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사람과 남은 사람, 그리고 데이브 그롤

블랙 키즈의 ‘론리 보이’가 흘러 나올 때만 해도 익숙했던 풍경이었다. 무대는 어둡고, 기자들은 흥분한 듯 떠들고 있었으며, 애플 직원들은 축제를 벌이는 듯한 그 모습. 팀 쿡의 애플도 계속해서 뛰어난 제품을 만들어내는 회사였고, 애플이 하는 모든 일은 뭔가 세련되고 멋진 일인 것 같았다. 지금까지 애플이 그래왔듯이.
뭔가 꼬이기 시작한 건 발표의 시작이 필 실러의 ‘아이폰5’였을 때였다. 이상한데. 이게 왜 맨 처음이지. 기대치는 갈수록 줄어들었다. 이미 몇달전부터 베타테스터가 되어 쓰고 있던 내 아이폰의 iOS6가 천연덕스레 마치 처음 나온 기능인 양 반복해 소개됐다. 몇 달 전 스콧 포스톨이 직접 소개했던 바로 그 소프트웨어 말이다. 그리고 스티브 잡스였다면 음악을 그렇게 대우하면 안 된다고 길길이 뛰었을 것 같은데도, 아이폰5에 뒤이어 등장한 건 아이튠즈와 아이팟 라인업, 이어팟 등이었다. 스티브 시절의 애플은 이렇게 하지 않았다. 그 시절의 애플은 단지 비틀즈의 음원을 아이튠즈에서 판매할 수 있게 됐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중대 발표’라면서 미디어를 자극하는 회사였다. 애플 광고에 쓰인 노래들은(모두는 아니지만) 애플이 쓰기 전까지는 인디에서 갓 주목받던 곡들이었고, 애플은 그런 음악들을 메인스트림으로 올려주는 역할을 맡곤 했다. 팬들은 기꺼이 그런 애플의 약간 지나친 자의식에 열광적인 지지로 응답했다.

그러다가 아이튠즈 발표 도중 ‘어벤저스’가 등장했다. 돈을 많이 벌어들인 영화임엔 틀림없고, 나도 재미있게 봤던 영화지만, 그게 전부였다. 왜 어벤저스를 고른 걸까. 넥서스7을 사면 트랜스포머를 한 편씩 기본으로 설치해 주는 건 구글 같은 회사나 하는 일이었다. 스티브의 애플처럼 자의식이 강하고 취향이 뚜렷한 회사에서는 어벤저스로 데모를 하는 건 생각하기 힘든 일이었다. 차라리 다크나이트 라이즈가 나와야 어울릴 자리였다. 그리고 반쪽짜리 뮤직 이벤트(원래는 따로 하나의 완전한 행사로 열었던)가 끝나자 늘 그렇듯 축하 공연을 해줄 밴드가 등장했다. 역시 반쪽짜리 밴드였다. 푸 파이터즈 말이다. 너바나의 처음이자 끝이었던 커트 코베인이 죽고 난 뒤 드럼을 치던 데이브 그롤이 나와서 만든 밴드. 나는 나 스스로 그런지 세대, 그러니까 너바나, 펄 잼, 사운드가든 등을 좋아하던 세대지만 푸 파이터즈는 좋아한 적이 없었다. 물론 이들은 듣기 좋은 곡을 만들어 빌보드 차트에도 올랐고, 스스로에게 총을 쏜 커트 코베인과는 달리 즐겁게 음악을 하며 건강한 인생을 살아간다. 하지만 그건 애플이 아닌 것 같았다. 컬트오브맥의 버스터 헤인은 조금 더 심해서 “마이크로소프트나 할만한 짓”이라며 길길이 뛰었다.

그런데 잠깐. 데이브 그롤이었다. 마지막 무대가.

애플에게 스티브 잡스가 알파이자 오메가였다면, 너바나에게 커트 코베인도 그랬다. 그리고 스티브 잡스가 떠났을 때 사람들은 애플이 망할 거라고 생각했다. 커트 코베인이 시애틀 워싱턴 호수 옆의 자기 집에서 스스로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을 때 사람들은 그런지도 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데이브 그롤은 새 밴드를 만들었고, 푸 파이터즈는 너바나보다 훨씬 오래 살아남았다. 사람들이 더 이상 그들을 그런지라거나 얼터너티브(대안)라고 부르지는 않을지 몰라도 푸 파이터즈는 사랑받는 밴드가 됐다. 그렇다면 스티브가 없는 애플은?

개인적으로 프레젠테이션은 실망스러웠다. 어벤저스와 푸 파이터즈도 싫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애플 사람들은 지금 스티브가 만들어 놓았던 그 세상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쓰는 중이었다. 그것도 스티브가 만들어 놓은 그 모든 걸 다 유지하면서. 말이 안 되는 얘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사실 생각해 보면 그게 애플이 지금까지 해왔던 방식이다.

가까이 아이폰5를 보자. 겉으로만 보면 아이폰4와 아이폰4S와 비교했을 때 세로로 조금 길어졌을 뿐이다. 하지만 그 조금 길게 만드는 디자인을 위해 이들은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아이폰을 설계했다. 두께를 조금 줄이려면 공간 배치를 모두 새로 만들어야 했고, 길이를 늘였다고 그 자리에 배터리를 채워넣을 수만도 없는 법이었다. 이들은 지금까지의 아이폰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 아이폰의 세상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이다. 반대론자들은 왜 애플은 OLED를 쓰지 않느냐고 다그쳤지만 애플은 대신에 LCD를 쓰면서 채도를 더 높였다. 카메라 화소 수는 노키아가 최고라고 얘기하지만 노키아의 렌즈 커버는 사파이어 크리스털(다이아몬드 다음 경도)이 아니다. 렌즈커버에 흠집이 나면 아무리 화소가 높아봐야 사진은 뿌옇게 나온다. 애플은 어디에 돈을 써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싸구려 부품으로 가격을 깎는 건 누구나 하는 일이다. 하지만 제대로 된 부품으로 비싼 공정을 유지해 비싼 제품을 만들면서도 제품의 가격을 2007년 이후의 인플레이션을 무시한 채 유지한다는 건 그야말로 마법같은 일이다. (게다가 애플이 만들어낸 이 터프한 가격 경쟁 덕분에 안드로이드 팬들도 값싸고 품질좋은 스마트폰을 쓰게 됐다.)

스티브는 세계 최고의 연설가였고, 쇼맨이었다. 물론 그 아우라가 그립다. 이제 애플에 그런 건 없으니까. 그 사실을 모두가 안다. 하지만 최고의 제품을 만들던 사람들은 그대로 남아 있고, 그 사람들은 여전히 최고의 제품을 만든다. 넥스트 시절의 스티브 잡스는 ‘괴짜들의 승리'(Triumph of Nerds)라는 PBS 다큐멘터리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애플이 만들어낸 것을 따라했다고 뭐라고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들의 성공에 제가 배가 아플 이유도 없습니다. 그들은 대단한 성공을 이뤄냈고, 그 성공을 자신들의 힘으로 일궈냈습니다. 그것이 저를 슬프게 만들 이유는 없죠. 다만, 마이크로소프트의 제품에는, 뭐랄까, ‘취향’이 없습니다. 그들은 소프트웨어에 문화를 불어넣고, 그것을 뭔가 의미 있는 것으로 발전시키는 법을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슬픈 것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엄청난 성공이 아닙니다. 제가 정말로 슬픈 이유는, 마이크로소프트가 만들어내 성공을 거둔 모든 제품들이, ‘삼류’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애플의 발표에는 ‘취향’이 없다. 그들은 발표에 문화를 불어넣고, 그것을 뭔가 의미 있는 것으로 발전시키는 법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아이폰은 삼류가 아니다. 발표는 삼류지만 그들은 여전히 일류 제품을 만든다. 그리고 발표는 이들이 사랑하는 제품이 아니기 때문에 애플은 발표를 잘 하는 사람을 따로 스카웃할 것 같지는 않다. 그 자리는 이 사람들이 존경하는 사람의 자리이고, 우리 팀 최고의 선수를 위해 비워놓는 영구결번 백넘버 같은 것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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