸 끄집어내 사람들 앞에 ‘어떻게 생각해요?’라며 제시했던 거죠.” 두 사람은 46년의 나이 차이가 있었지만 이런 공통점 덕분에 금세 친해지게 됩니다.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는 또 다른 공통점도 있었습니다. 사업가라기보다는 예술가에 가까운 과학자였던 랜드는 폴라로이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예술과 과학의 교차로’ 같은 뜬구름잡는 얘기만 하다가 자신이 세운 폴라로이드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잡스와의 만남이 있은 후 얼마 뒤였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잡스도 자신이 세운 회사 애플에서 쫓겨납니다. 매킨토시가 혁신적인 컴퓨터였는지는 몰라도 잘 팔리는 컴퓨터는 아니었으니까요. 두 사람은 비즈니스맨과 엔지니어 사이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비즈니스맨도 아니었고, 엔지니어도 아니었으니까요. 잡스와 랜드는 남들과 다르게 생각하는 혁신가였죠. 하지만 세상은 그들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소수의 ‘컬트 팬’들은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습니다.

25년이 지난 2010년 1월, 잡스는 아이패드 발표의 끝머리에 이제는 유명해진 이 교차로 사진을 제시합니다. 이제 그가 애플은 인문학과 기술의 교차로에 서 있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모두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합니다. 여기까지 25년이 걸렸습니다.

어제, 스티브 잡스가 무대로 걸어나올 때, 여바부에나센터에 모여 있던 관객들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일제히 일어나 기립박수를 보냈습니다. 대단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잡스가 걸어나왔기 때문에 보냈던 환호였죠. 세상에 ‘건강히 살아있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환호를 받는 CEO가 또 존재할까요? 제 짧은 지식 내에서는 스티브 잡스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잡스가 성격이 불과 같고, 때로 독단적이라고 평가받긴 하지만 애플 직원들의 CEO에 대한 존경과 애정은 다른 어떤 기업에도 뒤지지 않는 것으로 조사됩니다. 나이를 먹고 세상을 다르게 보기 시작한 잡스는 참 존재하기 힘들어 보이는 ‘사랑받는 대기업 사장’이 돼 있습니다. 이게 언제부터였을까요? 1997년이 시작 아니었을까요? ‘6개월을 버티기 힘들다’며 기업 분석가들이 사실상 ‘사망 선고’를 내렸던 그 시절. 애플에 잡스가 복귀했던 바로 그 시절.

1년이 지나고 1998년, 잡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애플은 다시 궤도에 올라섰습니다. 그건 훌륭한 사람들이 함께 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훌륭한 사람들을 유지하는 게 우리가 가장 노력하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작년 7월까지는 우리는 이런 일에 실패했습니다. 33%의 사람들이 매년 바뀌었습니다. 굉장히 많은 숫자입니다. 훌륭한 사람들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도대체 애플이 어떻게 성공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지금 저는 여러분께 다른 말씀을 드립니다. 이 숫자가 변했습니다. 애플의 턴오버는 4월 현재 15%입니다. 이는 실리콘밸리 평균보다도 낮은 숫자입니다. 인터넷 붐의 시대에 이건 정말 놀라운 비율입니다.”

이 당시 뽑았던 조너던 아이브와 스콧 포스톨, 필립 실러, 팀 쿡, 피터 오펜하이머 등은 지금도 최고경영진에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그동안 잡스는 한 번의 췌장암 수술과 한 번의 간이식 수술을 받았고 애플은 ‘보나마나 실패할 것’이라는 비아냥을 세 차례(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 대규모로 들었습니다. 결과는 지금 우리 모두가 아는 그대로입니다.

애플은 21세기의 비틀즈입니다. 내놓는 앨범마다 엄청나게 히트시키며 승승장구하던 비틀즈도 어느 순간에는 멤버 사이에 불화가 생기고, 누군가 밴드를 떠나며, 누군가는 총에 맞아 살해됩니다.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는 법이죠. 하지만 우리나 우리의 아이들은 우리의 부모님들처럼 열정적으로 비틀즈를 듣지는 않지만, 비틀즈의 음악 한 두곡 정도는 아이튠즈 라이브러리에 갖고 있습니다.(사실 저는 거의 모든 앨범을 아이튠즈 라이브러리에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누군가는 비틀즈로부터 영감을 얻어 또 다른 비틀즈가 됩니다. 그것은 커트 코베인일 수도 있고, 크리스 마틴일 수도 있습니다. 애플도 그렇게 될 겁니다. 스티브 잡스는 언젠가 세상을 떠날테고, 그가 자랑하던 애플의 환상적인 ‘A-team’도 언젠가 뿔뿔이 흩어지겠죠.

하지만 그들이 만들어낸 ‘다른 기업’, 인문학과 기술의 갈림길 사이에서 고민하는 기업의 흔적은 누군가의 라이브러리에 각인처럼 남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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