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기원, 거울 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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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안데르탈인에 대한 생각 끝에, 한국을 생각합니다. 한국도 조상에 대한 관심이 큰 나라입니다. ‘자랑스런’ 민족의 자손임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겠지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상합니다. 자랑스러운 조상은 무엇이고 그렇지 않은 조상은 무엇일까요? 학교에서는 한민족의 조상이 동북아시아 또는 시베리아에서 왔다고 배웁니다. 동북쪽의 대륙에서 우리가 유래했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큰 거부감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의 조상이 실은 동남아시아에서 왔다고 하면 어떤 기분이 들까요? 거부감이 들까요? 그렇다면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 거부감이 혹시 지금 한국인들이 동남아시아 사람들에게 갖고 있는 편견에서 나온 것은 아닐지요? 그렇다면, 20세기 초 유럽인들이 네안데르탈인을 보며 갖던 편견과 무엇이 다를까요?

고고인류학자의 책이지만, 모든 좋은 책이 그렇듯 이 책 또한 오늘을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훌륭한 역사학자의 책이 수백년 전을 다뤄도 오늘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경영이나 정치, 사회학이나 컴퓨터과학 분야의 얘기를 보고 있으면 지금 여기를 이야기하지 않는 모든 일들은 하찮고 쓰잘데 없이 보이게 마련입니다. 돈을 벌고, 권력을 다루고, 세상을 논하며, 기술 발전을 칭송하는 이 급박한 세상에서 한가하게 무슨 옛날 얘기냐는 소리도 충분히 이해는 갑니다.

하지만 정작 오늘을 날카롭게 꼬집는 책은 저런 책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을 직접 다루지 않는 책이 오늘을 제대로 지적하죠. 천체물리학자의 책이 우리가 이 넓은 우주 속에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 깨닫게 해 객관적인 중심을 잡아주는 것처럼, 이 책도 화석을 들여다 보면서 우리의 시작을 드러냅니다. 우리의 편견이 우리의 조상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막아 왔던 역사부터, 우리 속의 돌연변이가 결국 우리의 다양성을 만들어 낸 뛰어난 진화 체계였다는 사실까지.

그래서 책을 읽다보면 어딘가 거울 앞에 벌거벗고 선 느낌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그 속의 내 모습은 멋지다고 하기엔 볼품없고, 부끄럽다고 하기엔 연민을 느끼게 되는 모습입니다. 그 모든 것이 바로 인간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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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스팬스, 태양계를 배경으로 한 대항해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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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드라마를 보지 않았더라면 소설을 읽지 않았을 테지만, 소설을 읽지 않았더라면 드라마에서 멈췄더라면 크게 후회했을 것이다.

소설의 줄거리는 사실 굉장히 간단하게 압축할 수 있다. 마치 스타워즈 시리즈와 비슷하게. 스타워즈 시리즈라는 것도 생각해 보면 단순한 구성 아닌가. 버림받은 고아 소년이 어느날 자신의 출생에 얽힌 비밀을 알게 되고 거대한 음모 앞에서 스스로의 힘을 각성하게 되며 결국 우주의 균형을 가져오게 되는 이야기 말이다. 하지만 스타워즈 시리즈를 이끌어가는 것은 줄거리가 아닌 디테일이다. 왜 고아 소년은 컴플렉스에 시달리는지, 왜 우주의 균형을 가져올 거대한 운명의 아이는 끊임없이 의심받는지, 왜 이 운명은 지긋지긋하게도 대를 이어 반복되는지, 과연 주인공은 운명을 바꾸는 것인지 운명에 굴복하는 것인지… 인물과 상황, 대의명분과 위선 등이 복잡함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또 하나. 녹슨 전투기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영웅들은 죽어야 영웅이 되고, 영웅들의 싸움은 멋지고 단순하지 않고 비루하고 힘들며 괴롭다. 당장 스카이워커 부자부터 일단 오른팔을 잘린 뒤에야 제대로 스토리를 이어가지 않나.

익스팬스 또한 마찬가지다. 알 수 없는 무언가 거대한 괴물이 등장했고, 이 괴물을 둘러싼 전 태양계적인 음모가 펼쳐진다. 주인공은 이 음모를 어떻게든 해결해 보고자 노력하고. 그게 줄거리의 전부다. 하지만 역시 중요한 것은 인물과 상황, 그리고 살고자 애쓰는 사람들의 리얼리티다.

무엇보다 눈길을 사로잡았던 것은 태양계를 벗어나지 않는 공간적 제약이다. 마치 대양을 건너기 위해 망망대해라는 극단적이고 무자비한 공간에 맞서던 대항해시대의 선원들처럼, 익스팬스 속의 태양계 시대 우주선 승무원들은 무자비한 우주 속에서 조그만 쇳덩이인 우주선에 온 몸을 맡긴다.  중력가속도와 싸우고, 모자란 산소와 사투를 벌이는 괴로운 선원들의 묘사를 보고 있자면 폭풍 앞에서 밧줄을 감고, 키에 매달려 사투를 벌이던 범선 선원들의 모습이 덧씌워 그려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익스팬스 속의 인간들은 ‘워프’ 따위 없이, 정직하게 행성간 이동을 한다. 며칠이고 몇달이고 걸려 가면서, 항구와 항구를 이동하면서, 가족 따위는 잊어버린 채 선원들과 가족을 만들어 가는 삶은 대항해시대와 다를 게 없다.

한편으로는 태양계시대의 갈등이 등장한다. 마치 제국주의 식민지처럼, 여전히 인간들은 태양계 시대에서도 자원 탐사 및 채굴에 목을 맨다. 이들은 소행성대(Belt)에서 얼음을 얻어 물을 만들고, 공기를 만들며, 이를 바탕으로 지구 밖 외행성대의 험한 환경을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환경으로 바꿔 나간다. 이 시대가 이어지면서 지구에서 바다와 비, 눈 등을 느끼며 자라온 사람들과 달리 벨트에서 낮은 중력을 당연히 받아들이며 자라온 사람들은 골격부터 달라졌다. 키가 크고 뼈가 약하며 허파까지 약한 벨트인들은, 지구 수준의 중력에서는 제대로 걷고 숨쉬기조차 힘들 정도다.

이런 차이 때문에 온갖 갈등이 생긴다. 화성 기지를 만들어 낸 선도적인 과학자들은 이미 과학기술, 특히 군사기술에서 지구를 앞서게 됐고, 나아가 지구와 반목하기 시작한다. 소행성대는 지구와 화성 양쪽에서 착취당한다. 주인공인 지구인 부잣집 딸은 순수한 이상에서 지구와 화성 모두에 반대하고, 경찰 노릇밖에 할 줄 아는 게 없는 또 다른 주인공인 형사는 어느날 이 부잣집 따님 사건에 말려 들면서 스스로도 이해 못 할 감정에 빠져 든다. 또 한 명의 주인공은 지구 출신이지만 해군(물론 우주선 선원을 뜻함)에서 불명예 제대한 얼음채취선 일등항해사다. 이들을 둘러싼 소설 속 현실은 계속해서 최악으로 치닫는다. 하지만 인물들은 그 최악 속에서 어떻게든 더 인간적으로 행동하고자 애쓴다. 그들은 사람으로서 살고자 애쓴다. 그 리얼리티가 이 SF를 꼭 읽어야 하는 소설의 반열에 올린다.

와일드

셰릴 스트레이드는 약쟁이였다.

나는 욕실로 가서 얼굴을 씻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숨을 들썩거리며 흐느꼈다. 그러다가 식당의 아침 장사 시간에 맞춰 일을 하러 가야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이건 내가 아니야. 이건 내가 사는 방식이 아니야. 그만 둬. 더 이상은 안 돼. 하지만 오후가 되면 손에 쥐고 있던 현금으로 다시 마약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이걸 해야 해. 내 인생을 낭비해야 해. 쓰레기가 되어야 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던 엄마의 딸이던 셰릴에겐 남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채식주의자에 약초즙을 물처럼 들이키며 살았던 엄마는 겨우 마흔다섯에 폐암으로 죽었다. 딸에게 아빠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엄마의 새 남자친구 에디 뿐이었는데, 엄마가 죽고 나자 에디는 다른 여자를 만났다. 에디는 의붓딸 셰릴을 대할 때 아빠의 책임보다는 친구의 우정으로 대했던 사람이었다. 딸의 생물학적 아빠는 에디보다도 더 필요없는 존재였다. 그는 엄마도 때리고 딸도 때렸다. 개자식이었다. 엄마 잃은 딸에겐 그래서 아빠가 없었다. 돈도 없었다. 직장도 없었다.

대신 딸에게는 자신을 사랑하는 폴이라는 남자가 있었다. 폴은 끝까지 딸을 사랑했다. 하지만 딸은 폴을 버렸고, 약을 택했다. 그리고 폴과 결혼한 상태에서 아무 남자에게나 안겨 하룻밤을 보내곤 했다. 아마도 딸은 사랑에 굶주렸을 것이다.

결국 나는 엄마에게 대놓고 물어보기까지 했다. “엄마,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은 딸이지, 그치?” 엄마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당연히 그래야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런 말들이 엄마의 마음속에서 하나로 엮여 다시 새로운 느낌으로 내게 전달되기를 바랐다. 나는 사랑에 굶주려 있었던 것이다.

파국 말고는 남은 것이 없어 보였던 인생, 딸은 드디어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될 일이라고 맘을 다잡아 본다.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여전히 마약을 이기지 못하던 상태에서. 그렇게 하여 딸은 갑작스런 도보여행에 도전한다. 충동에 가까웠다. 퍼시픽크레스트트레일(PCT), 캘리포니아에서 출발해 워싱턴주까지 걸어 올라가야 하는 엄청난 도보 여행이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채, 배낭 여행 경험조차 없었던 20대 여성은 그렇게 혼자서 긴 걷기 여행을 시작한다. 당연히 쉬울 리가 없었다. 심지어 그냥 배낭을 매는 것부터 말이다.

그리고 내 배낭을 바라보았다. 거대하면서도 속이 꽉 들어찬, 왠지 정감이 넘치지만 동시에 위협적이기도 한 모습으로 홀로 우뚝 서 있는 녀석. 마치 살아 움직이는 친구 같은 모습에 외로운 기분이 어느 정도 사그라졌다. 똑바로 세운 높이는 내 허리까지 닿았다. 나는 배낭을 움켜쥐고 들어올리기 위해 몸을 굽혔다.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몸을 웅크리고는 배낭의 프레임을 더 단단히 붙들고 다시 한 번 들어 올리려고 용을 썼다. 이번에도 역시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도. 이번에는 두 다리에 단단히 힘을 주고 양손을 이용해 마치 포옹이라도 하듯 배낭을 끌어안고 시도했다. 내 안의 모든 걸 다 쏟아 부었지만 배낭은 미동도 없었다. 정말이지 소형 승용차라도 한 대 들어 올리는 것 같았다. 폭스바겐 비틀처럼 예쁘장한 모습에 금방이라도 움직일 것만 같은데, 도무지 시동이 걸리지 않았다.

길었던 이번 연휴 기간 동안 이 책을 읽었다. 난 아들과 여행을 떠났고, 우리는 수영장이 딸린 작고 예쁜 호텔을 빌렸다. 나는 아들에게 잠수를 가르쳤으며 아들은 내게서 연날리기도 배웠다. 연을 날리기 위해 타래를 든 채로, 내가 아들에게 말했다. “연이 곤두박질치려고 하면 끈을 살짝 헐겁게 놓아주렴. 그러면 연은 통제를 벗어나 자유롭게 떠오른단다.” 나는 그 말을 해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붙잡아 두려고 하면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것이 꼭 너를 닮았지. 자유롭게 놓아주고 싶지만, 그래도 끈만은 붙잡고 있고 싶은 내 모습 또한.’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 제1권》이 내 성경책이라면 《공통된 언어의 꿈》은 사실상 나의 종교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책을 펼치고 첫 번째 시를 큰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내 목소리가 텐트의 벽을 때리는 바람 소리 위로 높이 울려 퍼졌다. 나는 그 시를 읽고, 읽고, 또 읽었다. 시의 제목은 바로 ‘힘Power’이었다.

이 책은 내가 스무살이 되던 해 떠났던 자전거 여행의 기억을 되살리게 만들었다. 당시의 난 형편없었다. 하루에 20킬로미터 남짓한 거리를 다섯시간에 걸쳐 달렸다. 그랬던 내 몸이 어느 순간 텐트와 취사도구까지 실은 채 하루 80킬로미터 정도는 가뿐히 주파할 수 있게 변해가는 것을 보는 건 기적 같은 일이었다. 괴로울 때마다, 노래를 부르곤 했다. 신해철의 노래도 불렀고, 민중가요도 몇 곡 불렀던 것 같고, 무엇보다 김광석의 노래를 불렀고. 그리고, 그 여행의 길에서 나는 끊임없는 도움을 받았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의 아무 조건 없는 친절이 못된 사람들의 불친절과 괴롭힘을 압도적으로 넘어섰다.

이 책을 간단히 줄이자면 약쟁이 딸, 엄마를 잃은 딸의 성장 이야기다. 다시 세상을 사랑하고 엄마가 되고자 마음을 먹게 되는 과정 말이다. 배경이 야생의 자연, 즉 와일드와 함께 펼쳐진다는 것 정도가 중요한 요소랄까. 하지만 이 책의 제목이 와일드인 것은 딸이 자연의 위대함 때문에 성장했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딸을 키운 것은 와일드한 자연 속에서 조건 없이 사랑을 베풀던 다른 사람들이었다. 개자식 같은 아빠, 책임감 없는 의붓아버지, 일찍 세상을 떠난 엄마, 사랑했지만 사랑을 받을 준비가 안 돼 떠나보내야 했던 폴. 그들과의 어긋난 관계들이 여행을 통해 만난 낯선 이들과의 우정을 통해 조금씩 자리를 찾아간다.

아들에게 연을 날리는 법을 가르쳐 줬던 나는, 여행을 정리하기 전날 저녁 “우리 이 연의 끈을 잘라줄까?”라고 아들에게 물었다. 아들은 되물었다. “왜요?” 난 답했다. 연이 끈에 매어있잖아. 끈을 놓아주면 멀리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을 거야. 아들은 더 현명한 선택을 했다.

“나, 이 연을 아까 수영장에서 만난 그 누나에게 선물할래요. 내게 잠수하는 법도 가르쳐 주고, 물속에서 가위바위보 하는 법도 가르쳐 준 그 누나한테요.”

나는 끈을 놓을 생각만 했지만, 사실 사람들이란 끈을 건네고 또 받으면서 서로를 엮어간다. 늘 그랬듯이.

리틀 브라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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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버스터 당시 정의당 서기호 의원이 이 책을 소개했다. 그러자 저자가 이 장면을 보고선 “한국에서 내 책을 소개했다”며 트윗을 올렸다. 이 기묘한 세상. 도대체 어떤 책이기에 소개했을까, 그리고 이 저자는 어떤 사람이기에 한국의 필리버스터에도 관심을 갖고 있을까(물론 독자가 트윗으로 알려줬겠지만) 궁금해서 책을 펼쳤다.

… 그리고 책을 덮지 못했다.

책의 내용은 간단하다. 어느날 샌프란시스코에서 폭탄이 터져 베이교가 무어졌다.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리스트의 소행이었다. 그러자 미국 정부는, 정확히는 ‘국토안보부’는 이를 기회로 삼아 온갖 비상조치들을 내놓기 시작한다. 심지어 ‘애국자법2’도 등장했다. 9.11 테러 때 등장했다가 부분 위헌 판결로 무력화된 ‘애국자법’을 비꼰 패러디다. 문제는 국토안보부가 테러리스트는 못잡고, 무고한 시민들을 잡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정부는 선거를 앞두고 있었고, 위기는 권력자에게 기회니까. 주인공 마커스는 고등학생이다. 폭탄이 터지던 그날 우연히 국토안보부에 붙잡혀 감옥에 갇혔고, 잘못된 사람을 잡아왔다는 것을 깨달은 국토안보부는 구금 사실을 비밀로 유지하는 조건으로 마커스를 풀어준다. 하지만 함께 구금된 마커스의 친구는 풀려나지 못한다. 그래서 마커스는 평소 즐기던 방식대로 정부에 저항한다. 인터넷 말이다.

샌프란시스코를 경찰도시로 만들려고 하는 가상의 미국 정부 이야기지만, 읽다보면 이게 정말 묘하게 낯이 익은 구석이 있다. 우선 마커스가 학교에서 쓰는 노트북부터.

“스쿨북에는 윈도우 비스타4스쿨이 깔려 있는데, 이 구닥다리 운영체제는 학교 관리자들에게 학생들이 이용하는 프로그램을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 주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청소년 유해물 차단 앱’을 만들어 스마트폰에 강제로 깔아주겠다는 사람들이 어디 있던데…

마커스는 아주 똑똑한 고등학생이다. 도서관 책에 달린 RFID태그가 책을 빌린 학생의 위치추적에 편법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알고는 전자렌지에 책을 넣고 돌려 RFID를 망가뜨리기도 하고, 두루마리 휴지심에 자전거 조명에서 떼어낸 LED램프를 잔뜩 박아넣어 소형 몰래카메라 렌즈를 찾아내기도 한다.(렌즈 유리의 빛 반사를 통해) 또 엑스박스 해킹(실제로 벌어졌던) 사건에서 영감을 얻은 듯 보이는데, 엑스박스에 리눅스를 설치한 뒤 와이파이 릴레이 방식(이건 FON을 연상시킨다)으로 인터넷에 접속해서 정부가 추적할 수 없는 거대한 통신망을 구축하기도 한다.

특히 마커스의 친구들은 수많은 공개 암호 방식을 사용하는데, 이것도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 마커스는 이런 말을 한다.

“튜링이 에니그마를 발명한 사람보다 똑똑했다는 게 문제였다. 암호화 체계를 만들고 나면 만든 사람보다 더 똑똑한 사람이 그 체계를 깨버릴 위험에 노출된다. 그래서 그 문제에 대해 더 많이 고민할수록, 설령 만든 사람조차 깨는 방법을 모르는 보안 체계를 만들어내더라도 누군가는 방법을 찾아낼 것이라는 생각이 더 커졌다. 자신보다 똑똑한 사람이 무슨 일까지 해낼 수 있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암호 체계가 제대로 작동되는지 알려면 대중에게 공개해야 한다. 그 체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저마다 가진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그 체계를 두드려보고 안전성을 점검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이 결점을 찾아내지 못할수록 암호 체계는 안전한 것이 된다. 오늘날 암호 체계는 그런 방식으로 운영된다. 암호가 안전하기를 바란다면 지난주에 어떤 천재가 만든 암호화 방식이 아니라, 아직 아무도 깨는 방법을 찾아내지 못해서 오랫동안 사용해온 방식을 이용하는 게 낫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특정 암호가, “정부만 들여다 볼 수 있어야 안전하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어느 나라 국가기관에서는 보안적합성을 통과하지 못한 안전하지 못한 스마트폰으로 이 스마트폰을 꼽았다고. 왜냐하면 정부가 다 들여다 보고 안전성을 검증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게 해서. 그런데, 이 스마트폰은 또 다른 나라에서는 지나치게 보안이 잘 돼 테러 방지에 지장이 있다고 FBI를 열받게 했다더라. 문제는 최근에 보안적합성을 통과하지 못한 스마트폰은 별 문제가 없는데, 적합성을 통과했을 스마트폰들이 북한 사이버테러에 뚫렸다는…

끝으로, 저자는 한국어판 번역과 함께 한국 독자들을 위해 특별히 저자의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런 저자의 책이 한국 국회에서 소개됐으니, 저자로서도 즐거운 경험이었을 듯.

“외설과 저작권 해적질을 막기 위해, 혹은 “최근 북한의 지뢰 폭발과 연천 포격 등 도발과 관련해 남한이 거짓으로 날조했다고 비난하는 허위의 내용이 담겨 있는”(한국방송통신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차단한다며 검열 체계를 만들면, 권력자는 숨기고 싶어 하는 자료를 이런 분류에 넣기만 해도 네트워크에서 쉽게 없애버릴 수 있게 됩니다.”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허핑펀포스트가 좋은 점은 아마도 이렇게 세계 각국의 허핑턴포스트 기사를 번역할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오른쪽 클릭을 막아놨네. 바보같은 웹사이트다. 이 글은 내게는 ‘마스터 키튼’으로 처음 접하게 된 우라사와 나오키의 인터뷰. 많은 사람들은 그냥 친구가 나오는 ’20세기 소년’ 혹은 ‘몬스터’로 기억하는 모양이지만, 나는 아무래도 마스터 키튼이 좋다. 인디아나 존스의 일본식 짝퉁이든 말든.

물론 만화가 무료가 되었다고는 해도 만화를 배급하는 회사가 작가에게 돈은 지불하지요. 하지만 그건 이 문제와 관계가 없습니다. 만화가와 독자 사이에 ‘대가를 내고 구입한다’는 계약이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대가를 내가 구입해야만 작품에 대한 경의랄지, 역으로 말하면 불평할 수 있는 권리랄지, 여러 가지가 발생하는 거예요. 근데 그게 무료라면 뭐랄까 그 ‘당연한 관계성’이 생기지 않는 느낌이 듭니다.

돈을 낸 사람에게는 계속 불만을 말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무료로 볼 거라면 궁시렁궁시렁 하지마’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본래 작가에게 있어서 궁시렁궁시렁 얘기해주는 독자의 존재란 매우 중요해요. 물론 ‘재미있어요’라고 말해주면 기쁘지만. 그러니까, 얼마 되지 않는 돈이라도 지불하고 산 의견이란 건 무게가 다르다는 이야깁니다. 만화가와 독자의 위치가 이상하게 대등한 느낌이 듭니다.

종이책 밖에 내지 않는 구식 아저씨지만, 계속 이렇게 해줬으면. ‘빌리 배트’도 그렇고, ‘플루토’ 같은 리메이크 만화도 역시 종이책이어서 좋았던 것 같다.

되게 멋진 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교수님을 보며 든 두 가지 생각. ‘아, 아름답다.’ 그리고, ‘아, 그런데 쓸데없다.’ 깨달음의 순간이었다. 인문학의 아름다움은 이 무용(無用)함에 있는 것이 아닐까.”

본업보다는 칼럼니스트가 더 본업같은 문유석 판사님의 이 칼럼을 읽다보면 고 김현 평론가가 생각난다. 아직도 기억난다. 1996년 봄, 왜 나는 성적을 맞춰서 되도 않은 외국 문학 따위를 전공하고 있을까 고민하던 때 대한민국 불문학계의 거두이며 한국 문학 발전에 가장 기여했던 사람이었을 그가 책에서 그렇게 썼다.

“유용함은 인간을 억압한다. 문학은 쓸모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으며 억압이 인간에게 얼마나 부정적으로 작용하는지 보여 준다. 이것이 바로 쓸모없는 문학이 쓸모 있는 이유다.”

세상 모든 건 다 쓸모가 있게 마련이고, 세상 모든 공부는 다 쓸모를 위해 하는 것인데, 유독 문학만은 쓸모가 없기 때문에 가치가 생기는 것이라고. 세상 모든 것이 다 쓸모 있다는 이유로 사람을 괴롭히니까 쓸모없는 문학이 있어야 그 쓸모있다는 것도 얼마나 쓸모없는 것인지 알 수 있게 되는 게 아니겠느냐고.

그땐 그냥 멋진 말인 줄 알았는데, 곱씹어 볼수록 그냥 멋진 말이 아니다. 되게 멋진 말이다.

위대한 컴퓨터가 할 수 없는 것

8960774383_f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수많은 일들은 사실 아무렇지도 않을 수가 없게 마련이다. 초당 수천~수십만 개의 문자열을 전송하는 디지털 통신이 아무렇지도 않게 똑같은 데이터를 무제한 복제해내는 일은 너무나 당연해 보이지만 사실 그렇게 당연한 일은 아니었다. 누군가 오류 정정 코드를 쓰기 전까지는. 검색창에 검색어를 입력하면 세계 어딘가의 웹문서 결과가 튀어나오는 일도 이제야 당연하게 보이지만 사실 역시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구글이 페이지랭크 알고리즘을 서비스에 도입했고, 그 전의 선배들이 인덱싱 기술로 웹을 정리하기 전까지는.
미래를 바꾼 아홉 가지 알고리즘은 이런 컴퓨터의 역사다. 암호화 기술, 압축 기술, 디지털 서명 등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지만 사실 일상적이라고 보기엔 처음 시작은 너무나 예외적이었던 기술이 어떻게 탄생하게 됐는지에 대한 배경이 흥미진진하게 설명된다. 이런 과정은 대부분 일종의 수학 퀴즈처럼 보여서, 실제로 수학 퀴즈가 그렇듯 머리가 약간 뻐근해지게도 만든다. 그렇다 해도 퀴즈는 원래 독특한 재미가 있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리던던시 트릭’이라거나 ‘체크섬 시스템’ 같은 알고리즘의 등장 배경을 따라가다보면 바둑 포석을 되짚는 듯한 느낌도 든다. 이런 재미의 상당 부분은 실제 알고리즘을 설명하는 대신 비유로 원리를 설명하는 저자의 친절함 덕분이다. 저자 존 맥코믹은 리던던시 트릭을 설명할 때 장황한 이론 배경을 늘어놓는 대신 “‘12345’를 전송하는 것보다 ‘one two three four five’라는 단어를 전송하면 five에 오류가 생겨 fiqe로 전송되더라도 컴퓨터는 이를 ‘5’라고 알아들을 수 있다”는 식으로 얘기한다.

그러니까 평범한 성인은 잘 달릴 줄 안다. 하지만 우리 모두 한 때는 아기였다. 어린 시절에는 뒤뚱거리며 일어서다 반복해서 넘어졌고, 아장아장 걷다가 무릎이 까지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잘 달리는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 책은 지금의 컴퓨터 기술들도 막 벽을 잡고 일어서던 아기처럼 작은 아이디어에서 출발해 오늘날의 눈부신 성능까지 발전해 왔다는 걸 보여준다.

이런 쉬운 설명들을 통해 모든 알고리즘을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던 건 물론 좋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건 마지막 단락이었다. 이렇게 무엇이든 다 해결해낼 수 있을 것 같았던 컴퓨터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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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 단락의 얘기를 요약하면 이렇다.

“컴퓨터는 반드시 못 하는 일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니까 뭘 할 수도, 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게 아니다. ‘반드시 못 하는 일’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얘기다. 이 단락을 읽으면서 꽤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게 컴퓨터에게 존재한다면 그건 그 자체가 바로 이런 계산하는 기계를 만들어낸 사람도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인식의 한계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사실, 이는 처치-튜링 명제라는 명제에 대한 이야기인데 효과적으로 계산 가능한 알고리즘이 존재한다면 기계는 그 알고리즘을 계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알쏭달쏭한 얘기지만 인간이 고안할 수 있는 유효한 계산식은 기계 또한 계산할 수 있다는 내용이고, 이는 기계가 계산할 수 없는 한계란 건 인간 또한 고안해 낼 수 없다는 대우로도 성립한다.

자, 이렇게 생각해 보자. 기계가 계산할 수 없는, 그러니까 컴퓨터가 풀 수 없는 문제는 존재한다. 이미 증명이 됐다. 그렇다면 인간의 한계도 존재한다. 즉 우리는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한계가 존재한다는 뜻이다. 이럴 때 늘 등장하는 얘기가 초월자의 존재다. 신 말이다. 그러니 조금 더 나아가보면 어떨까. 인간에게 한계가 있고, 인간은 풀 수 없는 문제가 존재한다. 그리고 인간을 신의 컴퓨터라고 생각해 보자. 그렇다면 신의 컴퓨터인 인간이 풀 수 없는 문제가 존재한다는 건 신 또한 한계가 있다는 얘기 아닐까. 수학과 논리와 알고리즘의 세계는 참 재미있다. 사변에 잠기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